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226화 (226/376)

226화. 개와 올빼미 (1)

가면가수왕의 모든 무대가 끝났다.

가수왕 4차 방어전.

점수는 52 : 47.

힙합이라는 비선호 장르로 무대에 나섰던 오페라 악마였지만, 관객들의 지지를 업고 5표 차이의 승리를 거뒀다.

탈락하려고 선곡한 곡마저, 관객들에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승리와 관계없이, 하랑에게는 이번 무대가 가면가수왕의 마지막 무대였다.

레몬 엔터는 시트러스밤의 일정에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의 하차를 원했고, 결과에 상관없이 자진 하차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랑을 무대 중앙으로 에스코트한 사회자가, 아쉬움을 가득 담은 멘트를 날렸다.

“시청자 여러분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두 달여의 시간 동안 시청자분들의 사랑을 받았던 오페라의 악마가,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가면가수왕에서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면 위로 마이크를 가져간 하랑이 입을 열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를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무대였어요.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성숙해질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절 응원해 주시는 팬 여러분들도 많이 생겼고요. 다만 이제는 본업에 치중해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뿐입니다. 함께해야 할 동료들이 있거든요.”

하랑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으로는 얼굴 없는 가수가 아닌, 얼굴을 마주하는 가수로써 여러분께 좋은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했습니다!”

우레와 같은 갈채가 방청석에서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가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 사회자는 하랑을 무대 위에 남겨두고 MC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대의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어둠이 하랑의 모습이 집어삼켰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MC석으로 돌아간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이제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죠? 정말 많은 분이 가면 아래의 얼굴을 궁금해하셨어요. 성악가, 트로트 가수, 인디 밴드 보컬, 퓨전 국악가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추측이 무성했습니다.”

쥐 죽은 듯한 침묵이 스튜디오를 장악했다.

- 파앙!

하랑의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고, 사회자가 격양된 어조로 소리쳤다.

“오페라의 악마는 가면을 벗고, 얼굴을 공개해 주세요!”

하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페라 가면의 턱 부분을 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엄청난 환호성과 갈채가 귓전을 때렸다.

패널들은 입을 함지박만큼 벌리고, 놀라는 척 과장된 연기를 펼쳤다.

“오페라의 악마, 그 정체는 바로……. 시트러스밤의 래퍼! 이하랑 양이었습니다!”

* * *

하차 인터뷰까지 마친 하랑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 탕!

문을 열자마자 폭죽이 터졌고, 알록달록한 색상의 폭죽 테이프가 하랑을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폭죽을 터뜨린 희재가 얼른 다가와 하랑의 머리에 앉은 테이프를 털어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하랑 씨.”

“수고했다.”

지창현도 대기실에 남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쳐주었다.

그토록 혹독하게 차였는데도 남아있는 걸 보면, 차인 이유를 어느 정도 납득한 모양이었다.

괜한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리첼하고 체이는 어디 갔어요?”

당연히 남아있을 거라 생각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하랑이 주의를 두리번거렸을 때, 의상을 갈아입으라고 마련된 파티션 뒤편에서 리첼이 걸어 나왔다.

두 손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서.

꽃다발을 보는 순간, 하랑이 흠칫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거 내려놔요!”

“왜? 꽃가루 알레르기도 있어?”

리첼이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코를 킁킁거렸다.

옆으로 비켜 서 있던 배희재가 양팔을 교차해 X자를 그렸고, 지창현 또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하랑은 깨달았다.

고백 따위가 아니라, 평범한 축하 꽃다발이라는 걸.

리첼의 꽃다발은 장미가 한 송이도 없는 대신, 다채로운 색깔의 이름 모를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창현이 놈이 고백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리첼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그래도 꽃다발 들고 사진 정도는 찍어줄 수 있잖아. SNS 올려서 ‘내가 이 정도로 인맥이 넓다’라는 티는 내야 할 거 아냐.”

