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175화 (175/376)

175화. 악마의 이름을 부르면 (2)

-지긋지긋하다. 모든 채널에서 트로트만 나와. 가면만 뒤집어쓰고 있지, 트롯 경연이랑 다를 게 뭐야?

-구지아는 뭐 하는 듣보잡인데? 가면 벗으니까 한순간에 갑분싸되는 거 안보임? JBC 이 새끼들 완전히 감 잃었네. 감 잃었어.

-근본 없는 얼치기 하나 띄워주려고 별 쇼을 다 한다. 출연자 섭외가 힘들면 방송 접으라고…. 빠가사리들아.

예견했던 대로, JBC 시청자 게시판에는 본방을 시청한 대중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영향력 없는 셀럽.

사실상 셀럽이라고도 보기 힘든 신인 가수를, 취지에 맞지 않는 프로그램에서 데뷔시켜 버린 역풍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

추영자가 저지른 만행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대가는 애꿎은 구지아가 치르고 있다.

“토깽이한테 졌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이 상태에서 하랑까지 가면을 벗었으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뻔했다.

구지아나 하랑이나 셀럽이 아니긴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 구지아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희생양으로 등을 떠밀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모종의 거래도 있었다.

JBC에서 준비 중인 ‘슈퍼 트롯 스타’의 참가자로 섭외된 것이 그중 하나였다.

[가면가수왕 ‘구지아’, 슈퍼 트롯 스타의 첫 번째 참가자로 발탁.]

JBC도 잡음이 발생할 걸 예상하였는지, 가면가수왕 본방이 끝나자마자 오피셜 기사를 띄웠다.

구지아는 스스로의 의지로 오명을 뒤집어쓰는 대신, 남들보다 빠른 데뷔 기회를 낚아챘던 것이다.

“영악해지기로 한 건가? 하긴, 기약 없는 기다림에는 질려버렸을 테니…….”

구지아는 레몬 엔터에서 수년간 희망 고문에 시달리며 고통받았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행동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악플이 달리는 건 잠깐이고, 실제로 악플을 다는 누리꾼들도 트로트를 경시하는 안티들이다.

소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녀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질 테지.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게 노이즈 마케팅의 기본이다.

심지어 그들은 트로트를 좋아하지도 않고, 구지아가 노리는 타깃 팬층도 아니다.

-구지아님 노래 잘들었읍니다. 이어려운 시기에는 당신가튼 절믄가수들이 필요합니다. 띠어난 명품가수가 되어주세요.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시고 항상건강 잘챙기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맞춤법도 맞지 않고, 문맥도 어색한 게시글을 확인한 하랑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눈에 봐도 인터넷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름 모를 어르신이,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정성스럽게 작성해서 올린 글이다.

트로트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구지아는, 앞으로도 어르신 팬들의 맹목적이고 과격한 화력지원을 받게 될 거다.

방송국에서 연예인으로 만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 * *

가면가수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하랑에게도 한층 여유가 생겼다.

일주일마다 하루를 꼬박 사용하던 녹화 일정도 가수왕전이 있는 3주 주기로 잡혔다.

후시 녹음도 끝났고, 재킷 촬영도 마무리되어서 실물 음반도 제작 단계로 넘어갔다.

그 사이에 가면가수왕의 3주 차 녹화분도 본방을 타게 되었다.

가수왕과 후보가 역대급 무대를 보여줬기에,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토깽이 5연승이 여기서 막혔다고? 심지어 토깽이가 엑시스 우도형이라고? 그럼 오페라 악마는 대체 누군데?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놀랍다. 이 정도로 정체가 가늠 안 되는 가수가 있긴 했어?

-사랑한다, 유지연!

-오페라 악마는 10대라잖아. 유지연은 서른 넘은 아줌마야. 라임 소녀 묻히지 마.

-트로트 가수라서 다들 모르는 게 아닐까? 그 쪽에 신동들이 많다잖아. 지난주에는 트로트를 부르기도 했고.

-노래는 잘하는데 겁나 못생겼을 듯. 그거 빼곤 답이 없다.

하랑은 조용히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검은 액정 위로 동그랗고 귀여운 소녀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원래도 얼굴 빼곤 별 볼 일 없었어, 이것들아. 얼굴 안 보인다고 말 함부로 하네.”

몸뚱이의 원주인은,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다면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도 꾸지 못했을 재능의 소유자였다.

일이 꼬이고 꼬이다 보니, 엉뚱한 영혼이 몸뚱이를 차지해서 여기까지 간신히 끌고 온 거지.

오대식은 며칠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길 잃은 강아지한테 오대식의 이름을 준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모양이다.

