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콜라보레이션 (2)
사전 녹화 세트장에 400명의 방청객이 빼곡히 들어찼다.
보이그룹에서나 볼 수 있는 만석을, 시트러스밤은 4주 연속으로 이뤄냈다.
LED 전광판에는 숭례문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크게 떠올라 있었고, 무대 위에는 삼고무에 사용되는 단청북이 소품으로 올라와 있었다.
무대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어렴풋이 이번 공연의 콘셉트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프라이데이의 리더이자 천재 프로듀서로 알려진 류하민이 프로듀싱을 맡은 공연이다.
대대적인 편곡이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전통 음악과 퓨전한 형태로.
예고도 없이 한 시간이나 지체된 사녹이었지만, 감귤단은 녹화 연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평범한 무대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팬들이, 연말 가요무대나 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을 수준의 공연을 직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소한 불만이 있다면, 꼴 보기 싫은 홀리데이들이 사전녹화의 방청권을 나눠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우, 재수 없어. 쟤네는 여기가 프라이데이 공연장인 줄 아나?”
“류하민 피켓을 왜 들고 와서 지랄병이래? 예의라고는 쥐뿔도 없는 년들.”
스탠딩 공연이었기에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무대 앞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좌우로 패가 갈려 싸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대를 기준으로, 왼쪽 객석은 시트러스밤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형광봉과 슬로건 타월이 점령했고, 오른쪽 객석은 프라이데이를 상징하는 하늘색 슬로건이 점령했다.
같은 가수를 응원하러 왔지만, 라이벌 더비라도 열리는 것 같은 희한한 광경이었다.
“밀지 마! 이년들아!”
“뒤로 꺼지라고! 어차피 응원도 안 할 것들이!”
오렌지색과 하늘색의 경계선에는 욕설이 섞인 말다툼까지 벌어졌다.
물리적인 충돌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또한 시간문제였다.
백스테이지에서 대기 중이던 시트러스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홀리데이는, 시트러스밤의 안티를 넘어선 적대 팬덤이었다.
류하민이 SNS로 시트러스밤의 편을 들어주는 바람에 많이 온건해지긴 했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악감정을 가지고 사녹에 찾아온 홀리데이가 없다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하랑, 오늘 녹화 진짜 괜찮을까?”
불안해하는 루비의 등에 하랑이 손을 올렸다.
“불안해도 해야 해요. 오늘 안티들을 떨쳐내지 않으면,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내내 우리를 좀먹을 거예요.”
홀리데이는 잠복기에 들어간 바이러스다.
지금은 대중의 시선이 무서워서 숨죽이고 있지만, 시트러스밤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지는 남아있다.
이 상태로 프라이데이가 해체된다면, 갈 곳 없는 분노가 시트러스밤을 향하게 될 거다.
추앙하던 스타가 사라지면, 팬덤 또한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
왜 시트러스밤을 미워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물어뜯게 되는 거다.
류하민이라는 백신이 들어왔을 때,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하랑이 루비의 등을 쓸어내렸다.
“하민 선배의 바람이에요. 루비 언니가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는 게.”
“하민 선배가?”
“하민 선배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아세요?”
루비가 문득 하랑에게 시선을 향했다.
하랑은 루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와의 열애설을 인정하지 않은 거요.”
‘왜 그런 걸 네가 알고 있느냐?’는 의미가 루비의 눈빛에 담겨 있었다.
- 시트러스밤, 마이크 체크.
인이어를 통해서 음향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트러스밤의 무선 채널이라 모든 멤버가 동시에 들었지만, 루비와 대화하는데 정신이 팔린 하랑만이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인이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한 하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루비 언니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게 류하민의 유일한 소망이에요.”
루비의 눈망울이 크게 떨렸다.
“너……. 너…….”
하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말 한마디에 감명받을 줄 알았다면 진즉 해줄걸…….
놀란 표정을 짓던 루비가 갑자기 이어훅 마이크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를 입에 담았다.
“마이크…….”
“네? 무슨?”
- 네? 무슨?
루비가 눈을 질끈 감고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마이크 켜져 있다고.”
그제서야 귀에 꽂은 인이어에, 자신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랑이었다.
화들짝 놀란 하랑이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멤버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으로 하랑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요란했던 관객들의 목소리 또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어훅 마이크를 움켜쥔 하랑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아니죠?”
아랫입술을 깨문 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무대 스피커를 통해서 하랑의 목소리가 관객석으로 새어 나간 거다.
- 마이크 오프. 마이크 체크 한다는 말 못 들었어요?
인이어를 통해 음향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랑은 얼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으아아……. 미치겠네.”
이번엔 사고를 제대로 쳤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루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홀리데이에게, 대놓고 루비의 이야기를 흘려버렸다.
루비도 어이가 없었는지, 입꼬리를 당기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날 죽이기야 하겠어?”
“미, 미안해! 미안해요!”
조희영이 폭발했다.
대기실에서부터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쪼매난 가스나야! 집중 안 할 끼가! 이 상황 우짤 긴데?”
