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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241화 (241/376)

241화. 악인도 누군가에겐 호인이다 (5)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희영 언니. 이따 저녁에 다시 봅니다.”

신옌이 조희영을 살포시 안으며 말했다.

희영도 신옌의 등을 두드리며 화답했다.

“그래, 저녁에 보제이. 양보는 안 해줄 거구마.”

“양보 필요 없습니다. 트로피는 우리가 알아서 가져갑니다.”

“그랴. 씩씩해서 보기 좋데이.”

희영이 신옌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걸음 물러섰다.

못 본 사이에 린신옌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존감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눈에 띄게 성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룸메이트로 지냈을 때의 어리숙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랑이는 안 나옵니까? 인사는 하고 가고 싶습니다.”

“글쎄……. 꽤 오래 걸리네. 여 있어봐라. 금방 델꼬 나오꾸마.”

희영이 걸음을 옮겨 탈의실 앞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기도 전에, 하랑이 먼저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안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다시 정리했다.

희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토세 의상이 째졌다며? 코디 언니가 고쳐주는 게 안 낫나? 커피 마시러 간다 캤으니까 전화하모 금방 올 기다.”

하랑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상은 괜찮아요. 멘탈이 문제지.”

“갑자기 와? 토세, 어디 안 좋나? 대기실 올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아망뜨 애들 다 내보내고 말씀드릴 테니, 토세는 잠시 혼자 있게 두죠. 억지로 끌어내지 말고요.”

하랑의 시선이 대기실에 들어와 있는 아망뜨 멤버들을 훑었다.

시트러스밤도 폭탄이지만, 저쪽도 만만치 않다.

프라이데이의 걸그룹 판이라고 해야 하나?

그중에서도 저 머리 긴 일본년만큼은 용서가 안 된다.

애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 밝은 성격의 치토세가 비좁은 탈의실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까?

양심이 있으면, 여기 오면 안 되지.

굳이 찾아와서 와서, 실실 쪼개고 있는 건 더 안 되고.

“치토세 거기 있어요?”

리카가 빙그레 웃으며 탈의실로 다가왔다.

하랑이 나서서 막으려고 했지만, 희영이 먼저 리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의상에 문제가 있나 보다. 아무래도 담에 봐야겠데이.”

“잠깐 얼굴만 볼게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요.”

리카가 막무가내로 지나가려 하자, 희영이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았다.

“당돌한 가시내네? 만나기 힘들다 카는데 억지를 부렸쌌노? 을선 언니예, 야 좀 데려가이소. 우리 이제 곧 사녹 들어가야 합니더.”

희영이 태을선에게 눈치를 주자, 을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리카를 불렀다.

“리카. 우리도 사녹 준비해야지. 그만 돌아가자. 인사는 나중에 하고.”

리카가 인상을 구기고 뒤로 돌아섰다.

인성이 그른 년들이 늘 그렇듯, 항상 불필요한 뒤끝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うざい。(짜증나.)”

갑작스럽게 리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일본말에 모두가 벙쩌 있었다.

억양을 봐서는 욕설의 뉘앙스가 느껴졌지만, 이곳에는 치토세를 제외하고 일본어 능통자가 없었다.

레몬 엔터의 커리큘럼 중에는 일본어 교육도 있었지만, 비속어를 가르치진 않는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는 속어 내지는 욕설이다.

하랑은 기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지금 뭐라 했냐? 짱개 새끼야?’

이일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클라우드의 중국인 멤버 웨이가 중국어로 욕설을 뱉었을 때, 하필 이일재가 그걸 알아들었다.

그리고 안면에 주먹을 날렸지.

설마 이번엔 아니겠지?

하랑의 우려를 배신하기라도 하듯, 조희영의 구수한 사투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가시내야. 지금 뭐라 캤노?”

하랑이 본능적으로 희영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일재만큼 불같은 성격은 아니니까,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니, 희영이 움직이면 붙잡을 생각이었다.

하나 움직인 건 희영이 아닌, 체이였다.

애초에 시트러스밤의 싸이코패스는 답변을 들을 생각도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리카의 말총머리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말이다.

“꺄악!”

머리 꼬랑지를 잡힌 리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체이 언니!”

소리를 지른 이나가 말리려고 달려갔지만, 체이의 행동은 빠르고 과격했다.

머리를 잡아챈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리카가 고개를 돌린 순간, 체이의 손이 채찍처럼 날아가 리카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 짜악!

하랑의 시선에는 그 상황이 영화 속의 슬로우 장면처럼 흘러갔다.