이름만 부르면 언제고 나타났던 놈이, 일주일이 넘도록 깜깜무소식이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다.

49일이 지나기 전에는 나타나려나?

- 지잉.

핸드폰이 울리면서 카라멜톡 메시지가 떠올랐다.

[진나경: 언니, 자?]

가출 소녀 진나경이다.

대학로 버스킹 이후로는 안부 정도만 묻는 사이였다가 그나마도 뜸해졌다.

갑작스럽게 메시지를 보내올 줄은 몰랐다.

[아직.]

[진나경: 가면가수왕……. 언니 맞지?]

얜 촉이 왜 이렇게 좋대냐?

방송 끝난 지 불과 한 시간이 지났는데, 그새 눈치를 채고 연락을 해 왔다.

[나 아닌데.]

[진나경: 거짓말.]

하랑은 메시지를 무시하고, 침대의 커튼을 쳤다.

치토세의 코고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치토세보다 빨리 잠을 청해야 했다.

다시 한번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그냥 무시하고 눈을 감으려 했지만, 결국 호기심이 승리했다.

[진나경: 기사 떴어.]

기자 놈들은 퇴근도 안 하나.

방송국 놈들이 소스 던진 건 아니겠지?

[어디? 링크 줘 봐.]

파란색으로 된 링크 주소가 메시지 창에 떠올랐다.

하랑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주소를 눌렀다.

웹페이지로 전환되었는데, 기사는커녕 팔뚝만 한 물고기를 낚고 있는 강태공의 사진이 전부였다.

“낚였네, 염병.”

[진나경: 기사 떴다니까 일 초 만에 톡 보내는 거 보소. 언니는 속이 훤히 보여.]

[거짓 뉴스 나갔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진나경: 기사는 아닌데, 커뮤니티에는 언니 이름이 올라왔어.]

[어디? 링크…….]

조건 반사식으로 톡을 작성하다가 문득, 자신이 금붕어가 아닌가 생각해보는 하랑이었다.

다행히 하랑이 톡을 보내기 전에, 진나경으로부터 새로운 링크 주소가 도착했다.

하랑이 링크를 누르자 대형 커뮤니티의 게시물 하나가 떠올랐다.

- 오페라의 악마가 시트러스밤의 이하랑인 이유

이건 진짜인 것 같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게 요약이 되어있다.

하랑은 스크롤을 내려서 글 내용을 확인했다.

구구절절한 사설과 하랑의 프로필 아래에, 오페라 악마의 정체로 하랑을 단정 지은 이유가 적혀있었다.

[……이하랑의 나이는 만으로 19세야. MC가 준 힌트대로 10대가 맞지. 대학로 카페에서 가수 알바도 했는데, 팝페라로 노래를 불러서 커피숍 천사라는 별명도 붙었어.]

그래, 뭐.

손님들이 워낙 많이 드나들었으니까 누군가 봤을 수도 있지.

해당 내용 밑으로 어스튜브 동영상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태원에서 시리얼 킬러스와 만났을 때의 공연 영상이었다.

[이건 헤비메탈 아이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진 동영상이야. 조회수가 무려 백만이지. 볼 사람들은 이미 한 번쯤 봤을지도……. 이하랑은 팝페라와 메탈 창법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야.]

그 아래에는 다른 동영상도 띄워져 있다.

‘한밤의 연예타임’ 인터뷰 영상이다.

이때는 클라우드 엑스의 리첼과 듀엣을 했었다.

[누리랜드 사고 당시에, 어린이들 등에 업고서 와이어 타고 올라갔던 여자가 바로 이하랑이야. 데뷔 전에 이미지 소모를 하기 싫었는지, 한밤의 연예타임 인터뷰가 유일한 방송 출연이고. 인터뷰하면서 클라우드 리첼과 듀엣곡도 하나 불렀는데, 이때는 휘슬 레지스터를 보여줬지. 가수왕 결승전에서 보여줬던 돌고래 소리 말이야.]

많이 알고 있네?

시트러스밤의 숨어있는 팬인가?

그 밑에는 대학로의 거리공연 영상이 스크린샷으로 주르륵 붙어있었다.

하랑이 기타로 난입꾼의 머리통을 후려갈겼기에, 레몬 엔터가 동영상 플랫폼에 연락해서 업로드를 금지시킨 영상이다.

[이건 최근에 있었던 대학로 버스킹 장면. 지금은 영상이 다 내려가고 없지만, 스샷은 남아있더라고. 이하랑이 메고 있는 기타 보이지? 오페라의 악마도 가수왕전에서 저 기타를 메고 무대에 올라왔어.]

