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235화 (235/376)

235화. 노래의 주인 (4)

레몬 엔터 사옥 대표실.

응접 테이블 주변으로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김중식 대표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으면서,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저작권 침해 내용증명이다.”

하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류하민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영문도 모르고 호출된 신소진은 조용히 눈알을 굴렸다.

김중식의 시선이 하랑을 향했다.

“그루밍에서 보냈어. 무엇 때문인지는 알지?”

신소진이 팔꿈치로 하랑을 툭 건드리며, 걱정이 그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랑, 혹시 또 사고 쳤어?’

‘또’라니…….

누가 들으면 맨날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 줄 알겠네.

하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작게 속삭인 대화였지만, 대표실이 조용한 탓에 모두에게 들렸다.

김중식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정도면 초대형 사고지. 제멋대로 회사의 사활을 걸어놓고, 몇 달이나 지난 뒤에 보고했잖아.”

“회사의 사활이라고 할 것까지야…….”

“소진아, 회의 끝나면 하랑이 데려가서 눈물 쏙 빠지게 혼내도록 해. 쟤 때문에 회사 말아먹게 생겼어.”

소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랑을 바라보자, 하랑은 두 손바닥을 앞으로 펼치며 자신은 죄가 없다는 걸 어필했다.

“대표님이 괜히 겁주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대표님이 저런 말씀을 하셔?”

곤란해하는 하랑 대신, 류하민이 입을 열었다.

“하랑이가 가면가수왕 나가서 부른 노래 있지? 내가 작곡하고 일재가 랩을 입혔다는 아이비트. 그 노래의 저작권이 그루밍에 있거든.”

“그게 문제 될 거리가 있나요? 방송국에서 허락했으니까 녹화한 거잖아요.”

“문제가 안 되는 일이면, 레몬 엔터에 이런 게 오진 않았을 테지.”

류하민이 테이블 위의 서류봉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루밍에서 방송 허가를 내주지 않았어. 네 옆의 쬐그만 녀석이 원곡자의 허락을 받았다고 호언장담하는 바람에, 방송국에서 믿고 녹화에 들어간 거야. 결과적으로 저작권 침해가 된 거지.”

신소진이 다시 하랑을 노려보았다.

‘시트러스밤의 보살’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신소진이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등짝 스매쉬가 날아올 것 같았다.

하랑은 소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원곡자 허락 맡았어요. 진짜예요.”

턱을 문지르며 고심하고 있던 김중식이 하랑을 가리켰다.

“소진아. 참지 말고, 쟤 등짝 한 대 시원하게 갈겨. 대표가 아티스트한테 손찌검을 할 순 없잖아.”

“순진한 언니한테 폭행 사주하지 마세요!”

“레몬이 대형 기획사라서 망정이지, 소규모 기획사였으면 입도 뻥긋 못하고 쓸려나갔을 일이야. 잘잘못을 가리기도 전에 언론의 포화를 맞고 박살 났을걸?”

레몬에 속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방식의 공격을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김중식의 말대로, 레몬 엔터라는 뒷배를 믿고 벌인 일이다.

얼굴에 철판을 깐 대표, 주요 언론사와 친분을 맺고 있는 홍보팀, 트러블 메이커들의 기상천외한 사건 사고를 조용히 처리해 온 법무팀까지.

대부분의 경우, 성격이 불같은 김중식 대표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던 법무팀이었다.

이제는 하랑이 김중식의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중식의 숨겨둔 딸이 하랑이라는 괴소문도,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는 소문이었다.

김중식이 서류 봉투 안에서 내용증명 문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대충 살펴보니, ‘너희가 저작권을 침해했으니 일정 금액으로 합의를 보든가, 그게 싫으면 소송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합의금으로 2억 달라더라. 저작권을 통으로 넘겨도 줄까 말깐데……. 이한성, 그 인텔리 놈이 마침내 노망이 난 게지.”

가면가수왕 프로그램의 매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과한 금액이었다.

다른 음악 프로그램처럼 커버한 노래를 음반으로 내는 것도 아니고, VOD 다운로드가 많은 프로그램도 아니다.

아이비트의 음원 사용료는 프로그램의 수익을 고려했을 때, 이백 정도면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프라이데이라는 네임벨류와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걸 감안하면, 저 정도 프리미엄은 붙어도 되지 않을까?

