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72화 (72/376)

팬사인회 (3)

“하랑이, 늦네. 이제 우리 차례 다 돼가는데.”

윤희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하자 마요가 대답했다.

“하랑, 모자 쓴 여자랑 같이 나갔스무니다.”

“그건 나도 봤어. 혹시 너희도 아는 사람이니?”

혜수와 마요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불과 몇분 전의 일이었다.

하랑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에서 빠져 나가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안전요원이 제지하는 데도 기어코 무대 쪽으로 가더니만, 뜬금없이 사인을 받으려고 줄 서 있던 단발 머리의 여자를 껴안았다.

좌석에 앉아있던 세 사람은 그 요상한 시츄에이션을 벙찐 얼굴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하랑, 여자한테 폿포 했스무니다.”

“나만 그렇게 본 거 아니지? 까치발 들고 볼에다 뽀뽀한 거 맞지?”

윤희가 동의를 구하자 혜수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전 찬성이에요.”

“뭐가 찬성인데?”

자리를 비웠던 하랑이 돌아왔다.

단발 머리 여자랑 같이 나갔는데 돌아온 건 혼자다.

“네 애인은 어쩌고?”

혜수의 뜬금없는 물음에 하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인? 무슨 애인?”

“아까 하랑이 네가 데리고 나갔던 여자. 볼에 뽀뽀도 했잖아. 우리도 다 봤어.”

왜 능청을 떨고있느냐는 듯이 하랑을 추궁하는 혜수였다.

하랑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을선 언니 잖아. B클래스 반장. 오랜만에 보는 거라 반가워서 포옹한 거야. 뽀뽀 아니고 귓속말한 거고.”

“을선? 누군지 몰라.”

생각해보니 얘네들은 태을선을 모를 수도 있다.

혜수는 연기 지망생에서 곧바로 A클래스로 편입했고, 마요는 외국인이라 처음부터 A클래스였다.

“태을선이라고 B클래스 연습생이었어. 지금은 우리 회사 소속이 아니고.”

“어쨌든 뽀뽀한 거 아니지? 다행이다. 하랑이 너 성적 취향이 특이한 줄 알고 조금 당황했지 뭐야.”

혜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이걸 성적 취향이 특이하다고 봐야하나 정상이라고 봐야하나?

하랑은 실없는 고민에 빠졌다.

윤희도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가슴을 살짝 쓸어내렸다.

“나도 깜짝 놀랐단다. 너무 박력있게 끌어안길래 헤어진 애인이라도 만난 줄 알았지.”

“저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 아니거든요. 유교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하랑이는 평범하게 남자 좋아하는구나. 하긴 그러니까 남돌 팬사인회에 왔겠지. 오해해서 미안해.”

남자 안 좋아해요.

그냥 평범하게 여자 좋아한다고요.

입 밖으로 내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자제하는 중이고요.

“그 을선이라는 언니는 사인도 안받고 그냥갔어?”

혜수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태을선은 하랑이 달래서 돌려보냈다.

해코지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지만 정작 을선도 망설이고 있었다.

하랑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을선을 설득했고, 일단 오늘은 태을선도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되면 태을선이 다시 극단적인 보복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쁜 일이 생겼다고 먼저 갔어요.”

“여기까지 와서? 포토카드 모으기 정말 어려웠을 텐데.”

말이 길어지면 허튼 소리가 나올 거 같아서 일단 일행들을 다그쳤다.

“그만들 일어나시죠. 우리 차례 다 됐어요.”

하랑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아래로 이동했다.

하랑을 제외한 세 사람은 줄을 선 와중에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않았다.

더 가까이서 프라이데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탓이리라.

세 사람은 사진을 더 찍고 싶다는 이유로 하랑을 가장 선두에 세웠다.

얼마 안 있어 하랑 일행의 차례가 왔고, 안내 요원의 통제에 따라 가장 먼저 하랑이 연단 위로 올라섰다.

먼저 사인을 받고 있던 팬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이동하자, 안전요원이 대기하고 있던 하랑에게 입장해도 된다고 손짓을 보냈다.

하랑은 가장 왼쪽 책상에 앉아있는 지창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7년을 함께 해왔던 녀석들을 마주하는 건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같은 위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랑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완벽한 타인을 보는 눈빛이라 그런 걸 수도 있고.

지창현은 이번 앨범의 컨셉 때문에 머리를 하얗게 탈색했다.

워낙 앳되어보이는 이미지라 어떤 헤어스타일도 잘 소화한다.

데뷔한지 7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려보이고, 실제로도 어리다.

고등학생 때 데뷔했고, 현재 나이는 25살. 이번에 시트러스밤의 최연장자가 된 체이와 동갑이다.