길게 한숨을 내쉰 하랑이, 리첼에게서 꽃다발을 빼앗다시피 낚아챘다.

“뭐, 저도 홍보팀에 넘겨줄 사진은 있어야 하니까……. 꽃은 고맙게 받을게요.”

“좀 곱게 받으면 어디가 덧나냐? 고약한 성질머리하곤.”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한 미소는 잊지 않는 리첼이었다.

리첼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 벽에 붙어 서 봐. 사진 한 방 찍어줄게.”

“에이, 귀찮게…….”

“시트러스밤, 메타라인도 열었다며? 팬들한테 후원받았으면, 돈 값해야지. 이런 이벤트가 있었으면서, 직촬 사진 한 장도 안 올리면 정말로 양심 없는 거다.”

하랑은 마지못해 꽃다발을 안고 벽으로 붙어 섰다.

리첼이 휴대폰의 카메라를 켜서 하랑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좀 웃어봐, 꼬맹아.”

“대충 좀 찍죠? 바라는 것도 많아.”

틱틱거리는 말과는 다르게, 하랑은 이를 살짝 드러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류하민일 때도 워낙 매력적으로 웃었기에 살인미소라는 별명이 붙은 하랑이었다.

요즘에는 잘 안 쓰는 말이긴 하지만.

하랑의 커다란 눈이 초승달을 그리고,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옴폭하게 파인 하랑의 보조개를 목격하는 순간, 리첼은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맥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멀쩡한 심장에 부정맥이 올 정도로, 하랑은 심하게 귀여웠다.

리첼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카메라 앱의 촬영 버튼을 눌렀다.

- 찰칵!

“됐죠?”

하랑이 벽을 벗어나려고 하자, 리첼이 이를 악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었다.

“되긴 뭐가 돼. 턱이 두 개로 나왔어. 다시 서 봐.”

“왜 이렇게 깐깐해요? 포토그래퍼야?”

“내 취미가 사진인 거 몰랐어? 이번엔 손가락 하트 그려봐. 옳지! 꽃다발 끌어안고 사랑스럽게. 옳지! 시선을 살짝 위로 바라보고. 옳지!”

- 찰칵! 찰칵! 찰칵!

어쩐지 텐션이 올라 본격적인 사진 촬영이 되었다.

하랑은 기념 촬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리첼의 주문에 따라 포즈를 취했다.

리첼은 진짜 사진작가라도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하랑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보다 못한 지창현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 별안간 지창현의 얼굴이 나타났고, 화들짝 놀란 리첼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창현은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지금 뭐 하냐?”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훠어이.”

“아주 그냥 사심이 가득한 눈빛이구만. 쯧쯧.”

헛물켜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혀를 차는 게 최선이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하랑이 꽃다발을 내려놓고 말했다.

“다들 시간 되시면, 근처에서 식사라도 하고 헤어지죠. 방송국 근처에 프라이빗룸 제공하는 맛집 알고 있는데.”

“그러자. 밥은 내가 살게. 정산도 못 받은 애들한테 얻어먹을 수는 없잖냐.”

리첼이 호기롭게 말하자, 지창현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애들?”

“내가 틀린 말 했냐? 꼬맹이는 활동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당연히 정산 못 받았을 테고, 기생오라비는……. 쥐꼬리만큼 받았겠지. 그루밍이야 그쪽으로 워낙 악명 높으니까.”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 하네?”

하랑이 꽃다발을 휘저으며 리첼과 창현 사이를 갈라놓았다.

“누가 앙숙 아니랄까 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람? 저 축하해 주러 모인 거 아니었어요? 밥은 제가 쏴요. 그러니까 으르렁대는 것 좀 그만 해요.”

하랑은 배희재를 보고 말을 이었다.

“언니, 체이는 어디 갔어요?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체이 씨는 택시타고 먼저 퇴근했어요. 대식이 밥 주는 걸 깜빡했다고, 빨리 숙소에 가봐야겠다고 하던데요?”

