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찌라시 (2)
시트러스밤의 쇼케이스는 성황리에 끝났다.
기자 쇼케이스는 행사 막판에 사고 아닌 사고가 있었지만, 어스튜브를 통해 생중계되는 팬 쇼케이스는 천 명이 넘는 감귤단의 참석 아래 큰 사고 없이 막을 내렸다.
언론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레몬 엔터였기에 관련 기사들도 호평 일색이었다.
[‘Beyond the Road’ 뮤직비디오, 반나절 만에 420만 뷰 달성.]
[시트러스밤! 제대로 터졌다. 앨범 발매 6시간 만에 음원 차트 줄 세우기 성공.]
[역대 최강의 비주얼 걸그룹이 탄생하다.]
데뷔 전에 착실히 쌓아놨던 인지도가 눈덩이처럼 부풀려져 돌아왔다.
뮤직비디오에는 만 단위의 댓글이 달렸고, 커뮤니티는 시트러스밤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었다.
싱글앨범에 포함된 수록곡은 나란히 음원 스트리밍 1, 2,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매니지먼트 본부와 홍보 부서에는 뒤늦은 섭외 전화가 밀려들었다.
시트러스밤의 스케줄은 쇼케이스 전에도 이미 풀(Full)이었다.
조약돌이 담긴 양동이에 모래를 쏟아 넣으면 얼마든지 더 채워 넣을 수가 있듯이, 큼직큼직한 스케줄 사이에 자잘한 스케줄을 끼워 넣었다.
이제는 잠이 모자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숨을 쉴 시간이 있는지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다.
시트러스밤을 굴려서 본전을 뽑겠다는 김중식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사실상 예견된 성공이었다.
라임소녀도, 불렛타임즈도, 클라우드 엑스도…….
레몬 엔터에 소속된 모든 아이돌 그룹이 데뷔와 동시에 음원 차트 1위를 찍고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거대 소속사의 네임 벨류와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쌓아올린 계단을 걸어 올라갔을 뿐이다.
그래서 만족을 하지 못한 걸까?
아직까지도 진짜 이하랑은 깨어나지 않고 있다.
* * *
- 솨아아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던 희영이 욕실 거울에 맺힌 습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냈다.
거울 너머에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긴 희영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진짜였나?”
희영이 무심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거울 너머의 악마가 건네준 박하사탕.
손 위에 실체가 있었음에도, 희영은 사탕을 손에 쥐게 된 과정 전부를 환각으로 치부했다.
거울 속 악마와 대화를 나눈 시작부터 끝까지, 긴 환각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사탕은 실제로 존재했지만, 절대 악마로부터 받을 것일 리가 없었다.
환각을 경험한 시간 동안, 숙소에 굴러다니던 것을 우연히 손에 쥐게 되었다는 추론이 더 합리적이었다.
몽유병처럼 말이다.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게 희영에게는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그 일 이후로, 박하사탕은 희영에게 일종의 부적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핸드백에서 물건을 꺼낼 때마다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면서, 현실에 어떠한 오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자신도 모르게 병증이 재발할까 봐, 늘상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지냈다.
환각 증세는 드물게 있어왔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악화되고는 했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데뷔에 영향을 미칠까 봐 남들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쇼케이스 때까지만 하더라도, 박하사탕의 용도는 불안증세를 가라앉혀주는 부적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쇼케이스를 앞두고 소진의 무대 공포증이 재발했다.
매니저에게 핸드백 안의 청심환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고, 매니저는 청심환과 박하사탕을 같이 꺼내 왔다.
청심환이 입에 쓰니까, 달콤한 것으로 입가심을 하라는 의도였을 거다.
희영이 그 박하사탕을 부적 삼아 간직하고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겠지.
희영 또한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기에, 소진에게 청심환을 먹이고 나서 박하사탕도 까서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무대에서 그 일이 벌어진 거다.
천상의 목소리 신혜수.
모든 여가수들의 워너비 음색이 소진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효과는 24시간. 이걸 녹여 삼키면, 넌 신혜수의 목소리를 가지게 될 거야.’
그 악마가 했던 말이다.
환청 따위가 아니었다.
소진의 노래가 환청이라면 시트러스밤 멤버 모두가 미쳐서, 동시에 헛것을 들었다는 이야기니까.
소진은 오후의 쇼케이스에서도 신혜수의 음색으로 노래했고, 팬들로부터 격한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 돼서야 소진의 목소리에서 신혜수의 음색이 사라졌다.
