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168화 (168/376)

168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3)

“오페라 가면이 눈치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컨트롤 박스 앞에 앉아 있는 보조 PD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니터를 뚫어지라 보고 있던, 민현숙이 은근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건 일종의 실험이었다.

이전에도 가면가수왕에는 립싱크로 무대를 서는 이들이 있었다.

한국말이 익숙지 않은 외국인 가수라든지, 무대 울렁증을 앓아서 음성 보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가수 출연자라든지.

주로 립싱크로 무대에 세워도 탈락할 것이 분명한 이들이, 혜택을 받는 대상이었다.

가면으로 입을 가리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방청객은 현재의 공연이 절대로 라이브인지 립싱크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애당초 제작진은 가면가수왕의 모든 공연이 라이브라는 언급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딱히 알고자 하는 시청자들도 없으므로,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최소 한 번의 면죄부는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우리는 오페라 가면을 시청률을 반등시키는 모멘텀으로 이용해야 해. 튠을 때려 박은 아이돌 보컬 정도는 이겨줘야, 우리 프로의 사활을 걸 수 있지 않겠어?”

이하랑은 제대로 터지기만 한다면, 확실한 와일드카드다.

누구도 정체를 모르는 1티어 가수가 가면가수왕을 통해 데뷔한다.

프로그램 초장기에는 그와 같은 이유로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 집중될수록, 출연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난무했다.

쌀이 익기도 전에 김이 새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미 사람들은 정체를 알고 있어서 흥미는 떨어져 가는데, 가수왕을 무리하게 하차를 시킬 수도 없었다.

현재의 가수왕인 토깽이조차 인터넷 커뮤니티에 정체가 언급되어 있고, 제작진은 노코멘트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인지도가 떨어지고 실력은 월등한 가수들을 섭외해도, 누리꾼들은 귀신같이 정체를 찾아냈다.

사실상 가수왕이 될 정도의 실력자가 인지도가 떨어지길 바라는 건 사치였다.

하지만 별안간 땅에서 솟아오른 이하랑이라는 신인이 그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

수준급의 팝페라, 수준급의 트로트.

공통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매니악한 장르다.

이번 주에 2라운드 녹화분이 방영된다면, 오페라 악마의 키워드 검색률은 급격하게 치솟을 것이다.

정체가 짐작도 안 가는 가수가 극과 극인 장르를 완벽에 가깝게 소화했으니까.

“오페라 가면이 탈락하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노을 처녀도 걸그룹 메인보컬이에요. 저렇게 튠으로 음정까지 보정해 버리면, 말할 것도 없이 탑 티어죠. 저 상태로는 토깽이와 붙여놔도 어색하지 않을걸요?”

“오페라 가면은 승부욕의 화신이야. 추영자가 농간을 부리는 걸 알아채고는, 트로트를 경연곡으로 들고 와서 부숴버렸지. 그전에는 트로트풍으로 노래한 적도 없는 애였어.”

“설마요. 예능 나가면, 개인기로 쓰려고 연습했겠죠.”

보조 PD의 대답에 민현숙이 혀를 끌끌 찼다.

“레몬 엔터 측에 확인했어. 홍 PD 말대로 개인기로 쓰려고 연습했을 수는 있지. 한데, 저번 공연이 아마추어가 취미로 연습해서 만든 수준으로 보이디? 내 눈에는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려고 준비한 것처럼 보이더구먼.”

“사실 잔꾀를 부리긴 했죠. 리허설은 어설프게 임해놓고, 본 무대에서 제 실력을 드러낼지 누가 알았겠어요?”

“방송물 안 먹은 신인 가수를 사방에서 찍어누르면 결국 꺾이기 마련이야. 그런데 쟤는 안 그래. 고개 숙이는 척만 하고, 결국엔 추영자를 무너뜨렸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립싱크인 걸 알아채고는 상당히 화가 나 있을걸?”

“제작진이 상대방한테 특혜를 줬다는 사실을 알면, 죽을힘을 다해서 이기려고 할 거다. 그런 건가요?”

민현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게 압박하면 압박할수록, 자신의 한계를 쥐어짜 내는 것이 이하랑이다.

“리허설 끝나고 나서 오페라 악마가 곡 순서 변경을 요청했어. 토깽이의 정체를 알아채진 못한 거 같은데, 적어도 록 가수인 건 알아챈 것 같아.”

“오페라 악마, 걔……. 3라운드에서 ‘블랙 스타’ 부르기로 하지 않았어요?”

‘블랙 스타’는 인디 록 밴드 ‘코즈믹 호러’의 하드 록 계열의 밴드 음악이다.

레몬 엔터는 작년 마지막 날에 두 곡의 MR를 제작진에게 보냈고, ‘블랙 스타’는 결승전을 통과하기 위한 곡이었다.

