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고스트라이터 (2)
“그래서 노루비를 신경 써 달라?”
김중식이 쟁반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되물었다.
리첼도 동시에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노선을 분명히 해달라는 이야깁니다. 희망 고문으로 괴롭히지 마시고.”
“충분히 신경 쓰고 있어. 너랑 백훈이 붙어서 디렉팅을 봐주는 거로 부족한가?”
“NTV에서 걜 어떻게 대우했는지 아시잖아요.”
“알지. 장만욱이가 미리 언질은 하고 섭외해 갔거든.”
김중식은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원래 하나를 받으려면 하나를 내놓는 게 이 바닥의 룰이야. 난 내 새끼인 티샤를 프로그램에서 빼냈고, NTV와의 공정한 거래를 위해 노루비를 바쳤지. 그놈들이 무슨 짓에 하든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노루비는 물건 아닙니다.”
“그리고 내 새끼도 아니지. 남의 새끼까지 정성을 들여 보듬을 정도로 난 그릇이 크지 않아.”
“대표님이 아끼는 이하랑도 붙여줬지 않습니까? 노루비의 가능성을 보신 거 아닌가요?”
따지는 듯한 리첼의 물음에 김중식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첼아. 네가 레몬에 들어온 지 10년 다 돼가지?”
“네.”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조금 섭섭해지려고 그런다. 하긴 알았으면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김중식이 클라우드의 이적을 언급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클라우드가 재계약을 거부한 이래 김중식은 따로 이적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며 붙잡을 줄 알았는데, 어딜 가더라도 잘되길 바란다는 격려가 전부였다.
김중식은 클라우드 엑스의 멤버들이 결정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재계약 협상을 시도조차 않은 걸 보면 김중식의 의사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난 내 울타리에 있는 내 새끼를 위해서만 움직여. 그런 의미에서 하랑이는 온전히 내 손으로 뽑은 내 딸이나 다름없지. 노루비의 가능성? 그게 나한테 가치가 있을 거 같아? 내가 관심 있는 건 하랑이가 방송에 출연해서 인지도를 쌓는 것뿐이야.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노루비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시죠?”
“내가 왜?”
김중식은 냉정하게 되물었다.
리첼 역시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인정이 많은 분이니까요. 하나라도 더 자기 새끼로 받아들이려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꾸민 거 같아서요.”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사람을 시험해? 착각이야.”
* * *
- 꽁무니 빼고 토꼈지 LEXY 데뷔조
- 뭐 한다 이 판에 기웃거려 Dullish 듣보잡
- 주제에 분수를 알아야지 Foolish 도망자
- 여기에 니가 설 자리는 없지 돌아가
붐뱁 비트에 맞춰서 하랑이 디스를 퍼붓자 루비의 안색이 하얗게 굳어갔다.
시범을 보여준다며 디스 랩을 쏟아낸 게 여간 충격적이었나 보다.
보다 못한 백훈이 하랑의 랩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하랑 누이, 갑자기 그렇게 세게 나오면 어떡해.”
“아니, 이게······. 디스 배틀이잖아요.”
“그래도 강도를 조금씩 올려야지. 그렇게 훅 들어오면 누구라도 상처받아.”
변명을 하려던 하랑은, 정색을 하고 굳어버린 루비의 표정을 보고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해도 괜찮다고 해서 보여줬는데 이렇게 반응이 싸늘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저기······. 루비, 이건 말야. 진심이 아니라······.”
하랑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을 더듬자, 표정을 굳히고 있던 루비가 풉 하고 참았던 웃음을 토해냈다.
“푸훕! 하랑, 당황하니까 엄청 귀여워.”
“화난 거 아니었어?”
“내가 왜? 화난 게 아니라 감탄하고 있었어. 즉흥적으로 그런 가사를 뽑아내다니. 솔직히 랩스타에는 하랑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하랑이 넋 나간 표정으로 루비를 바라보자 루비가 귀여워 미치겠다는 듯이 하랑의 볼을 꼬집었다.
“어쩜, 이런 귀여운 얼굴로 랩을 그렇게 잘한다니? 언밸런스한데 매력 있어.”
“아우우······.”
“그래도 은근슬쩍 반말하는 버릇은 고쳐.”
처음 레몬에서 마주쳤을 때도 하랑은 보컬룸에서 랩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트러스밤에 랩을 하는 인원이 없다고 들어서 당황했었지만, 최근엔 하랑이 루비의 디렉팅에 참여하면서 랩을 직접 들어볼 수 있었기에 하랑의 랩에 익숙해졌다.
아직 하랑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하랑의 랩 실력은 그저 그런 연습생 래퍼의 실력이 아니다.
