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33화 (33/376)

〈 33화 〉 시한폭탄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공연 불안 증후군(Music performance anxiety .

흔히들 무대 공포증이라고 부른다.

사람들 앞에 서면 가슴을 옥죄어 오는 느낌이 들면서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린다.

정도가 심하든 약하든 무대에 서는 직업군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무대 공포증을 겪는다.

프라이데이의 래퍼 일재의 경우는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독특한 펀치라인과 리드미컬한 플로우를 타며 괴물 연습생으로 불리웠던 일재는 데뷔와 동시에 무대를 터뜨렸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니다.

말그대로 무대를 터뜨려서 프라이데이는 데뷔와 동시에 폭망의 길로 접어들 뻔 했다.

분명 리허설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대를 찢어놓을 거라고 잔뜩 기대를 했다.

하지만 왠걸.

본 무대에 오르자 가사를 놓치도, 박자도 놓치고, 정신줄까지 놓쳐버렸다.

어찌저찌 무대는 마쳤는데, 방송 후 커뮤니티에는 일재에 대한 조롱과 밈으로 넘쳐났다.

첫 방송 출연이니까 긴장해서 그랬을 거라는 변명이 통하는 건 한번 뿐이었다.

일재는 그 이후로도 본 무대만 올라가면 무대를 터뜨렸다.

도저히 수습이 뷸가능한 지경에 왔기에 협의하에 아예 일재의 파트를 빼버리는 강수를 두고나서야 프라이데이라는 배는 간신히 제 항로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익숙한 사람들 앞에서 하는 공연은 미국 본토의 흑인들을 가져다놔도 뺨을 때릴 기세로 랩을 쏟아내던 일재는 공연이 무작위의 대중들 앞에 공개된다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혀가 굳어버렸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재는 괴로워했고 고통스러워했다.

홀로 작업실에 쳐박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시간이 늘어났다.

급기야는 넌지시 탈퇴를 입에 담기까지 했다.

해줄 수 있는건 없었다.

아니, 무언가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어렸고 이기적이었다.

그가 알아서 팀을 나가주길 바랐던 것일지도 몰랐다.

소속사는 무슨 정신머리인지 무대공포증인 일재를 래퍼들의 경연프로그램인 ‘펀치라인 킹’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반대했다.

안그래도 조롱의 대상인데 절정의 래퍼들에게 조리 돌림을 당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간신히 데뷔를 했는데 일재가 모든 걸 망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허나 소속사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루밍의 대표인 이한성은 일재와 따로 면담을 한 뒤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재는 경연에 나가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본 방송에서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것이다.

프라이데이는 돌아온 탕아를 다시 받아들였다.

버리려던 패가 게임체인저가 되서 돌아왔는데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게 단순히 일재가 노력해서 일궈낸 인간 숭리라고 생각했다.

몸에 벤 향긋한 마리화나 냄새와 초점을 잃어가는 동공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프라이데이는 승승장구했고 미친듯한 랩을 뽑아내는 일재는 필수불가결인 존재가 되었다.

일재의 정신이 망가져가는 걸 알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언젠가 터질 폭탄임을 알았지만 현재의 영광을 누리느라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폭탄은 결국 재계약 시즌과 함께 터져버렸다.

하랑은 한참을 전화부스 앞에 주저 앉아 있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소진과 등을 맞댄 채로.

지금은 그냥 시간을 주는 게 최선이다.

그래도 결국 데뷔하기 전에는 해결을 봐야하는 문제임은 부정할 수 없다.

가나의 거식증.

소진의 무대공포증.

시트러스밤은 밤(Bomb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데뷔를 하기 전에 이미 폭탄을 둘이나 안고있다.

회사에서 알게되면 둘 다 잘라내려고 할거다.

어차피 티오가 부족하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겠지.

- 똑. 똑.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랑은 정신을 차렸다.

“가자.”

소진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마음을 다 추스리진 못했는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다.

“괜찮아요? 잠깐 벤치에 앉을까요?”

“그래. 조금······. 앉아있자.”

부스에서 나온 소진과 하랑은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소진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했고 결국 하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대공포증이죠?”