아주 잠깐.

속이 후련하다는 생각도 스쳤지만, 그건 정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그다음에는 X 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치토세가 저 일본 계집한테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폭력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꾹 눌러 참고 있던 하랑이었다.

상대가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대형 기획사인 그루밍에서 정식으로 런칭한 걸그룹이다.

그것도 오늘 음방 첫 데뷔로 시트러스밤과 1위 경쟁이 붙은 걸그룹이다.

그런 애들을 상대로 뺨다구를 날린다?

급발진하는 데 이골이 난 하랑이라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안다.

미치지 않고서야 엄두도 못 내는 일이다.

“봉순이! 너 미쳤어!”

샬롯이 체이의 머리채를 잡을 기세로 달려왔고, 그 앞을 이나가 막아섰다.

“지, 진정하세요!”

“비켜! 이 쪼그만 계집애야!”

샬롯이 손톱을 세워서 이나의 얼굴을 할퀴려는 걸 확인하자마자, 하랑이 달려들어 허리에 태클을 날렸다.

샬롯은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 처박혔고, 하랑은 그녀가 엉뚱한 짓을 못하도록 붙잡고 늘어졌다.

상대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하랑의 움직임이 워낙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체이가 씨익 웃으면서 도발을 날린 탓일까?

뭐가 되었든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게 만드는 신호탄이 되기엔 충분했다.

“사과 안 합니까!”

“분홍 머리! 선배 대접해 주니까 정신줄 놨어?”

그렇지 않아도 체이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린신옌과 왕슈란까지 달려들었고, 혜수와 루비가 뒤늦게 그 앞을 막았다.

대기실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뭐 하노! 애들 말리잖고!”

조희영의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소진과 태을선이 뒤엉킨 멤버들을 떼어내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왕슈란이 휘두른 팔꿈치에 혜수가 턱을 맞았고, 광분한 혜수는 슈란의 머리채를 붙잡고 늘어졌다.

“放开! 这个不放开! 疯丫头! (놔! 이거 안 놔! 미친년아!)”

그 와중에, 뺨을 맞고 잠시 패닉에 빠졌던 리카까지 정신을 차렸다.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얽힌 멤버들 사이로, 비릿하게 웃고 있는 체이가 눈에 들어왔다.

“たお前を殺してやる! (죽여버릴 거야!)”

“쪽바리년이 뭐라고 떠드는 거야?”

한중일 3개 국어의 욕설이 대기실에 뒤섞였다.

실로 글로벌한 패싸움이었다.

리카는 기어코 체이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체이 역시 리카의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이나는 리카의 몸에 매미처럼 매달려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이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시트러스밤과 인사시켜 주겠다는 순수한 의도로 아망뜨를 데려왔던 리첼이었다.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지 알았다면, 그냥 매니저한테 맡기는 거였는데…….

후회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얘네들 중 한 사람이라도 얼굴에 흉터가 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너희들 그만 안 둬!”

사자후에 버금가는 목소리에도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전쟁터 한복판으로 뛰어들긴 했는데, 하나같이 노출이 심한 무대의상을 입고 있는지라 손을 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성인지 감수성이고 뭐고 일단 떼어놔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만만한 하랑의 허리에 손을 댔다가 한 소리를 들었다.

“어딜 만져요!”

“니네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그만 좀 해라, 제발…….”

모로 둘러봐도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람은, 하랑에게 깔려있는 샬롯이었다.

숨통이 막힌 것처럼, 샬롯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하랑의 힘이 보통이 아닌 걸 알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리첼은 눈을 질끈 감고, 크롭티를 입은 하랑의 맨 허리를 다시 붙잡았다.

“그만해, 인마!”

“아니, 자꾸 어딜 만지냐고!”

탈의실의 커튼이 슬그머니 젖혀지고, 숨어있던 치토세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밖이 소란스러운 건 들었지만, 이런 난장판이 되어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치토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체이와 리카가 서로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마주치기조차 두려운 니시무라 리카.

치토세가 아이돌 지망생이라는 이유로 중학교 내내 괴롭혀 왔다.

학우들을 선동해서 괴롭혀 왔기에, 치토세는 중학생 시절 내내 친구가 없었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 한국어가 늘지 않았고, 그건 다시 치토세를 따돌릴 이유가 되었다.

체육 시간에 교복을 훔쳐 가서 소각장에 태우거나, 교과서를 빌려 가서 찢고 낙서를 하거나, 먹고 있는 식판 위에 우유를 붓는 건 다반사였다.