“대식이 밥이요?”

하랑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개밥을 주려고 퇴근했다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핑계야?

본의는 아니었지만 입술까지 맞춘 사이인데, 그런 날 버리고 개밥 주러 갔다고?

체이가 숙소의 강아지를 아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당혹스럽잖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혹시 이게 그건가?

잡은 물고기는 먹이는 주지 않는다는?

* * *

밥은 나중에 사기로 했다.

리첼은 몹시 실망한 눈초리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체이가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고 사라진 것이 몹시 불길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고, 톡을 보내도 읽지 않았다.

말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체이 씨는 아직도 연락 안 받아요?”

운전대를 잡은 희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랑은 통화연결음만 반복하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 안 받아요. 벌써 열 번째 걸었어요.”

“그냥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도대체 저는 하는 일마다 왜 이럴까요? 매니저 일이 저한테 안 맞는 걸까요?”

“매니저 언니 잘못 아니에요. 체이가 억지 부렸다면서요?”

억지를 부렸든 아니든,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먼저 자리를 떠야 했는지가 중요하다.

받지 않는 전화를 끊어버린 하랑이 희재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대식이 밥 주러 간다고 말하기 전에 체이한테 수상한 점 없었어요? 전화를 받았다든가, 누군가를 만났다든가…….”

“아니요. 하랑 씨 인터뷰하는 동안, 체이 씨는 저랑 계속 같이 있었어요.”

“대기실에서 둘이?”

“네. 어디 갈 곳도, 갈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까……. 아니다.”

희재가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닫았다.

답답해진 하랑이 희재를 재촉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체이 씨가 사라진 것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서요.”

“뭔데요? 말해봐요.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교차로의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췄다.

희재는 뒷좌석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하랑 씨, 하얀 올빼미 본 적 있어요? 깃털까지 완전히 새하얘서 작은 눈사람처럼 보이는 올빼미요.”

이건 또 무슨 의식의 흐름이란 말인가?

체이가 사라진 일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올빼미가 왜 튀어나오는데?

“올빼미가 왜요?”

“저희 대기실에 작은 환기창 하나 있었잖아요. 들어 올리면 반 정도만 열리는 창이요.”

“그냥 본론을 이야기해요.”

“그 창에 하얀 올빼미가 앉아 있다가 날아갔어요.”

신호가 바뀌고 희재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한참이 지나도 희재가 말을 잇지 않자, 답답해진 하랑이 물었다.

“그 다음엔요?”

“끝이에요.”

하랑이 황당한 표정을 짓자, 백미러를 통해 눈치를 보던 희재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하랑 씨가 말해보라면서요?”

아, 그렇구나.

올빼미가 앉아 있다가 날아갔구나.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것참 신기했겠네요.”

이게 정말로 행방불명이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더 늦기 전에 회사에 알리는 게 최선이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거리의 풍경이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하랑이 입을 열었다.

“이 블록에서 우회전하면 사옥 빌딩이죠?”

“네.”

“저 사옥 앞에 내려주시고, 언니는 곧장 숙소로 가보세요. 체이, 숙소에 있으면 저한테 바로 연락 주시고요.”

“괜찮겠어요?”

사람들이 하랑을 알아보고 몰려들까봐 불안해하는 거다.

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사옥으로 들어가려면, 보도와 작은 공터를 지나야 한다.

“멀지도 않으니까 뛰어서 들어가면 돼요.”

스타밴이 코너를 돌아 레몬 엔터 사옥 앞에 멈춰 섰다.

하랑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전화 주세요. 꼭.”

차에서 내린 하랑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곧장 사옥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다행히도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하랑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로비를 지나 출입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 낯익은 보안요원이 하랑을 맞이했다.

“어? 이하랑 씨? 매니저는 어쩌고 혼자서…….”

“출입증 안 가지고 왔는데, 들어가도 되죠?”

