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우리 집은 아침부터 요란하다.
모이는 가족은 총 다섯.
아이 여섯에 어른 열 명이 우르르 몰려들면, 나는 웰컴 드링크부터 식사 두 번에, 간식에, 술자리까지.
할 일이 끝도 없겠지.
자청해서 사람들을 초대한 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른 대접은 내가 하면 되지만, 문제는 하루 종일 풀 체력의 애들을 돌보는 건데...
그걸 위해 특별히 전문가도 모셨다.
“오빠~! 샴페인은 다 2층으로 옮기면 되죠?”
“그건 내가 할게. 넌 거실에 좌석 배치부터 해줄래?”
“옹키이~! 오늘 레크레이션은 저 맘대로 합니다?”
“그래주면 너무 고맙지.”
아카다.
이제 아카도 나이를 먹어서 섹드립은 자제하게 됐지만...
그녀의 인생은 7년 전이나 딱히 바뀐 게 없었다.
여전히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고, 보드게임 동아리에서 마스터 역할을 하고 있고.
요즘은 보드게임 사업을 시작했다던데, 잘되는지는 모르겠고.
그런데 극적으로 바뀐 게 딱 하나 있다면...
매년 공휴일마다 함께 놀아주던 두 사람이 없어졌다는 거.
원석이 형은 요즘 누나랑 깨 볶기 바쁘고, 마바지도 요즘 남편이랑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덕분에 아카는 올해 처음으로 솔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내가 파티 얘기를 꺼내자마자 혼자 노느니 일이나 하겠다고 알바를 자청하고 나섰는데...
그녀의 던전 마스터 실력이라면 애기들은 정신이 쏙 빠지겠지.
든든해 죽겠네.
그때, 방에서 다혜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쟈기야, 난 뭐할까?”
“겨울이는 분장 끝났어?”
“응! 옷 입느라 지쳤나 봐. 잠깐 잠들었어.”
“그러면 음식 좀 도와줄래?”
“우와... 벌써 이만큼이나 한 거야?”
그러고 보니 많이도 늘어놨네.
싱크대와 아일랜드에는 음식들이 빈자리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녁에 먹을 고기도 부위별로 시즈닝 해서 냉장시켜놨고.
샐러드용 야채와 갑각류들도 손질이 끝나가고, 스프와 소스는 이미 끓고 있고.
이 정도면 반은 끝났네.
“이만큼이라니, 아직도 반밖에 못 했어.”
“히익... 메뉴가 뭐길래 재료가 이렇게 많아?”
“코스야. 태평양에서 출발해서 지중해와, 아르헨티나의 초원을 지나. 벨기에식 디저트로 마무리할 거야.”
“엄마야... 자기 오늘 너무 무리하는데... 진짜 할 수 있겠어?”
“그럼그럼. 나의 행사 경력을 믿으시라.”
가난의 가 자도 못 나오게 해주겠다 이거야.
물론 나는 가난뱅이는 아니지만, 딱히 돈을 모아도 자랑하거나 사치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오늘은 생각이 바뀌었다.
으리으리한 우리 집이 오늘은 고맙게 느껴진다.
마당도 있고, 차고도 있고, 2층 테라스에는 작은 수영장도 있고.
형이 타운 하우스를 정리하고 판교에 새 사무실을 잡았을 때, 선물이라며 우리에게 사준 집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뭘 이런데 돈을 쓰냐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형은 애들은 뛰어놀아야 한다며 꾸역꾸역 이 집을 떠넘겼었지...
한동안 주택 관리 배우느라 골치 아팠었는데.
오늘은 아주 굿이다.
판교의 잘나가는 공돌이들도 우리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느끼겠지.
이 자식... 좀 사는데? 라고.
그러면 하은이도 후회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으흐흐흑 겨울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부디 나중에 내가 변호사가 되면 고용해주지 않을래? 너의 구두라도 핥을게...]
“성현아,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웃어?”
“응? 내가 웃었어?”