악마의 말대로 24시간이 지나, 능력을 거둬갔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소진은 그날 하루만 유독 컨디션이 좋았다고 아쉬워했지만, 그건 정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신소진과 연습생 생활을 함께한 지가 어언 3년이 넘었고, 그녀의 보컬 실력을 모를 리가 없는 희영이었다.
지극히 평범했던 보컬이 하루아침에 신혜수급의 실력자로 변모한다?
그리고 다음 날에 감쪽같이 사라진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희영은 미친 게 아니었고, 거울 속 악마는 실존했다.
‘내 이름은 오대식. 염원을 가지고 거울 앞에서 날 불러.’
따뜻한 물이 매끄러운 등 위로 쏟아지고, 거울엔 어느덧 다시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희영은 손바닥에 비누를 묻혀 거울을 닦아냈다.
건너편에 자신과 똑같은 잔영이 물줄기를 맞으며 서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거울 속의 잔영이 자신의 행동과 어긋나게 움직일 것 같았다.
희영은 거울을 향해 작게 읊조렸다.
“내가 보기보다 겁이 많타. 놀래키지 말고, 거 있으모 조용히 눈을 한번 깜박이그라.”
잔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희영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오대식.”
이름을 부르고 난 뒤에도 거울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겁에 질린 희영이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고, 거울 너머를 잔뜩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
“스물셋이나 먹고 이게 모 하는 짓이가. 시상에 악마가 어해 있다꼬. 한심타, 조희영.”
허탈한 웃음을 내뱉은 희영이 몸을 돌려 샤워기의 레버를 당겼다.
곧 물줄기가 사그러들었고 샤워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인기척을 느꼈다.
등 뒤로는 상반신을 비추는 거울이 전부였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공포심과 설마 하는 호기심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결국, 승리한 건 호기심 쪽이었다.
희영은 천천히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몸을 반쯤 돌렸을 때, 거울이 시야에 들어왔다.
“꺄아악!”
희영의 입에서 본능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울 속의 잔영이 등을 보인 채로, 머리만 180도 회전해 정면으로 희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장면이었다.
[야! 네가 불러서 온 건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희영은 그대로 눈을 뒤집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거울 속의 잔영이 황급히 머리를 제자리로 돌리고, 욕실 바닥에 쓰러진 희영을 내려다보았다.
[어이, 부산 아가씨! 장난이야! 장난!]
희영은 그대로 혼절해 버렸고, 오대식은 난감한 표정으로 젖은 머리를 헝클었다.
[아, 진짜……. 겁대가리 상실한 누구랑은 다르네. 그거 좀 놀렸다고 정신을 놔버리냐? 이렇게 심약해서야…….]
- 쿵! 쿵! 쿵!
바깥에서도 희영의 비명을 들었는지, 누군가 매섭게 문을 두들겼다.
“희영 언니! 안에 무슨 일 있어요?”
하랑의 목소리였다.
오대식은 곤란한 표정으로 희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거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는 이전에 희영에게 건넨 적이 있었던 박하사탕이 또다시 들려있었다.
[또 남한테 주지 마. 샘플은 이게 마지막이야.]
비닐로 포장된 사탕 한 알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욕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은 희영의 머리맡까지 굴러가 멈추었다.
“끄으응…….”
잠깐 의식을 잃었던 모양인지, 쓰러진 희영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대식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희영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음에 볼 땐, 진짜 거래를 하자고.]
다시 한번 욕실 밖에서 하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나야! 욕실 열쇠 좀 가져와!”
[쳇, 성가시긴.]
거울 속에서 오대식이 사라지자마자, 욕실의 문이 열렸다.
밖에서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온 것이다.
“희영 언니! 무슨 일......”
문을 활짝 열어젖힌 하랑은, 욕실 바닥에 나체로 쓰러져 있는 희영을 확인하고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 틈새로 시선이 가는 것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삐쩍 마른 가나가 속옷만 입고 거실을 싸돌아다니는 건 여러 번 봤지만, 성적인 매력이 차고 넘치는 희영과는 격이 달랐다.
잠깐 스쳐 가듯이 눈길을 준 게 전부인데도, 하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뒤이어 다가온 이나와 치토세가 욕실 안을 들여다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희영 언니! 괜찮아요?”
“끄아앙! 희영! 어떻게 된 거야! 죽었어?”
머뭇거리는 하랑 대신, 이나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 희영의 몸을 흔들었다.
희영의 몸이 흔들리고, 육감적인 무언가가 함께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하랑은 헛기침을 하면서 욕실 밖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얼굴이 빨개져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금방 의식을 되찾았는지, 희영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냥 넘어진 기다. 소란 떨지 마라. 챙피하구로.”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이나가 희영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바닥이 미끄러운지 희영은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가 몬 인나겄다. 하랑, 거서 모 하노? 이리 와가 내 좀 부축해도.”