하지만 녹화 직전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곡의 순서를 바꾸겠다고 통보해 왔다.

“트로트 가수한테는 트로트로, 록 가수한테는 록 음악으로 붙겠다는 거지. 걔 하는 짓 보면, 정신 나갈 거 같아.”

머리 아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 민현숙이었다.

“토깽이가 누군지 알려주고 싶네요. 결승전 통과해 놓고, 선곡 미스로 가수왕전에서 떨어지면 많이 억울할 텐데 말이죠.”

“마냥 승산이 없는 것도 아냐. 어스튜브에 업로드된 오페라 악마의 공연 대부분이 록 음악이었어. 트로트처럼 단기 속성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꾸준히 해왔다는 이야기야. 사실상, 록 음악이 주력이라고 봐야겠지.”

모니터에는 무대를 마친 노을 쳐녀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가 보여준 퍼포먼스를 노래와 병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력파로 알려진 불렛타임즈가 파트 분배를 해서 불러도 숨이 차는 노래이니, 솔로 라이브는 가당치도 않다.

단 한마디의 노래도 부르지 않았지만,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역대 최고의 무대였다.

노을처녀가 박수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가는 걸 확인한 민현숙이 헤드셋의 버튼을 눌렀다.

“오페라 악마, 스탠바이.”

* * *

노을 처녀가 통로를 통해 무대 뒤쪽으로 걸어 나왔다.

립싱크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컬 실력이 뛰어난 건 인정한다.

녹음실에서 부른 AR이지만, 원곡자의 노래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다.

댄스곡이 아닌 발라드 계열의 노래를 골랐다면, 굳이 립싱크를 하지 않고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 가수였다.

그녀가 신인 가수거나 인기가 없는 무명의 아이돌이라면, 완벽한 공연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작진의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하랑이 스쳐 지나가는 노을 처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선이 노을 처녀의 마이크 팩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노을 처녀도 하랑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쌀쌀맞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원망하지 말아요. 난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거니까.”

“네, 고생하셨다고요. 다른 뜻은 없어요.”

정말로 다른 뜻은 없었다.

경연 무대의 립싱크는 노을 처녀의 의지도 아니었을 테고, 본인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으로 AR을 만들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한층 더, 치열한 경연을 만들어 줄 장치에 불과하니까.

상대방은 하랑의 인사를 비꼬는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왜 깐족거려? 재수 없게.”

중얼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목소리가 인형 탈 밖으로 들리면 그건 혼잣말이 아니다.

출연진들 사이에, 오페라 악마의 정체가 신인 아이돌이라는 소문 정도는 돌았을 거다.

하랑의 연차가 자신의 밑이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험담을 던진 거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멘탈을 흔들 목적일 수도 있고, 그냥 성격이 개차반일 수도 있다.

“방금 뭐라고?”

“본인 무대나 잘하시라고요.”

날 선 반응을 보인 노을 처녀가, 몸을 돌려 무대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인데,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랑이 아닌 류하민이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다.

신인 아이돌이 아니란 뜻이다.

“성깔 더럽네.”

스탠바이 직전에 언성을 높이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하랑도 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설사 누군지 안다고 해도, 저런 되바라진 인성의 소유자에게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헤드셋으로 무전을 받고 있던 스태프가 하랑에게 말을 건넸다.

“오페라 악마님. 무대 입장, 1분 전입니다.”

스태프가 달라붙어서 마이크 팩의 전원을 겨주자, 인이어에서도 민현숙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페라 악마, 스탠바이.

드디어 본 공연이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긴장이 되는 건,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사념의 부작용이라는, 원치 않는 배수진을 치는 바람에 평소보다 배는 더 긴장된다.

- 긴장하지 않게 심호흡 한번 크게 하시고.

민현숙의 격려가 인이어를 통해 흘러 들어왔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웃기는 양반일세.

“후우…….”

- 무대 입장. 무대 입장.

통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메라가 하랑의 얼굴을 잡았다.

심장 박동처럼 쿵쿵거리는 입장곡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하랑이 보무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리드미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풍성한 치마가 걸음에 맞춰서 찰랑거린다.

이젠 입만 뻥긋거리는 가짜 무대가 아닌, 성대에서 뻗어 나오는 진짜 무대를 보여줄 때다.

- 1라운드 팝페라! 2라운드 트로트! 오늘은 어떤 무대를 선보일 것인가! 쟁쟁한 가수들을 꺾고 결승 무대에 선 오페라의 악마에게 열렬한 환호를 부탁드립니다!

장내에 내래이션이 울려 퍼지고, 방청객과 패널이 격렬한 환호를 보내왔다.

지난주와 비교해서, 패널들은 거의 변경이 없고 방청객들은 대부분 물갈이되었다.