“응... 뭔가... 나쁜 웃음이었어...”
“전혀 아니야, 철저하게 공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래...? 헐... 성현아, 벌써 12시야! 이제 우리도 옷 갈아입어야겠다.”
오늘 파티는 코스튬 파티다.
그리고 우리의 의상은... 요즘 애들이 껌뻑 죽는다는 애니메이션 “엘리자베스 패밀리”의 일가족 코스프레다.
다혜는 엄마인 피오르의 코스프레로 검은색 드레스에 꽃무늬 헤어핀을 했고.
나는 아빠인 로이의 코스프레를 위해 연보라색 턱시도를 쫙 빼입었다.
그리고 겨울이는...
“아빠~ 나 배고파아...”
“겨울이 잘 잤어? 머리 다시 묶어줄게 이리 와봐.”
야무진 바로크풍의 교복을 입고 있다.
하얀색 셔츠와 갈색 치마, 거기에 오늘의 포인트인 롤빵머리가 더해지면...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엘리자베스 그 자체지.
“다 됐다. 불편하진 않아?”
“응! 근데 나 엘리자베스같아? 엄마는 똑같다고 했는데.”
“그럼. 완전 겨리자베스야.”
“아싸! 진솔이 오빠한테 자랑해야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애들이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오줌이나 지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겨리자베스가 될 거다.
그리고 아카도 파티의 참석자니까.
어느새 코스튬을 장착하고 나타나서는 한 바퀴 빙글 돌아보였다.
“다혜야, 나 어디 삐뚤어진 데는 없어?”
“응! 완전 잘 입었어.”
“아카야, 너 캐릭터 이해도 완전 죽이는데?”
“오빠, 그거 칭찬 맞죠?”
“당연하지 당연하지. 완전 리카르도 그 자체야. 애들이 좋아하겠다.”
아카는 엘리자베스 패밀리의 천재 애완견 리카르도가 되었다.
전신 인형 옷이 아주 굿이구만.
“자, 엘리자베스 패밀리 다 모여봐.”
그리고 우리는 거실 한복판에 모여서 내 콜사인에 따라 머리를 맞댔다.
이제 딱 1시간만 지나면 폭풍이 밀려온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 겨리자베스 패밀리의 목표는 겨울이의 원활한 유치원 생활. 그리고 건방진 하은이 일가의 기를 죽이는 거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헐... 자기야... 그런 거였어?”
“별거 없어. 그냥 최고의 파티를 만들고, 우리 가족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주면 우리의 승리다.”
“응... 그런 거라면...”
“겨울이는?”
“응! 나 오늘 애들이랑 진~짜 재밌게 놀 거야!”
“아카는?”
“원래 육아라는 게 이런 거였어요?”
“좋아. 하이파이브 한번 하고, 파티 돌입한다. 손 모아.”
“하나, 둘, 셋!”
“엘리자베스 패밀리 출동!”
좋아, 아주 듬직하구만.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건방진 하은이와 그 부모들의 면상을 보는 것.
그리고 승리하는 것.
두 번다시 우리 가족을 무시하지 못하게 해주마.
**
“우와! 엘리자베스 패밀리다!”
“꺄아아아! 성아야!!”
약속 시간 30분을 남기고 하나둘 가족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1등은 성아네.
성아는 멋진 배트맨이 되었고 부모님들은...
으잉? 그냥 일상복이네.
코스튬 파티라더니... 애들만 하는 거였나?
아니, 어찌보면 당연한 건가?
“우와! 겨울이 어머니, 그런 옷은 어디서 사셨어요?”
“어머, 프로 코스프레 팀이요? 대단하시다... 너무 멋져요!”
“와... 겨울이 아버님도 수트빨 죽이시네요. 진짜 킬러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의상은 달냥냥님께서 빌려주셨다.
허접한 인터넷 주문이랑은 퀄리티부터 비교도 안 되지만.
음...
코스튬 퀄리티로 찍어 누르는 게 원래 내 작전이긴 했는데...