“그……. 옷부터 좀…….”
“가시내 매정하대이. 그냥 방까지만 좀 옮기도.”
아니 될 말씀이다.
시선을 둘 곳도 없는데 부축은 무슨…….
욕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 하랑이 욕실 선반에서 목욕 타월을 끄집어냈다.
고개를 돌린 채로 타월을 이나에게 건네주었다.
“일단 그걸로 좀 가려요.”
“와? 언니야 벗은 몸 보니까 막 설레고 그카나?”
희영이 맥 빠진 목소리로 농을 던졌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말투도 왠지 어눌하다.
단순히 미끄러져 넘어진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친 데는 없어요? 머리를 부딪쳤다던가?”
“그런 거 아이다.”
이나가 목욕타월로 희영의 몸을 대충 덮어주었다.
워낙 장신이기도 하고 글래머이기도 해서, 타월로 몸을 가렸는데도 이기적인 몸매는 여실히 드러난다.
하랑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희영의 허벅지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다른 손으로 등을 받쳤다.
손끝에 희영의 맨살이 닿자, 민망해진 하랑이 괜스레 다시 상태를 물었다.
“정말 다친 데 없죠?”
“부축해 달랬더마, 공주님 안기를 할라 카내? 니 힘센 거 내한테 자랑하나?”
“다친 데 있으면 숨기지 말고 병원 가셔야 되요.”
“울 엄마가? 챙피해서 못 일어나는 기니까 잔소리 좀 고마해라.”
하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공주님을 안아 올리듯 희영을 들어 올렸다.
희영이 팔을 뻗어 하랑의 목을 끌어안는 사이, 아래로 축 늘어지는 타월을 이나가 정리해 주었다.
치토세는 욕실 바닥에서 무언가 발견했는지, 허리를 굽혀 바닥을 살폈다.
“사탕이다. 왜 이런 데 떨어져 있지?”
치토세가 사탕을 줍자, 조희영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치토세를 향해 조용히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가 흘린 기다.”
며칠동안 부적처럼 지니고 있던 그 박하사탕이다.
정신이 혼미했던 사이에, 악마가 거울 너머로 던져주고 사라졌다.
하랑도 그 사탕을 유심히 살폈다.
욕실에 가지고 들어온 것도 이상하지만, 정신이 없는 와중에 하찮은 사탕을 꼼꼼히 챙기는 것도 이상하다.
조희영이 단 걸 좋아했던가?
“하랑, 모 하노? 내 안 무겁나?”
빨리 가자는 말이었다.
하랑은 희영을 안고서 거실을 지나 희영의 방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혜수는 이미 잠이 들어있었고, 가나는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희영이 수건 한 장만 걸친 채로 하랑의 품에 안겨서 들어오자, 아직 깨어있던 가나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야? 희영 언니 왜 이래?”
“욕실에서 넘어져 뿌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라.”
“대체 어쩌다가요?”
하랑이 대신 대답했다.
“비명소리가 들려서 문 따고 들어갔더니…… 보다시피. 저 끝 침대죠? 희영 언니 자리.”
이나가 먼저 달려가 희영의 이부자리를 먼저 정리했다.
희영의 몸에 대충 걸쳐진 타월이 무게 때문에 아래로 계속 쳐지다가, 타월의 끄트머리가 하랑에 발에 밟힌 것도 그 순간이었다.
- 스르르......
희영의 몸을 덮고 있던 타월이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어어?”
화들짝 놀란 하랑이 등을 받치고 있던 팔을 거두고, 재빨리 떨어지는 타월을 움켜쥐었다.
타월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품에 안고 있던 희영을 놓쳐버렸다.
“뭐, 뭐꼬!”
하랑의 괴력을 믿고 있던 희영이었기에 하랑의 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도 않았다.
중력이 희영의 상체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차 싶었던 하랑이 떨어지는 희영을 받으려고 무릎을 희영의 등 밑으로 집어넣었고, 결과는 더 최악이었다.
- 터억!
“아악!”
졸지에 하랑의 무릎에 등짝을 찍힌 희영이 바닥으로 비참하게 나뒹굴었다.
타월을 온 몸에 둘둘 말고서,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핸드폰을 떨어뜨린 가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 브레이커?”
너무나도 정확히 희영의 허리를 꺾어버린 백 브레이커였다.
희영이 헐벗고 있는 터라, 손을 대지도 못하는 하랑은 연신 사과를 할 뿐이었다.
“으아아! 미안해요! 미안해요! 희영 언니! 괜찮아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치토세도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 하랑이 희영을 죽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