2라운드에서 좌석 대부분을 채웠던 고연령층 방청객이, 3라운드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방청객의 연령대가 젊어졌으니, 직전 무대에서 노을 처녀가 보여줬던 가볍고 경쾌한 댄스곡은 어느 정도 유효했을 것이다.

- 오페라의 악마, 선곡은 R&B 그룹 리앤즈의 ‘페이지’입니다.

내래이션에서 하랑의 선곡을 알려주자, 이하랑의 무대를 3주째 지켜보고 있는 패널들이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저분은 진짜 정체가 뭐야? 지지난 주에는 팝페라. 지난주에는 트로트. 이번 주에는 R&B?”

“스펙트럼도 넓은 것도 일관성이 있어야지. 가면가수왕에 나올 사람이 아니라, 진기명기에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힌트라도 좀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트렌드 조사하느라 업계 관계자들 다 만나고 다니거든? 그런데 내가 아는 가수 중엔 저런 가수 없어.”

대부분 정체를 모르겠다고 투덜대고는 있지만, 절대로 불쾌한 투정은 아니었다.

조명이 바뀌고 음악이 깔리자, 패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용히 입을 닫았다.

설마하니 R&B 창법까지 수준급으로 구사할까 하는 기대감으로 오페라 가면을 쓴 가수의 첫마디가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하랑의 입이 열리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첫 페이지를 다시 쓸 수 있다면 ♬

딱 한 소절만 지나갔음에도 알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노래와는, 가사만 같을 뿐 본질이 다른 노래라는 것을.

난 그냥 그 자리를 비워두려고 해 ♬

그래야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

가사들이 엇박을 타고 흐른다.

뒷마디의 가사가 앞마디에 살짝 어긋나게 물린다.

싱코페이션. 박자 감각이 탁월해야 시도할 수 있는 기교다.

어설프게 시도하면 박치가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R&B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기교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가사가 고막을 쉴 새 없이 간지럽혔다.

제멋대로 박자를 타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루브하게 위아래를 넘나드는 애절한 선율은, 오페라 악마가 R&B 창법에 능숙한 보컬임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도대체 저분이 누구냐고. 다 잘해버리면 어떻게 맞춰? 전문 분야가 있을 거 아냐.”

고정 패널인 방송인 김가라가 짜증 섞인 투로 입을 털었다.

페이크 가스펠러 이은성.

신을 혐오하는 성가대원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마디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싱코페이션과 송과선을 자극하는 비브라토가 모든 청자들로 하여금 경이로운 우울감을 선사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

추억은 겹겹이 쌓여 ♬

가슴을 아릿하게 조여든다 ♬

내 삶의 모든 페이지에 네 이름이 있어 ♬

감정이 없는 오페라 가면 위로 마법처럼 선명한 감정이 드러났다.

표정이 없는데, 표정이 보인다고나 할까?

가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공통으로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가면은 지금, 절망하고 있다고.

피아노 솔로 위에 악기들이 시차를 두고 쌓아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드럼 세션이 깔리는 순간 곡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고조되었다.

오아아아~ ♬

우아아아~ ♬

비브라토에 실린 오열이 관객들의 심장을 인질로 잡고 엉망으로 뒤흔들었다.

감성에 젖은 관객 일부는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기까지 했다.

“스읍…….”

패널석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지창현이 두 손으로 콧잔등을 매만지는 것을 시작으로, 99명 청자들의 눈시울이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잘 부르네……. 쟤 진짜 미치게 잘 부르네.”

앞선 무대를 말끔히 지워버렸다.

댄스곡 무대로 인해 한껏 들떠있던 감정을, 가차 없이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노래였다.

R&B의 형태만 빌렸을 뿐, 사람들을 무저갱으로 던져버리는 또 다른 ‘글루밍 선데이’였다.

패널의 한 축이었던 한재웅 평론가가 눈가를 문지르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트로트 가수는 절대로 아니야.”

지난주에 보여줬던 트로트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흥이었다.

이번 주에는 그때와는 다른 가수, 다른 음색이 무대로 올라왔다.

제작진이 패널들을 속이고 가수를 바꿔치기했다고 해도 믿을 판이다.

이미 추영자의 전례가 있지 않은가.

찬란했던 마지막 페이지 ♬

그 페이지를 찢어내 ♬

아름다운 입술로 이별을 속삭였던 그 페이지 ♬

그 페이지를 찢어내 ♬

살갗이 찢겨나가는 것처럼 비통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분명 아름다운 멜로디 위에 실린, 시리도록 감미로운 음색의 노래였다.

마이크를 쥐지 않은 하랑의 왼손이 절박하게 허공을 붙잡았다.

오페라 가면의 눈두덩이에서는 처절한 눈물이 흘러내렸고, 사람들은 존재할 리 없는 그 눈물을 목격하는 중이었다.

남자 방청객들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되삼키고, 여자 방청객들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손으로 막고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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