또한, 창현은 눈에 띄는 붉은 색 귀걸이를 왼쪽 귀에만 착용하고 있다.

왼쪽 귀의 귀걸이는 창현의 트레이드 마크 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게이들이나 한쪽 귀에 귀걸이를 하는 게 아니냐고 멤버들이 놀렸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랑은 지창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안녕하세요, 프라이데이의 비쥬얼 담당 창현이에요.”

지창현이 농담섞인 자기 소개와 함께 주먹을 내밀었다.

하랑도 주먹을 쥐고 창현이 내민 주먹과 살짝 부딪혔다.

창현은 주먹이 아프다는 듯이 과장된 표정으로 엄살을 부리다가 이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팬들한테는 저 액션이 잘 먹히는 모양이다.

하랑이 준비한 부클릿을 내밀었다.

앨범에 포함된 작은 소개 책자인데 보통 여기에 사인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멤버들은 자기 사진이 수록된 페이지를 찾아서 그 자리에 사인을 한다.

지창현은 하랑이 내민 부클릿을 보고는 살짝 당황했다.

“어? 이거 우리 데뷔 음반 부클릿인데? 이번 음반건 없어요?”

“이왕이면 하민 오빠가 함께 했던 앨범에 사인을 받고 싶어서요. 프라이데이 데뷔 앨범이니까 큰 의미도 있을 것 같고요.”

게다가 이번 앨범에는 멀쩡히 살아있는 류하민을 죽은 사람처럼 하늘에다 박아놨단 말이지.

더럽게 맘에 안 들어.

창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부클릿을 넘겼다.

앞에 앉은 팬이 어색하지 않게 립서비스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도 하민이 형 가끔 보고 싶고 그래요.”

“근데 왜 한번도 안 보러 왔어요?”

갑작스러운 하랑의 말에 부클릿을 넘기던 창현의 손이 굳어버렸다.

찰나였지만 표정도 살짝 얼어붙었다.

당황한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금세 원래의 미소를 돌아가는 걸 보니 프로는 프로다.

“에이······. 찾아갔어요. 누가 그런 헛소문을.”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직계 가족이 아니면 면회 허용도 안되는데, 면회를 했다면 이나가 먼저 알았겠지.

“이나가 많이 섭섭해 했어요.”

명확한 출처를 꺼내들 거라고는 예상 못한 것 같다.

허둥대면서 부클릿을 넘기고 있는 걸 보면.

“그······. 이나랑 아는 사이?”

“절친이에요. 같은 데뷔조에 있는.”

그제서야 다시 하랑과 눈을 마주치는 창현이었다.

하랑을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훑어보더니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 나, 너 알아! ‘한밤’에 나왔던 애지? 이하······. 민?”

그건 내 진짜 몸뚱이의 이름이고.

어쨌든 자기들이 출연한 코너를 모니터링하려고 ‘한밤의 연예타임’을 봤던 모양이다.

같은 회차에 출연했으니 어설프게나마 하랑을 기억하고 있다.

“하랑이요. 이하랑. 시트러스밤이라는 걸그룹으로 데뷔 예정이에요.”

“맞다, 하랑! 이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

“거짓말로 립서비스 날리다가 크게 데일 거라고 했을텐데.”

아차.

이건 류하민이었을 때 했던 충고다.

창현은 팬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다고 하면 ‘나도 그거 먹어봤어요.’, 어딜 가봤다고 하면 ‘나도 거기 가봤어요’ 하고 기계적으로 리액션을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물론 팬 입장에서야 시원시원하게 리액션을 해주는 게 나쁜 건 아닌데, 그걸 화제로 이야기가 진행되서 난처해진 경우도 꽤 있었다.

여전히 버릇을 못 고친 모양이다.

“······.라고 하민 오빠가 가끔 혼냈죠?”

“어? 어······. 너 정말 찐팬이구나?”

“그럼요. 팬사인회 오려고 꼬라박은 돈이 얼만데.”

무려 6만원이다.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그나마 오대식이 도와줘서 그 정도로 끝난 거지, 대책없이 뽑았으면 윤희처럼 박스 단위로 사도 못 올 뻔했어.

“풉! 너 진짜 재밌는 애네?”

하긴, 창현의 입장에서는 그루밍의 상술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비꼬는 팬은 처음일 거다.

홀리데이는 철저하게 프라이데이 편이라 맘에 안드는 점을 발견하더라도 어떻게든 합리화하며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있다.

가끔은 이렇게 쓴소리를 하는 팬들도 있어야 발전이 있는 거다.