“응.”

소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미안해요. 제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율동을 시켜서 많이 당황하셨죠?”

“오히려 나 때문에 하랑이가 당황했지. 내가 많이 이상하게 굴었지? 애들 앞에서 노래 좀 불렀다고 혼자 당황해서는 너한테 화풀이했잖아.”

무릎 위에 얹어진 소진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아까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는 거다.

이건 심각한 수준이다.

수시로 대중들 앞에 서야하는 아이돌이 목표인데 무대에 올라가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낀다니.

하랑은 떨고있는 소진의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떨림이 잦아드는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동안 어떻게 무대에서 버텼어요? 우리 한달에 한 번씩 월말평가도 하잖아요.”

“화장.”

소진이 서글픈 눈으로 하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화장을 짙게하면 얼굴에 가면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두렵지도 않고, 떨리지도 않아. 눈 앞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

늘 소진이 화장을 진하게하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적인 사람인데 언제나 날카롭게 아이라인을 그린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가나가 쓰러지는 바람에 급하게 뛰쳐 나왔던 거라 화장은 신경쓰지도 못했다.

소진은 단지 맨 얼굴로 대중들 앞에 선 것이 무서웠던 거다.

어쩌면 소진의 무대 공포증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증상을 알고있고 나름대로의 해결법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 공포증으로부터 그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 화장이라는 루틴을 선택했다.

일재의 선택보다는 확실히 건전하고 자연스럽다.

여자 아이돌이 화장을 안하고 무대에 올라갈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언니는 맨얼굴이 참 고와요. 화장을 왜 그렇게 진하게해서 자연스러운 매력을 감추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가네요.”

폭탄을 안고 있지만 확실한 안전장치도 있다.

기발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정신적인 문제니까 화장이라는 징크스로 암시를 걸어서 틀어막는다라.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았네.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이상한 기벽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소진처럼 확실한 액막이 수단이 있다면야 문제될 것도 없다.

“회사에는 말하지 말아줘. 부탁할게.”

“말 안해요. 언니가 시트러스밤의 리더인데 멤버들 든든하게 자리 지키셔야죠.”

“고마워.”

“저말고 언니가 무대공포증인거 아는 사람 또 있어요?”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만 같이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희영이랑······. 을선 언니. 둘 빼곤 아무도 몰라. 아, 이제는 너도 알지. 셋이네.”

을선? B클래스 숏컷 언니 태을선?

그 사람이라면 괜찮다. 진중하고 입도 무겁고.

데뷔조에 속했다면 시트러스밤의 리더는 신소진이 아니라 태은설이었을 거다.

요즘에는 시트러스밤의 커리큘럼에 따라 연습을 하느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아직도 B클래스에 있으려나 아니면 그만 뒀으려나.

신소진은 말을 돌리려는 듯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 많이 추했지? 얼굴 빨개져서는 계속 허둥대고. 창피하다고 전화 부스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고.”

“사실 귀여웠어요.”

솔직히 귀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일부러 소진을 놀려주려고 강제로 율동을 시킨 것도 맞고.

소진이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하랑이 너 보기보다 심보가 고약하구나.”

“언니는 매사에 진지한 편이잖아요. 그런 사람 놀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언니를 놀리는게 재밌어?”

소진이 하랑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자 하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옆구리 꼬집는 건 반칙이죠.”

하랑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소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리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게 어딨어? 이리와, 쪼꼬미. 언니의 손맛을 더 봐야되지 않겠니?”

하랑이 키득거리며 뒤로 물러설때 쯤, 소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진은 전화를 받더니 굳은 표정으로 몇마디를 주고 받다가 끊었다.

“응급실에서 온 전화야. 가나 정신 차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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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 들리자 간호사가 가나가 깨어났음을 전했다.

둘은 서둘러 가나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나는 링거를 맞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표정에는 미안함과 걱정이 묻어났다.

“잘 하는 짓이다. 한 녀석은 화장실에서 쓰러지질 않나.한 녀석은 문짝 뜯다가 손바닥을 해먹질 않나.”

“언니, 저······. 이제 괜찮아요.”