어째 부끄럽네.
오늘 겨울이의 친구들을 처음 보는데도 애들은 나와 다혜를 보자마자 무턱대고 안기기 바빴다.
“우와~! 진짜 로이다! 아저씨 진짜 킬러에요!?”
“그럼~! 아저씨 권총도 있다? 볼래?”
허리춤에서 멋지게 권총을 빼 들자, 성아랑 진솔이는 혼절 직전까지 가버렸다.
오랜만에 유치원 바깥에서 만나서 그런가.
애들은 금세 어른들에게 흥미를 잃고 우르르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괜히 마당에 깔린 자갈도 들추고.
겨울이는 마당 곳곳에 애들을 끌고 다니며 자랑하기 바쁘고.
“겨울아 뛰면 위험해~ 천천히 놀아!”
“알아떠 아빠!”
우왁스럽게 뛰는 겨리자베스와 그 뒤를 따르는 배트맨, 휴먼 아이스크림, 인면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전투력이 하락하는 기분이다.
하긴, 겨울이는 워낙 성격이 좋아서 어떤 애들하고 같이 둬도 문제없이 지내니까.
여태껏 친구 관계로 고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음... 역시 문제는 하은이네뿐인가.
“어... 하은이네만 안 왔네요?”
“아이고, 아까 전화해봤는데, 하은이네 부모님은 조금 늦으신다네요.”
“아 그런가요? 그럼 먼저 차라도 드시고 계시죠.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번에 다혜씨가 성현씨 요리 잘한다고 엄청 자랑하던데, 오늘 저희 솜씨 구경하는 건가요?”
“그럼요. 야식까지 풀코스로 쫙 깔아뒀습니다.”
“꺄아~!”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들부터 집안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가고.
어제부터 다혜와 내가 눈물의 노가다로 꾸며둔 크리스마스 장식에 연이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 어린이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제일 말 잘듣는 어린이에게는 언니가 상품을 줄 거에요!”
“우와! 리카르도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카를 따라 거실에 자리를 잡고.
엄마들은 홈 바에 앉아서 웰컴 푸드로 준비한 카나페와 허브티를 마셨다.
“우와, 이거 진짜 겨울이 아버님이 다 만드신 거에요? 완전 프론데요?”
“예전에 케이터링 일을 좀 했었거든요. 그때 이것저것 배웠습니다.”
“그럼 진짜 프로네!? 왠지... 모양새부터 너무 고급지다... 잘 먹을게요!”
“다들 점심 안 드셨죠? 곧 식사도 있으니까,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점점 기대되네... 점심 메뉴 뭔지 물어봐도 돼요?”
“오늘은 날이 추워서 따뜻한 프랑스 가정식으로 준비해봤어요.”
“꺄아~!”
그리고 애들만큼 아주머니들도 신났다.
오랜만에 아이들에게서 해방돼서 수다도 잔뜩 떨고.
내가 내주는 음식 얘기도 잔뜩 하고.
다혜도 신나서 떠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대놓고 허세를 부린 건 난생처음인데.
저 표정을 보면 훌륭한 남편은 못 돼도 훌륭한 남편 코스프레 정도는 됐겠지?
아카의 레크레이션과, 인사팀에서 익힌 나의 필살 비즈니스 토크로, 점차 집안에 웃음소리가 가득해진다.
그리고 그때,
띵동~!
“하은이네 왔나보다!”
“제가 나가볼게요.”
“나도!”
마침내 올 것이 왔군.
나는 다혜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관으로 나갔다.
여태까지는 작전대로였는데.
문을 열기 직전, 다혜와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 긴장되네.
하은이는 어떤 애일까?
그리고 하은이네 부모님은?
내 머릿속에서는 눈이 새빨갛고 유치원 선생님의 뺨을 후려치는 사악한 빌런인데.
과연, 겨울이의 주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문을 열자.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겨울이 어머니, 겨울이 아버지, 하은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