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리벤지 버스킹 (4)
다행인 점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지금 현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거다.
오디오는 마이크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만이 방송에 송출된다.
출연한 여성 보컬이 하랑의 샤우트 때문에 중간에 노래를 멈췄지만, 시청자의 눈에는 가사를 잊어버렸거나 박자를 놓쳐서 중도에 포기한 걸로 비쳐졌다.
구현무는 재빨리 음원을 커트하라는 손짓을 보낸 뒤, 마이크를 잡고 멘트를 날렸다.
“홍나은 씨, 애석하게도 중간에 노래를 멈추셨어요. 아쉽게도 4강에서 탈락하게 되셨습니다.”
여성 보컬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구현무가 표정으로 눈치를 주자 조용히 입을 닫고 무대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상대 참가자의 노래를 들어보지 않을 수는 없겠죠? 놀라운 미성으로 4강에 올라온 강지욱 씨를 무대로 모셔봅니다!”
풍채가 좋은 남성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뮤지컬 배우라고 했던가?
성량도 좋고 목소리도 미성이지만 비주얼은 평범 이하다.
구현모는 이 남자를 우승시킬 생각은 없었다.
가수로서는 재능이 넘치지만, 게스트로서는 폐급이다.
뮤지컬 발성은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얻기에 난해한 면이 있다.
노래를 잘 부르면 뭐 하는가.
상품성이 바닥이라 후원금을 땅겨 오질 못하는데.
억울하면 외모라도 호감 있게 생기던가.
상금 10만 원 쥐여주고 4강에서 떨어뜨리면 딱 알맞을 참가자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의외의 쓸모가 있다.
구현무의 판단이 맞다면, 아마도 건너편의 여자애는 이쪽의 보컬이 부르는 노래를 훔쳐 부를 생각일 거다.
음원을 중간에서 끊어버리자 여자애도 노래를 멈춰버렸다.
충분히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관객들이 자신을 향해 돌아선 지금도,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다.
“그렇게 객기부리다 잡은 물고기 다시 놓친다, 꼬마야.”
건너편에 있는 음악 도둑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남자의 노래만큼은 훔치지 못할 거다.
기본적으로 모던 록 계열의 발성을 가진 여자애다.
조금 전은 우연히 주특기가 맞았을 뿐이다.
중후한 음색을 필요로 하는 노래를, 여성 록커의 음색으로 불러봤자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
이 남자가 부르기로 약속된 노래가 마침 그런 노래다.
이번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게 고작이겠지.
사람들은 공연하지 않는 버스커에 대한 관심을 잃고, 다시 이쪽 무대를 바라보게 될 거다.
반짝하고 어그로를 끈 것은 칭찬해주마.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란다, 어리석은 꼬마야.
* * *
“1절만 부르고 끝이야?”
하랑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관객들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강렬하고 짜릿했던 샤우트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린다.
“BJ 현무 쪽 참가자도 들어갔는데?”
“지금 현무네랑 싸움 붙은 거야? 거리공연도 배틀 같은 게 있나 봐?”
“그럴 리가. 이게 무슨 래퍼들끼리 배틀 하는 것도 아니고.”
양쪽에서 공연이 멈추자 관객들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양쪽 무대를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하랑이 마이크를 잡고서 관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시죠? 양쪽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게 뭔가 싶으실 겁니다.”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걸 잠시 지켜본 하랑이 말을 이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버스킹 공연이 겹쳤습니다. 둘 중 하나는 자기 자리가 아닌데 버티고 있다는 뜻이겠죠? 이야기 해봤는데 자기들은 자리를 빼줄 수가 없다네요. 규모가 크니까 양보 좀 해달라나?”
하랑이 발아래 놓인 앰프 스피커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자, ‘삐이’ 하는 하울링이 발생했다.
“이거 겁나 무거워요. 여기까지 들고 오다가 팔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얘만 들고 온 줄 아세요? 이 기타, 케이스에 넣으면 내 키만 해. 난쟁이 똥자루만 한 애가 낑낑거리면서 오지게 무거운 장비들을 들고 왔는데……. 자리 못 빼니까 그냥 가래요. 그 말 듣고 나 진짜 울 뻔했어요.”
손가락으로 눈 밑을 스윽 훔치면서 태연하게 떠드는 하랑이었다.