어느 걸그룹에 가도 메인래퍼를 확정적으로 맡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박자를 가지고 노는 능력은 물론 가사를 만드는 능력도 타고났다.
같이 디렉팅을 맡아주는 백훈 또한 하랑이 랩을 할 때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일재의 현신이라고 했던가?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비유였지만 워낙 뛰어난 플로우와 딜리버리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멤버들한테는 계속 감출 거야?”
루비가 볼을 놔주면서 묻자, 하랑이 억울한 표정으로 볼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언젠가는 드러나겠죠. 하지만 랩보다는 보컬 쪽이 더 적성이 맞아서 시작은 보컬로 하고 싶어요.”
“난 굳이 메인래퍼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나보다 잘하는 멤버가 있는데 내가 그 자리를 꿰차는 것도 부담스럽고.”
“자신감을 가져요. 루비 언니의 랩도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하랑이 격려하자 루비가 피식 웃으면서 하랑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헝클었다.
“쬐그만 게 계속 어른 흉내나 내고.”
꼬라지는 이래도 알맹이는 어른이거든!
하랑이 손을 뻗어서 루비의 손을 치우려다가 멈칫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루비의 손길이 영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루비의 손길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는 엉큼한 생각이 하랑을 지배했다.
“크흠.”
눈치 없는 레게머리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루비는 하랑의 머리에서 손을 치웠다.
“누이, 디스전 상대는 렌시아가 확실한 거지?”
“아마도요.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으니까 거의 확실할 거예요.”
“루비 누이도 LEXY 데뷔조 출신이잖아. 혹시 렌시아는 남들 모르는 약점 같은 거 없어?”
“약점이요?”
루비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면서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꼭 약점 같은 걸 후벼 파야 해요?”
“맨손으로 칼날을 잡을 수는 없잖아. 렌시아는 누이가 가장 아플 만한 곳을 찔러 올 거야. 류하민과의 열애라던지, 데뷔조에서 쫓겨났다든지 하는 아픈 상처들 말야. 그에 상응하는 무기를 준비하지 못하면, 누이가 아무리 기술적으로 랩을 잘한다 해도 결국 밀릴 수밖에 없어.”
루비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렌시아, 프라이데이 지창현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적 있어요.”
“뭐?”
루비도 몰랐던 사실이었는지 눈이 동그래져서는 하랑을 바라봤다.
하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루밍의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가 가사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요. 그런데 앨범에는 렌시아가 직접 작사했다고 이름을 박아놨죠.”
“잠깐, 누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고스트라이터.
대필작가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인데, 음악의 경우에는 대신 작사해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LEXY의 곡 중에 고스트라이터가 작사한 곡이 있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당연히 디스곡에 사용하면 안 된다.
증거도 없이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거다.
“제가 홀리데이잖아요. 프라이데이 팬덤에 소문이 돈 적이 있어요. 후배 그룹인 LEXY의 노래 중에 고스트라이터가 작사한 곡이 있다고.”
소문은 아니다.
류하민이 그 대필 작사가를 직접 목격했으니까.
“누이, 그거 안 돼. 랩 하다가 고소당할 일 있어?”
“직접 언급만 하지 않으면 돼요. 은근슬쩍 돌려 말해서 멘탈을 날려버리는 거죠. 가령······.”
하랑이 마이크를 집어 들고 스위치를 올렸다.
그리고는 핸드폰의 음원을 재생시켰다.
‘쿵! 치! 타! 치!’ 소리를 내는 드럼의 비트가 작업실에 깔렸고, 하랑은 루비를 바라보곤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요, 잘 들어 봐.
- 내가 스타랑 사귀는 동안 넌 차이지 않았니?
- 이게 너와 나의 Level 차이, 리더와 막내의 Class 차이
- Fake and phony 네 손으로 가사를 쓰긴 하니?
- 은영인 요즘 뭐 하니? 걔가 노래 하난 기깔나게 뽑았지
하랑의 입에서 터져나온 벌스 하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하랑이 루비를 바라보며 호기롭게 물었다.
“어때요?”
“차였다고 놀리는 건 너무하지 않아? 못됐어, 하랑”
“렌시아한테 선빵 맞고 나면 그런 인류애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비워질걸요?”
“그건 그렇다 치고 은영이는 누군데?”
“렌시아의 고스트라이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루비가 의심이 가득 찬 눈길로 하랑을 바라봤다.
* * *
“시트러스밤 여러분, 오늘도 고생했어요. 핸드폰 찾아가세요.”
신소진이 멤버들의 핸드폰이 든 바구니를 들고 안무실로 들어왔다.
이젠 오늘의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소진, 내 핸드폰!”