저게 다 류하민이라는 이름의 브랜드 비용인데…….

하랑의 생각을 읽기나 한 것처럼, 김중식이 말을 이었다.

“프라이데이 개값 된 지 언젠데, 이딴 말도 안 되는 청구서를 들이밀어?”

하랑과 하민의 시선이 동시에 김중식을 향했다.

류하민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김중식이, 아차 싶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하민이가 빠진 프라이데이가 그만큼 가치가 있느냐는 말이지.”

언제부터 ‘우리’ 하민이야?

이 배알도 없는 양반아!

신소진이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대표님…….”

“응? 소진이 할 말 있어?”

“그 합의금이요……. 우선 회사에서 처리해 주시고, 나중에 저희 정산받을 때 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갑자기 마련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라서…….”

소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동시에 벙찐 얼굴이 되었다.

세상에…….

여기 천사, 아니, 호구가 있어!

소진의 오해를 풀기 위해, 김중식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소진아. 이 김중식이를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사장으로 보는 게냐? 합의금을 왜 너희가 물어? 사고 친 건 쟨데.”

김중식이 턱으로 하랑을 가리켰다.

하랑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데뷔조로 올려줄 때는 귀가 닳도록 ‘우리 하랑이, 레몬의 보물’ 이랬던 양반인데, 이제는 그냥 ‘쟤’란다.

류하민은 ‘우리 하민이’하고 치켜세워줬으면서…….

사랑이 식었다 이거지?

망설이던 소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팀이잖아요. 하랑이 혼자서 책임지기에는 액수가 너무 커요.”

“아이고, 소진아! 합의금 물어내라고 부른 거 아냐. 네가 시트러스밤 리더니까, 일 터지기 전에 미리 알고 있으라고 부른 거지.”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꺼낸 김중식은 하랑에게 화살을 돌렸다.

“하랑아. 네가 한번 말해봐라. 내 이미지가 아티스트 등골이나 빼먹을 악덕 사장이냐?”

“네.”

간결하기 짝이 없는 하랑의 대답에, 김중식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하랑이 너……. 이번 계획 실패하기만 해봐. 이 합의금, 네 정산금에서 깔 거야. 십 원짜리 한 장도 DC 안 해줘.”

“아휴, 농담도 못 합니까? 전에도 말했잖아요. 3대 레이블 대표 중에서는 대표님이 그나마 사람 같다고.”

“늦었어, 인마.”

대표와 아티스트가 격 없이 대화하는 것을 본 류하민이 흐뭇하게 웃었다.

신인 아이돌과 대표가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광경은, 수직 문화의 그루밍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류하민이 소진에게 시선을 향하며 물었다.

“소진이라고 했던가? 시트러스밤의 리더?”

“네, 하민 선배.”

“‘오빠’. ‘하민 오빠’. 그렇게 부르기로 하지 않았어?”

소진이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네, 하민 오빠…….’라고 말하자, 하랑이 류하민을 째려보았다.

저 망할 놈이 감히 내 몸뚱이로 사심을 챙겨?

하랑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지 못했는지, 류하민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합의금은 물어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소진이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하랑이가 원곡자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면서요?”

“누가 거짓말이래? 가면가수왕에서 하랑이가 불렀던 노래가 뭔지는 기억하지?”

“아이비트요. 어? 아아!”

돈을 물어줄 생각에 풀이 죽어있던 소진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이비트.

류하민 작곡, 이일재 작사.

그루밍에서 소송을 걸어온다 해도, 작곡가인 류하민이 레몬 엔터의 소속이다.

어쩌면 법적으로 다퉈볼 여지가 있어 보였다.

소진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류하민에게 물었다.

“아이비트가 하민 오빠가 만든 노래니까, 음원 사용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럴 리가. 내가 작곡한 곡이 상업적으로 쓰인 순간, 저작권은 그루밍이 가져가게 돼. 프라이데이는 아이돌 데뷔만 하면 된다는 심정으로, 전속 계약을 불리하게 했거든.”

소진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류하민은 말을 이었다.