“아빠가 역 앞까지 태워다 주면서 ‘우리 딸 공연 잘하고 와’ 응원도 해줬는데. 씨이…….”
하랑이 토라진 척 볼에 바람을 넣고 반대편 무대를 노려봤다.
이미 7년간 각종 예능에서 뻔뻔함을 단련해 왔던 프로 아이돌이다.
관객들 앞에서 메소드 연기 좀 한다고 새삼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물론 밀려오는 자괴감은 감당해야 하지만.
핸드폰 카메라로 하랑을 촬영 중이던 진나경이 중얼거렸다.
“이 언니,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약을 파네.”
아빠는 무슨 아빠.
리첼 오빠겠지.
공연 잘하고 오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사고 치지 말라는 말은 했어도.
어쩌면 이미 사고를 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진나경의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하랑은 관객들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떻게 그냥 가요? 기타를 꺼냈으면 튕겨는 봐야지. 둘 중 하나가 포기해야 한다면…….”
하랑이 기타 현을 가볍게 튕기고는 반대편 무대를 가리켰다.
“쫄리는 쪽이 알아서 물러나야죠.”
하랑이 이를 살짝 드러내고 웃자 관객들도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호응했다.
“와, 여자애 패기 보소.”
“그래, 쫄리는 쪽이 꺼져야지. 현무, 우우우!”
“쟤 똘기가 넘친다. 하하핫!”
흥미로운 상황에 휩쓸린 관객들이 하랑의 패기에 갈채를 보냈다.
그중에는 BJ의 방송을 직관하러 온 관객들도 많았는데, 야유는커녕 더 커다랗게 환호성을 보냈다.
악명 높은 인터넷 방송의 성향상, 하나같이 자기 BJ가 망신당하는 걸 즐기고 있다.
일종의 뒤틀린 팬심이다.
반대편 무대까지 하랑의 목소리가 들릴 테지만, BJ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기 방송을 이어나가고 있다.
무대에 남자 보컬이 올라왔고, BJ가 소리 높여 곡을 소개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삽입곡이죠. ‘지금 이 순간’ 들려드리겠습니다.”
BJ가 관객들 머리 너머로 하랑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저건 분명 따라 해볼 테면 해보라는 비웃음이다.
‘지금 이 순간’.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뮤지컬 삽입곡이다.
뮤지컬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이 노래만큼은 안다.
가수, 배우, 개그맨을 불문하고 노래 좀 한다는 거의 모든 연예인이 한 번씩은 불렀던 노래다.
큰 기교도 필요 없고, 음역대도 높지 않아 풍부한 성량만 갖추고 있으면 누구나 멋들어지게 부를 수 있다.
특히나 테너와 바리톤의 음역대를 구사하는 남성 보컬에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곡이다.
저 BJ란 놈은 방금 전 하랑의 ‘콜 마이 네임’을 듣고 한참 착각에 빠진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런 썩소를 날리고 자리로 돌아갔겠지.
분명 고하리의 음색으로는 매력적으로 부를 수 없는 곡이다.
겨울바람처럼 시린 고하리의 음색으로는 저런 뜨거운 노래를 소화할 수 없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아주 짧은 전주가 흘러나오고, 풍채가 좋아 보이는 남자 보컬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랑이 기타를 잡고 입술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 ♬
지금 여기 ♬
간절히 바라고 ♬
원했던 이 순간 ♬
예상했던 대로, 남자 보컬은 성악이나 뮤지컬을 전공한 보컬이다.
바리톤의 중후한 음색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그 중후한 음색 위로 절대 음감의 팝페라 가수가 올라탔다.
10계단 위의 음역에서 맑고 선명한 요정 같은 목소리가 빛살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This is the moment ♬
This is the day ♬
When I send all my doubts ♬
and demons on their way! ♬
그레이스 리가 기억하고 있는 원곡이다.
한쪽에서는 한국어로 번안된 가사의 곡이 또 한쪽에서는 영어로 된 가사의 곡이 울려 퍼진다.
완전히 다른 가사 덕분에 두 보컬의 노래가 더 극명하게 비교된다.
무명의 바리톤 가수는 성악이라는 감옥문을 열고 나온 절대음감의 소프라노와 감히 비견될 수 없다.
“와, 얘 진짜 뭐야?”
“이걸 여자 음역으로 편곡해서 부른다고? 몇 키나 올린 거야?”