“앞으로도 종종 볼테니까 사인이나 해줘요. 내 뒤로도 사인 받을 사람 수두룩해요. 솔직히 얼른 끝내고 쉬고 싶잖아요?”

“아니야, 팬들하고 만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사인회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가면, 입꼬리가 마비되서 안내려간다고 징징대는 거 알고 있어요.”

“이나가 별걸 다 이야기하나 보다. 그거 그냥 농담한 거야.”

농담은 무슨.

작년 사인회 끝나고 텐션 떨어져서 무대 못 올라가겠다고 강짜부리는 바람에 클로징 무대도 대충하다가 내려갔잖아.

지금이야 사인회 초반이니까 하하호호 웃고 있지만, 30분만 지나면 얼굴 근육 억지로 당겨서 마네킹처럼 웃고 있을 놈이 빈말은 참 잘해요.

“오늘은 얼마나 버티는 지 지켜볼 거에요.”

“하하, 알았어. 나중에 이나 통해서 연락할게. 밥 한번 먹자. 꼬라박은 돈 만회할 만큼 비싼 걸로 사줄게.”

창현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부클릿을 뒤적였다.

눈 앞의 팬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지만, 한 명의 팬에게 할당된 시간은 2분 남짓이다.

가장 앞에 있는 지창현이 시간을 끌게 되면 사인회는 계속해서 늘어진다.

하랑은 부클릿을 넘기고 있는 창현의 표정에 주목했다.

역시나 몇 장의 페이지를 넘긴 창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 이거······.”

류하민의 사진이 있는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놀랍게도 이미 사인이 되어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류하민의 사인이다.

- To 프라이데이

- 내가 돌아갈 때까지 우리 이름을 더럽히지마.

“하민이 형의 사인이야?”

“하민 오빠 사고나기 전에 받았어요.”

“흠······.”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보통은 사인 받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써주는 일반적인데 이 사인은 ‘To 프라이데이’, 즉 프라이데이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되어 있다.

내용도 의미심장해서 찔리는 구석이 있는 멤버라면 섬뜩한 경고처럼 느껴질 거다.

“사인 안 해주시는 건가요?”

“아냐, 해줄게.”

창현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곧장 부클릿에서 자기 페이지를 찾아 사인을 남기고 하랑에게 돌려주었다.

옆 자리의 팬이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기에 하랑은 조금 더 창현과 마주 앉아 있어야 했다.

“근데 너 병아리네 리더랑 열애설 나지 않았냐? 프라이데이 사인회에 와 있어도 돼?”

“이름도 잘 몰랐으면서 열애설 난 건 알고 있네요?”

“너 유명하잖아. 이름도 알고 있었는데 바로 기억이 안난 거고.”

“열애설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 여기 온 거 우리 대표님이 알게 되면 프라이데이 멱살 잡으러 한번 찾아오실 거에요. 그 양반도 나이가 있어서 예전같지 않으니까 살살 달래서 돌려보내주세요.”

“풉! 너 진짜 특이하구나. 그냥 병아리 말고 오빠랑 사귀자. 어때? 오빠 아직 여자친구 없어.”

한껏 과장되게 떠드는 걸 보니 저건 농담이다.

창현은 저런 식으로 여성 팬들 설레게해서 열성 팬으로 만들어버린다.

저 조각같은 얼굴로 저런 구애의 말을 던지면 농담인 걸 뻔히 알아도 여성팬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랑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오히려 창현이 당황하면서 허둥지둥 변명을 했다.

“노, 농담이야.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아마도 하랑이 정색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눈 앞의 여자애가 여전히 클라우드 리첼과 사귀고 있는데, 자신이 껄덕거린 모양새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고민하는 눈치다.

옆자리의 팬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옆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는 밀어내기를 해야할 시간이다.

하랑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현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여자, 안 좋아하잖아요.”

그 한마디에 창현의 접객용 미소가 빠직하고 깨져나가는 게 보인다.

멘탈을 터뜨려버리려고 던진 말은 아닌데 괜히 미안해진다.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린 게 심하게 놀란 것 같다.

하랑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농담이에요.”

그제서야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데 여전히 표정은 경직되어 있다.

뭘 알고하는 이야기 아니었을까 고민하는 게 표정에 역력히 드러난다.

기어코 지 애인 만나겠다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날 이 몸뚱이에 처박아버린 놈이다.

작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렴.

하랑은 지창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옆 책상의 프라이데이 멤버와 눈을 마주쳤다.

꽁지머리에 야위어보이는 얼굴을 한 멤버다.

하랑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묘하게 초첨이 안맞는 느낌이다.

메인래퍼 이일재.

프라이데이가 암묵적으로 덮어버린 가련한 약쟁이가 그 책상 앞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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