치토세가 가장 먼저 달려와 소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진은 바구니를 뒤적여 분홍색 토끼 케이스가 씌워진 핸드폰을 찾아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나니, 문득 자신을 하인처럼 부리고 있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일본 꼬맹이가 괘씸해졌다.
“‘주세요.’ 해야지.”
“하랑이도 반말하는데 소진은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한다.”
“걔는 실수로 하는 거고, 너는 알면서 하는 거고.”
“치토세는 일본에서 와서 한국말 잘 못 해.”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치토세가 혀를 내밀고 입술에 침을 바르는 시늉을 하자, 어느새 옆에 다가온 가나가 손가락으로 치토세의 혀를 쓱 문질렀다.
“아악! 퉤퉤! 뭐 하는 거야!”
“소진 언니한테 버릇없이 굴지 마.”
“힝, 장난친 건데······.”
그제서야 소진이 피식 웃으면서 치토세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이어서 가나의 핸드폰도 찾아서 치토세를 대신 응징한 가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부재중 통화가 많이 와 있는데? 급한 전화 아냐?”
“그러네요. 저 잠시 전화 좀 하고 내려갈게요.”
“천천히 하고 와. 매니저님한테는 좀 기다려 달라고 할 테니까.”
핸드폰의 액정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가나가 서둘러 안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도 사람들이 보여서 곧바로 비상계단 쪽으로 빠져나왔다.
[부재중 통화 (5)]
레슨을 받는 동안 계속 전화가 걸려 왔는지 5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다.
발신인을 확인한 가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가나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으로 LEXY의 히트곡이 흘러나오다가 이내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늦어.
“방금 수업이 끝났어요.”
- 그래서 내가 레몬으로 가지 말라고 했잖아. 세상 바뀐 지 언젠데 아직도 연습생 핸드폰 걷는다니? 구시대적인 발상이야.
“사이퍼는 잘하셨어요?”
- 잘했지. 랩 가사가 착착 입에 감기더라. 넌 레몬에 가서도 실력이 안 죽었어.
“잘 마치셨다니 다행이에요, 렌시아 언니.”
부재중 통화의 발신인은 다름 아닌 LEXY의 렌시아였다.
-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도 좀 부탁해. 음원은 메일로 보내줄게.
“이번엔 무슨 콘셉트인가요?”
- 그냥 평범하게 자작 랩 하나랑, 디스전에 써먹을 가사 하나 있으면 돼.
“자작 랩은 해드릴 수 있는데, 디스 랩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야······.”
- 너도 아는 사람일걸? 노루비라고 시트러스밤 멤버야.
“네? 루비 언니요?”
휴대폰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랑과 루비가 섭외됐다는 프로그램이 ‘퀸 오브 랩스타’였어?
- 너네 8명만 데뷔한다면서? 이 기회에 미리 한 명 떨궈내면 좋잖아. 루비 걔, 디스전에서 박살 나면 평가가 시궁창이 될걸?
가나는 망설였다.
레몬의 연습생으로 들어와 데뷔할 기회를 얻은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루밍에 연습생 신분으로 있긴 했지만 실제로 연습생의 커리큘럼을 소화한 것도 아니었다.
그루밍에서 박가나는 유령이었다.
서류상으로는 그루밍에 속해있지만,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령.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 고민, 그거 많이 하면 좋은 거 아니랬어. 일단 자작 랩부터 만들어 보내.
“네, 그렇게 할게요.”
- 아, 그리고 너희 팀에 키 작고 얼굴 동그란 애 하나 있지 않아? 성깔 더러운.
“키 작고 동그란 애요?”
- 루비랑 같이 방송국 왔던데, 혹시 알아?
루비와 같이 방송국에 갔을 만한 멤버는 한 명뿐이다.
같이 섭외된 사람은 그 애뿐이니까.
“이하랑.”
- 이름이 이하랑이야? 걔 아주 싹수가 노랗더라. 뭐 그건 됐고, 노루비에 대한 정보도 메일로 보내줄 테니까 디스 곡도 준비해.
“그건 생각 좀 더 해보고······.”
- 생각하지 마. 그냥 만들어.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최대한 저열하고 지저분하게 만들어. 내가 부를 거 아니니까.
“언니가 하는 게 아니라고요?”
- 밴시라고, 언더그라운드 래퍼가 할 거야. 개싸움은 개한테 맡겨야지. 굳이 내가 진흙탕에서 같이 굴러줄 필요는 없잖아.
가나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 이 프로 끝나면 내가 비싼 거로 밥 한 끼······. 아, 맞다. 너 다이어트 중이지? 그래, 아무래도 돈이 낫겠다. 통장으로 한 장 더 들어갈 거야. 급행비라고 생각해 줘.
“렌시아 언니. 그래도 이번 일은······.”
- 군소리 말고 최대한 빨리 작업해,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