“음역은 그렇다 쳐도 아까랑 목소리가 완전히 바뀌었잖아! 어디 쌍둥이 숨겨놓은 거 아냐?”
보컬 트레이너 유재이는 이걸 두고 성대를 갈아 끼웠다고 표현했었다.
고하리와 그레이스 리의 음색은 그만큼 간극이 크고, 절대로 섞일 수도 없다.
비탄의 감정을 노래하는 고하리가 마이너스 영역의 역치에 닿았다면, 평온의 감정을 노래하는 그레이스 리는 플러스 영역의 역치를 선사한다.
지금 관객들은 세상에서 가장 낙차가 큰 롤러코스터를 탑승하고, 한없이 위로 솟구쳐 오르는 희열을 느끼고 있다.
I won't look down ♬
I must not fall! ♬
This is the moment ♬
The sweetest moment of them all! ♬
하랑의 폭발적인 성량이 반대편 무대로 날아가 꽂혔다.
이건 앰프 스피커가 담을 수 있는 음량을 초과해서 넘쳐버린 성량의 잔재들이다.
음향장비 없이도 목소리가 콘서트홀 끝까지 닿도록 훈련해 온 그레이스 리다.
이 정도 크기의 광장을 그녀의 목소리로 채우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다.
영어로 된 원곡의 노래가 귓가에 아른거리자, 남자 보컬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흘러나오는 음원이 MR이 아닌 AR(All Recorded: 보컬이 포함된 음원)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정상급 여자 소프라노가 커버한 AR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남자 보컬은 눈을 뒤굴뒤굴 굴리면서 구석에 서 있는 구현무를 바라봤다.
구현무는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계속 노래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역시 하랑의 보컬이 선명하게 이쪽 무대까지 넘어오기 시작한 걸 깨닫고 있었다.
모니터에 떠오르는 채팅창도 난리가 났다.
남자 보컬의 마이크에 하랑의 노래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거다.
- 이거 방송사고 아님? 형, MR에 노래 깔려 있어.
- 현무, 먹고 살기 편한가 봐. 준비도 대충대충. 진행도 대충대충.
- 잡음 들어오잖아. 이거 다른 버스커가 부르는 거 같은데?
- 2222! 못 들어주겠다. 222222!
- 예선에선 잘하지 않았나?
- 귀신이 노래부른다. ㄷㄷㄷ
채팅창을 확인한 구현무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야이, 새끼야. 앰프 볼륨 안 올리고 뭐 해!”
괜스레 음향장비를 관리하는 스태프에게 짜증을 부렸다.
“여기서 더 올리면 항의 들어와요.”
“항의? 꼴값 떨고 자빠졌네. 볼륨 최대로 올려, 등신 새끼야. 시청자들 나가잖아!”
“소리 더 키우면 노이즈 끼는데…….”
“키워! 노이즈 껴도 상관없으니까 저 계집애 목소리 묻어버리라고!”
‘삐이이이’ 소리와 함께 하울링이 발생하자, 관객들은 귀를 막았고 남자 보컬은 박자를 놓쳤다.
저 빌어먹을 년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다.
구현무는 인상을 쓰면서 문신한 스태프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창모야, 가서 저 계집애 무대 접어.”
“보는 눈이 많은데요?”
“좀 알아서!”
이를 악물고 분노를 뱉어대던 구현무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돈을 더 쥐여주든, 앰프를 걷어차든. 아니면 대가리를 까던지.”
“그럼 100장 정도 불러보겠습니다.”
“50장 불러보고 맥스 100장. 어떻게든 저 계집애 내 눈앞에서 치워. 그 점퍼 벗어놓고 무대 뒤로 돌아서 가.”
구현무가 파프리카 로고가 새겨져 있는 점퍼를 가리키며 말했다.
관계자가 아닌 척하고 처리하라는 이야기다.
문신 스태프는 똥 씹은 얼굴을 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애들 둘만 데려가겠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속삭이듯 청부를 마친 구현무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무대 중앙으로 올라갔다.
노래는 끝났고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음향 상태가 좋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홍나은 씨가 탈락하셨으니 지욱 씨는 부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하시게 되었습니다. 자리로 돌아가서 기다려 주세요.”
구현무는 사람 좋은 미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고, 남자 보컬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 * *
“엄청나게 뜸을 들이네요. 저쪽도 이젠 선수가 없나 봐요?”