“아까 체이 씨도 매니저 없이 오셨는데, 오늘 매니저들 쉬는 날인가요?”

보안요원의 지나가는 말에 출입 게이트를 통과하던 하랑이 걸음을 멈췄다.

“체이가 여기 왔어요?”

“네, 20분 전쯤에 올라가셨습니다. 아직 나오시진 않았으니까 지금 올라가면 만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개밥을 주러 간다는 체이가 숙소가 아닌 사옥에 들렀다.

대체 왜?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아침에 회사로 택배가 하나 왔어요. 스티로폼 박스였는데, 하랑 씨 앞으로 온 거였어요.’

방송국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배희재가 했던 말이었다.

당시에 체이는, 하랑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잠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면?

걸음이 급해졌다.

세 개의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 근처에서 머무르거나, 올라가는 중이었다.

하랑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한걸음에 서너 개의 계단을 밟으며 총알처럼 위층으로 뛰어올랐다.

시트러스밤을 관리하는 아티스트 3팀 사무실은 지상 5층.

하랑이 도착하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상계단 밖으로 나와 아티스트 3팀 사무실로 달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가장 먼저 보이는 중년의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제 이름으로 온 택배가 있었나요? 스티로폼 박스인데…….”

“아……. 이하랑 씨, 직접 찾으러 오셨네요? 따라오시겠어요?”

중년의 직원은 하랑은 사무실에 붙어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팬들이 보낸 선물을 모아놓는 창고였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창고 안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상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직원은 창고를 빙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녁에 찾으러 오신다고 해서 창고 앞에 뒀었는데…….”

직원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여기 창고 앞에 놔뒀던 스티로폼 상자, 본 사람 없어?”

젊은 직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거 좀 전에 체이 씨가 찾아와서 직접 가져갔는데요?”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시트러스밤의 멤버가 직접 택배를 찾으러 오면, 다른 멤버의 물건이더라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누가 가져갔는지 알았으니까 됐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랑은 다시 복도로 나왔다.

체이 이 계집애는 남의 택배를 훔쳐서 어디로 향했을까?

보안요원 말로는 나가지 않았다 했으니, 아직 사옥 안에 있을 텐데…….

하랑이 다시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대식이라도 불러서 물어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악마는 체이의 아지랑이가 활성화되어 있는 한, 그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다.

7층.

시트러스밤의 지정 안무실.

그곳이 가장 유력하다.

하랑은 다시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6층을 지나고 7층에 오르는 순간, 하랑의 시선이 계단참에 위치한 유리창에 멈추었다.

“올빼미?”

창 바깥으로 보이는 전선에 눈처럼 새하얀 올빼미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동그란 눈동자는 어쩐지 하랑을 주시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랑이 계단을 한걸음 딛고 올라설 때마다, 올빼미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올빼미를 목격하는 것도 희귀한 일이지만, 그 올빼미가 순백색일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저런 종이 한국에 살기는 하는 종인가?

배희재도 같은 종의 올빼미를 목격했다고 말했기에, 기분은 한층 더 불길했다.

어쩐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대체 나한테 왜들 이래…….”

하랑은 올빼미를 애써 무시하고, 7층에서 비상계단을 빠져나왔다.

바삐 걸음을 옮겨 시트러스밤 안무실로 향했다.

잠겨있는 도어락의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열어젖혔다.

하랑의 직감대로 안무실 가운데에는 분홍 머리의 사이코패스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바닥에는 하랑의 아버지가 보낸 스티로폼 박스가 열려있었다.

박스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밀폐 용기에는, 진짜 이하랑의 아버지가 손수 담근 것으로 보이는 김치가 담겨있었다.

“체이…….”

하랑이 이름을 부르자, 체이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표정이 싸늘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저 스티로폼 상자 안에는 체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김치와 함께 들어 있었을 테니까.

체이가 손에 쥔 외장 하드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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