“그냥 누워있어. 회사에는 너 몸살 때문에 쉰다고 이야기했으니까. 굶다가 쓰러진 거 몰라.”

“고, 고마워요. 안그래도 그 걱정 뿐이었는데.”

“감사는 여기 쪼꼬미한테 해. 너 시트러스밤에서 잘릴까 봐 조용히 덮자고 한게 하랑이니까. 병원까지 너 업고 뛴 것도 하랑이야.”

가나는 하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상어 잠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다급하게 병원으로 왔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랑아 고맙다. 진짜.”

“회사에는 제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가뜩이나 티오도 모자른데 괜히 흠잡혀서 잘리면 아깝잖아요. 어떻게 놀라온 데뷔조인데······. 이거 알려지면 저랑 언니랑 손잡고 시트러스밤 나가야돼요.”

“미안해, 너까지 휘말리게 해서.”

“이거 심각한 일인 건 알고 계시죠?”

가나가 지은 죄를 알고있는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는 시트러스밤의 건강을 체크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비단 시트러스밤 뿐만이 아니라 소속된 모든 연습생들의 건강을 관리해야할 의무다.

게중에서 데뷔조로 선정된 10명은 집중관리의 대상이다.

개인별로 식단표가 나왔고 구내식당에서는 회사에서 정해준 식단대로 식사를 제공했다.

더 먹어서도 안되고 덜 먹어서도 안된다.

대부분은 체중이 오버되서 칼로리가 적은 음식들이 제공되지만 가나의 경우에는 반대로 고칼로리의 식사가 제공되었다.

심각한 저체중이라는 걸 회사에서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나는 약속된 식사를 섭취하지 않고 버렸다.

한두번도 아니고 상습적으로.

그 결과가 응급실 행이다.

“그루밍에서 레몬으로 옮겨왔다고 했죠? 거기서도 알아요? 언니 거식증인거?”

“그루밍에선 모를 거야.”

사실 알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제는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인데 크게 신경 쓸 이유도 없다.

다만 업계 바닥이 좁아서 혹시나 레몬 엔터쪽에 쓸데없는 소문이 들릴 우려가 있다.

데뷔까지 6개월만 조심하면 아무일 없이 지나갈 것이다.

“앞으로는 식사 거르시면 안되요. 이번엔 운이 좋아서 넘어간다쳐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저도 같이 짐싸야되요.”

“그래. 조심할게.”

“소진 언니랑 퇴원 수속 밟고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빠르게 퇴원 수속을 밟고 온 두 사람은 가나를 퇴원 시키고 병원 밖으로 나섰다.

가나는 여전히 초췌했고 앙상한 나무가지처럼 말라있다.

지금은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습관성 거식증 환자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일단은 눈에 밟힐 때 뭐라도 먹여둬야지 안심이 될 거 같다.

“밥 먹고 들어가죠. 아침부터 쫄쫄 굶었더니 허기가 지내요.”

밥이라는 단어에 가나의 표정이 급격히 우울해진다.

방금 전까지 영양실조로 쓰러졌다가 나왔으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에너지를 보충해야 할텐데 너무 굶어서 생존 본능까지 거세된거야?

기본적인 칼로리는 섭취해야 될 거아냐.

“밥 생각없다고 말하면 나 정말 화낼 거에요.”

“그래······. 먹자.”

하랑은 병원 근처의 죽 전문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거르는게 일상인 가나에게는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테이블에 앉아 닭죽 세 그릇을 시키자 곧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그릇에 한 가득 채워진 죽이다.

보기엔 많아보여도 쌀을 부풀린 거라서 실제 양은 얼마되지않고 소화도 빨라서 금새 또 배가 고픈 음식이다.

그릇의 크기를 본 가나의 표정은 이미 질려있다.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거 남기지 말고 다 드셔야 되요.”

맞은 편에 앉은 하랑이 말하자 가나가 울상을 지었다.

누가보면 사약이라도 먹이는 줄 알겠네.

“불쌍한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요. 다 드세요.”

그렇게 한번 더 윽박을 지른 후에야 하랑도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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