하랑의 너스레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도장 깨기를 호되게 당하더니, BJ가 무대에서 만담을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유명 BJ라서 그런지 입담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관객들 일부가 다시 저쪽에 붙어있는 걸 보면.
관객들을 빙 돌아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무리를 하랑은 첫눈에 알아봤다.
점퍼를 갈아입고 왔어도 손목에 드러난 문신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으니까.
“뭐죠? 이제야 자리 빼러 오셨나?”
아닌 척하고 있지만, 아까 봤던 문신 스태프다.
또 똘마니를 둘이나 데리고 왔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문신 스태프는 관객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용한 데서 이야기하시죠.”
“싫은데요.”
누구 좋으라고.
이젠 너희가 자리 안 빼도 나 관객 많거든.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 성의가 많이 부족했다는 거 인정합니다.”
“어우, 새삼스럽게.”
문신 스태프가 하랑에게 좀 더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였다.
“귀 좀…….”
뭔가 비밀스러운 제안을 하려나 보다.
크게 관심은 없지만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 궁금하기는 해서, 하랑은 못 이긴 척 고개를 가져갔다.
‘50장 드리겠습니다.’
50만 원을 준다는 이야긴가?
10배로 늘은 걸 보니 장족의 발전이네.
하랑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어쩌죠? 싫은데.”
“백.”
100?
백만 원?
그 돈이면 리첼한테 빌붙지 않아도 일주일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돈이다.
마음이 좀 흔들린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라는 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랑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뗐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내 무대는 안 팔아요. 그러니까 가서 전해요. 헛짓거리 할 시간에 무대나 정리하라고.”
“무대를 원한다면 올라오시죠. 여기 말고. 저기.”
스태프가 BJ의 무대를 가리켰다.
이미 세팅되어 있는 무대고, 음향장비도 지금 가지고 있는 휴대용 앰프보다는 훨씬 낫다.
하랑의 목적 자체가 김중식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유명 BJ의 방송에 출연하는 건 꽤 합리적인 제안이다.
“그……. 백…….”
“그것도 드리고요.”
그래,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내가 프라이데이인 것도 아니고.
당장 집도 절도 없어서 얹혀사는 주제에, 이 정도로 굽히고 들어오면 이쪽도 양보의 미덕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랑의 뇌 속에서 자기 합리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을 찰나, 요란한 경적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 빵! 빵!
광장 안쪽으로 소형 봉고차가 관객들을 헤집고 들어오는 중이다.
“무대랑……. 백……. 괜찮…….”
하랑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한 스태프가 봉고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건 뭐야?”
- 드르륵.
스태프 바로 앞에서 멈춘 봉고차의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내렸다.
검은 가죽 재킷과 쫄바지를 입고, 얼굴엔 가부키 화장을 한 남자들이다.
자세히 보니 다들 어디서 얻어터지고 온 것마냥, 얼굴이 퉁퉁 부어있다.
“이 새끼들아! 우리가 가오가 없지, 돈이 없냐?”
선두에 선 남자가 당당하게 소리쳤고,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조용히 지적했다.
“형, 바뀌었어. 돈이 먼저고 가오가 뒤에 나와야 돼. 그렇게 말하면 둘 다 없는 거야.”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들어라, 인마.”
“그것도 틀렸어, 형.”
선두에 선 남자는 문신 스태프에게 정확히 삿대질을 하고는 광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내 공연! 그깟 백만 원에 안 팔아 빌어먹을 새끼들아! 그 말 하려고 찾아왔다! 돈 몇 푼에 무대를 팔아넘기는 건 가수도 아니야!”
“아, 이 새끼들 끈질기네. 아직 덜 쳐맞았나.”
“비겁하게 다구리를 치고, 강제로 예약 취소한 게 누군데? 안 판다고 빌어먹을 자식아!”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지폐 다발을 꺼내더니 스태프를 향해 집어던졌다.
신사임당이 낙엽처럼 흩어지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스태프를 따라온 똘마니들이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주웠다.
“하, 오늘 진짜 지랄 같네.”
“지랄은 지금부터지. 여긴 우리가 접수한다! 다들 우리 무대에서 꺼져!”
하랑이 스태프의 등 뒤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 복장, 저 화장.
아는 놈들이다.
“시리얼 킬러스?”
3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가부키 화장은, 하랑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움찔하고 뒷걸음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