눈썰미가 대단한 친구다.

하랑이 등장했던 1라운드부터 눈여겨 지켜봤을 거다.

이 게시물도 미리 작성해 놨다가, 가수왕전 시청 후에 확신을 가지고 업로드한 것이리라.

[모리스 마호가니. 양산이 아니라서 우연히 같은 기타를 메고 왔을 확률은 현저히 낮아. 미화로 만 달러. 우리 돈으로 치면 1,200만 원짜리 기타를 동일인물로 의심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지.]

아쉽지만 이미테이션이란다.

그거 빼고는 다 맞췄어.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정체가 벌써 드러나면 곤란하다.

시트러스밤 데뷔와 함께 ‘빵’ 하고 터뜨리려고 했는데.

[정말 흥미로운 건, 이하랑이 시트러스밤의 메인보컬이 아니라는 거야. 방송에서 힌트를 줬다시피 보컬조차 아니지. 엉뚱하게도 서브래퍼 포지션을 맡고 있어. 전부 맞아떨어지지 않아?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게…….]

* * *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게, 서브래퍼의 보컬이 가수왕을 꺾어버릴 정도면……. 메인보컬을 잡은 멤버는 어떤 괴물일지 상상도 안 된다는 거야. 님들은 상상이 가?’

가면가수왕에 대한 스포일러가 없는지 확인하다가, 우연히 본 게시물의 내용이 희영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메인보컬의 자리는 온전히 실력으로 얻어낸 자리가 아니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하랑이 시트러스밤을 잠시 떠났기에, 어부지리로 앉은 자리였다.

‘래퍼보다 못한 메인보컬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아?’

누구도 그런 답글을 작성하지 않았지만, 희영의 귀에는 상상 속의 글귀가 수군거리는 목소리로 변환되어 들려왔다.

자격지심 따위는 전부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침대에 누웠는데도 눈이 감기질 않는다.

심장이 뛰는 소리와 시계 초침소리가 먹먹하게 고막을 때리고 있다.

점점 커져가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 희영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벽걸이에 손을 뻗어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바바리코트까지 걸치고 나자, 잠에서 깬 가나가 어눌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언니……. 어디 가세요?”

“잠이 안 와가 요 앞에 잠깐 마실 좀 다녀올라꼬.”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신경 쓰지 말고 자래이.”

연습을 해야 한다.

하랑의 경이로운 보컬을 따라가려면 잠을 자는 것도 사치다.

이대로라면 데뷔를 해도 떳떳하게 무대에 설 수가 없다.

거실로 나온 희영이 핸드폰을 꺼내, 회사의 보컬실을 예약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 10분이면 도착할 거다.

새벽 3시까지만 연습을 하고 돌아오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 끼이잉.

하얀 털 뭉치가 거실을 가로질러 희영을 향해 다가왔다.

불은 꺼져 있지만, 흰색의 강아지라는 건 쉽게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내 땜시 깼나? 미안타.”

대식이는 희영의 다리에 매달려서,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고 꼬리를 흔들며 보챘다.

희영은 별생각 없이 허리를 굽혀 대식이를 품 안에 부둥켜안았다.

“내는 나갔다가 새벽에 올 기다. 집 잘 지키고 있그라, 오대식이.”

품에 안긴 강아지를 쓰다듬으니, 혼란했던 마음이 평온을 되찾는 느낌이다.

체이는 손을 계속 물리면서도, 강아지가 평온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 같다.

희영은 강아지를 끌어안은 상태로 거실의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외출하기 전에 바바리코트의 깃이 뒤집히진 않았는지 재차 확인했다.

- 그르르르…….

문득 희영의 품에 안겨있는 대식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빨을 드러냈다.

“오대식, 밤에 짖으면 못 쓴데이. 와 거울을 보고 성을 내노?”

개가 사람의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리 없다.

희영은 대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진정시키려 했지만, 대식이는 드러낸 이빨을 감추지 않았다.

체이한테 그러던 것처럼, 갑자기 자신의 손을 물지 않을까 희영은 불안해졌다.

- 왕!

결국 짖었다.

곤히 잠들어있는 멤버들이 잠에서 깰까 봐 불안해진 희영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오대식! 쉿! 조용.”

거울에 맺힌 상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거울에 비친 희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질적인 움직임을 느낀 희영 또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눈동자는 희영이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이미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착각이겠지.

희영이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고 다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거울 속 희영의 눈을 깜빡였다.

분명 거울이 눈을 깜박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희영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거울 속의 희영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침내 날 불러냈구나, 부산 아가씨.]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환청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환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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