“아이비트가 플랫폼에 서비스됐을 때는 난 코마 상태였어. 불행히도 그루밍과의 종속 계약도 이틀 정도 남아있는 시점이었고. 그 짧은 타이밍에 그루밍에서 저작권 등록까지 마쳐 버렸더라고.”

“그 말씀은…….”

“아이비트의 저작권은 법적으로 그루밍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지.”

하랑이 원곡자와 합의를 본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도 없다.

처음과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소진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랑이 손을 뻗어서,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소진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소진이 고개를 돌려 하랑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 하랑이 살포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이비트를 다른 사람이 작곡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죠.”

“응?”

“아이비트의 작곡가가 하민 선배가 아니고, 실제 노래를 부른 사람도 일재 선배가 아니라면……. 그루밍이 가진 저작권은 무효예요.”

소진은 하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비트는 류하민의 뉴스타그램을 통해 공개되었고, 누가 들어도 이일재의 목소리로 녹음된 곡이다.

원곡자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곡이었다.

소진이 대답을 구하려고 눈동자를 굴리다가 류하민과 눈이 마주쳤다.

류하민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 뉴스타그램을 해킹한 사람이 있었어. 아니, 이 경우는 도용이라고 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아이비트는 내가 올린 게 아니야. 당연히 내가 만든 곡도 아니고.”

“그럼 누가…….”

류하민이 턱을 들어 하랑을 가리켰다.

“네 옆에 있잖아.”

하랑이 소진의 손을 보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비트는…….”

소진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고, 하랑이 말을 이었다.

“하민 선배의 인스트 음원을 샘플링해서 제가 만든 곡이에요.”

“네가 만들었다고?”

“네. 일재 선배의 랩 스타일을 흉내 내서 녹음했죠.”

흉내가 아니라, 이일재 그 자체였지만…….

소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일재 선배의 목소리였어. 아이비트가 유행했을 때, 나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고.”

“DAW로 피치를 살짝 조절하면, 여성의 목소리가 남성의 톤으로 바뀌죠. 정말 우연찮게도 제 목소리의 파형이 죽은 일재 선배의 파형과 흡사하더라고요.”

흡사가 아니라, 이일재 그 자체였지만…….

소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하랑의 랩 스타일이 이일재와 비슷하다는 건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하랑이 홀리데이라서, 이일재의 랩 스타일을 멘토 삼아 연습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아이비트의 원곡자가…….”

“네. 저예요. 제가 하민 선배의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올렸어요.”

소진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사고뭉치인 건 알았지만, 이번 사고는 스케일이 달랐다.

“도대체 왜 그랬어!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아?”

아이비트는 ‘이일재의 사망’이라는 이슈를 등에 업고, 모든 음원 플랫폼과 음방을 초토화시켰던 노래다.

모두가 사랑했던 노래가 사실은 이일재의 노래가 아니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하랑의 노래였다는 게 알려지면, 되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자칫하면 하랑이 속해있는 시트러스밤이 휩쓸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랑은 김중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소진 언니한테도 말해줘야 하겠죠?”

김중식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그러라고 불렀으니까.”

하랑의 시선이 다시 소진에게 향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하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 없이 벌인 짓 아니에요.”

말 한마디에 신소진의 어두운 표정이 풀리지는 않았다.

하랑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프라이데이를 끌어내릴 거예요. 내 손으로.”

“뭐?”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알아선 안 돼요. 약속할 수 있겠어요?”

하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신소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러스밤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시트러스밤의 얼굴이자 리더, 신소진.

그녀를 설득해야 이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시트러스밤은 잠시 휘청이겠지만, 신소진이 중심을 잡아준다면 버틸 수 있다.

어쩌면 역풍이 아니라 순풍을 타고 나아갈 수도 있다.

“데뷔조 시절에 파파라치한테서 빼앗아 온 메모리카드 기억나요?”

“리첼 선배랑 같이 찍혀서 열애설 났던? 그거 우리한테 안 보여줬잖아.”

“그 메모리카드에 내가 찍힌 사진 말고, 다른 인물의 사진들이 있었어요.”

“다른 인물?”

하랑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언니도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아는 사람? 누구?”

하랑이 씁쓸하게 웃고는 이내 입꼬리를 내렸다.

“태을선. 그리고…… 프라이데이의 강효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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