학우들 모두가 이지메의 조력자였고, 나이를 먹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뜬금없는 학폭의 주인공이 된 것도 그때의 동창생들이 치토세를 만만하게 본 탓이었다.

더는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는데도, 리카가 대기실로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탈의실로 숨어버렸다.

식판을 엎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구내식당에도 가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편의점 삼각김밥을 입에 욱여넣었던 중학생 때처럼.

한데, 이제는 그때처럼 혼자가 아니다.

나를 위해 발끈하고 싸워줄 친구들이 있다.

앞뒤 안 재고, 내 적들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주는 동료들이 있다.

리카와 싸우느라 머리가 헝클어진 체이가 치토세와 눈을 마주쳤다.

은은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체이의 입이 살짝 열렸다.

‘뭐 해?’

체이가 목소리를 낸 건 아니지만, 치토세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서로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추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체이의 머리 뒤로 밝은 후광이 비쳐 보였다.

치토세가 이를 악물었다.

“이……. 이…….”

그리고 대기실이 떠나가라 외쳤다.

“이 니미랄 문디 가시내야! 으데 큰 언니 머리채를 잡노!”

치토세는 사투리가 섞인 걸쭉한 욕을 한 사발 내뱉으며 리카에게 달려들었다.

이제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는 치토세였다.

리카는 치토세의 목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등 뒤에서 치토세가 말총머리를 사정없이 잡아당긴 탓이었다.

체이의 머리를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서도 힘이 풀렸고, 그 덕에 체이 또한 자유로워졌다.

체이가 잔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 없는 것들은 항상 주둥이가 문제야. 명분을 만들어주거든.”

리카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졌다.

체이의 오른팔이 뒤로 젖혀지더니, 당긴 고무줄을 놓은 것처럼 강하게 리카의 뺨으로 날아갔다.

- 짜아악!

리카의 고개가 번쩍 돌아가고,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스르륵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아! 체이 언니!”

리카를 붙잡고 있던 이나가 대신 비명을 질렀다.

희영과 소진도 달려와 체이를 뜯어말렸다.

머리채를 잡는 건 그렇다 쳐도, 또다시 따귀를 날리는 건 너무 과했다.

“와 이캅니까! 그만 하이소!”

“치토세! 놔! 인제 그만 놔!”

소진이 치토세를 억지로 떼어냈다.

치토세의 손아귀에는 리카의 검은 머리칼이 잔뜩 뽑혀서 엉켜 있었다.

소진과 희영이 기를 쓰고 싸움을 뜯어말린 덕분에, 리카를 제외한 상황은 이미 모두 정리된 상태였다.

산발이 된 왕슈란과 린신옌은 화장대 스툴에 앉아서 씩씩거리고 있었고, 완전히 지쳐버린 샬롯은 소파에 누워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또다시 불을까 봐 태을선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함라희는 화장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있었다.

시트러스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혜수와 루비는 반대쪽 벽에 기대앉아서 손거울을 보며, 혹여라도 얼굴에 다친 곳이 없나 확인했다.

저질 체력인 가나는 진즉에 녹다운되어, 이마에 손을 짚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머지는 체이와 리카, 치토세를 강제로 떼어놓는 중이었다.

대기실의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때였다.

허인수와 배희재가 양손 가득 샌드위치 봉투를 들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JBC의 구내매점에서 뮤직 프론티어 출연자들에게만 판매한다던 화제의 샌드위치였다.

“뮤프 샌드위치 사 왔어. 새벽부터 뭔 줄이……. 이렇게 길…….”

대기실 문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린 허인수는, 샌드위치 봉투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봉투 끝까지 채워져 있던 샌드위치가 바닥으로 후드득 흘러내렸다.

“인수 선배. 안 들어가고 뭐 해요?”

허인수의 어깨너머로 대기실 안쪽을 바라본 배희재도 입을 턱 벌렸다.

아침거리를 사 오겠다고 자리를 비우기 전에는 분명 정리가 되어있던 대기실이었다.

지금은 무슨 태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았다.

소파 위에 정리해 놓았던 가방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테이블 위의 간식거리들은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어? 어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리첼 씨는 여기 왜 계시고요?”

리첼이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후우……. 몰라요. 얘네들한테 물어보세요. 프라이데이랑도 이렇게는 안 싸웠는데……. 독한 지지배들…….”

문득, 허인수가 말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희재 씨……. 회사 가면……. 내 자리, 첫 번째 서랍에 사직서 있어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허인수가 리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리첼 형. 클라우드 아직 매니저 없지? 제발 없다고 말해줘. 나 지금 진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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