머리가 하얘져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런 대책 없는 실수는 제 아무리 7년차 아이돌이라도 쉽지 않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랑이 말을 더듬었다.
“마, 말실수는 제가 했으니까, 어떻게든 수습해 볼게요.”
“밖에 분위기 곱창 난 거 모르겄나? 서로 못 잡아 먹어가 웅성거리던 아들이, 이젠 숨소리도 안 들리꾸마! 폭풍전야데이! 폭풍전야!”
그때, 하랑에게 구명줄을 내려주는 목소리가 인이어로부터 들려왔다.
- 너희들끼리 싸우지 마. 스피커만 끊었고, 무전은 다 들려. 내가 먼저 올라가서 수습할 테니까, 신호 하거든 올라와.
“류하민?”
- 너 자꾸 이름만 툭툭 부르지 마라. 난 네 친구 오빠지, 네 친구가 아냐. 그리고 내 허락도 없이 루비한테 불필요한 이야기하는 것도 다 들었어. 넌 진짜…… 녹화 끝나고 보자.
류하민은 공연 도중에 무대 밑에서 리프트를 타고 등장하기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시트러스밤과는 다른 위치에서 스탠바이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깜짝 등장으로 홀리데이를 놀래주려던 류하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뿔이 난 홀리데이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는 데는 당사자인 류하민만큼 적절한 사람은 없었다.
* * *
-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루비 언니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게 류하민의 유일한 소망이에요.
무대 스피커를 통해 시트러스밤의 멤버로 추정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트러스밤이 무대 위에 등장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관객들은 한순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노루비의 이름과 류하민의 이름이 동시에 언급된 탓이었다.
여기 모인 관객의 대부분은, 노루비가 과거에 양혜리라는 이름으로 데뷔를 준비했던 그루밍 연습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류하민과 열애설이 터졌다는 이유로 매장당했다가, 간신히 관뚜껑을 열고 나와 걸그룹으로 데뷔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같은 사안에 대해 감귤단은 연민의 감정을 가졌고, 홀리데이는 혐오의 감정을 가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이거 누구 목소리야? 하민 오빠 이야기가 왜 나와?”
상황 파악이 안 된 관객들이 웅성거릴 무렵, LED 전광판 앞으로 검은 실루엣이 솟아올랐다.
실루엣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오자, 스포트라이트가 실루엣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어……. 그동안 많이 기다렸지?
너무도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홀리데이의 고막에 닿았다.
실루엣의 정체를 알아본 홀리데이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입을 틀어막았다.
프라이데이의 선장 류하민.
그가 죽음마저 이겨내고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왔다.
류하민의 모습을 인식하자마자, 홀리데이의 방청석에서는 절규와도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와 세트장을 가득 메웠다.
- 와아아아!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알 수 없는 대화는 홀리데이의 뇌리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지금 이 순간,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꺄아아! 하민 오빠! 보고 싶었어!”
“류하민! 류하민! 류하민!”
“살아와 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오빠!”
심장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팬들도 부지기수였다.
대부분의 팬들이 신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이비 교단의 신도들처럼, 벅찬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감귤단은 뻘쭘한 표정으로 소심하게 박수를 보냈다.
류하민에 대한 환영이라기보다는,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 돌아온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실로 극심한 온도 차였다.
- 내 정신적 지주 홀리데이. 너희들이 나를 깨워서 이렇게 돌아왔어.
입술에 침 한번 안 바르고, 립서비스를 던지는 하민이었다.
하민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홀리데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눈물을 삼키느라 꺽꺽대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스타의 말 한마디, 숨소리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그것이 홀리데이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짧은 소회를 말하던 류하민이, 비로소 하고자 하는 말을 끄집어냈다.
- 일 년 만에 깨어나 보니까, 정말 많은 게 바뀌어 있더라고. 그중에서 날 가장 슬프게 한 게 뭔지 알아? 일부 사생팬이 홀리데이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거야.
무대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던 하랑이 입을 열었다.
“저 자식, 꽤 하는데?”
홀리데이의 집단 광기를 ‘일부’ 사생팬의 잘못이라고 돌려버렸다.
홀리데이의 수장이 친히 면죄부를 던져준 거다.
‘너희들은 죄가 없고, 몰지각한 일부가 저지른 일이다.’
이 논리는 집단 내부에서는 기막히게 먹힌다.
외부의 평가가 어떻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한테 입을 터는 재능이 있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아이돌이 아니라 종교지도자가 되는 것도 고려해 봤을 텐데…….
- 시트러스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룹이야.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
하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자식, 잘나가다가 왜 삼천포로 빠져?
설마 여기서 노루비와의 열애설을 터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거 급발진이야, 인마!
하랑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노루비가 눈에 밟혔다.
하랑과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서두를 뗀 류하민의 말에, 홀리데이 역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스타가 갑자기 연애 선언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류하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전혀 엉뚱한 이름이었다.
- 류이나. 내 여동생.
세상에…….
여태 왜 그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저 가짜 류하민은, 하랑이 사용할 수 없는 완벽한 카드를 한 장 가지고 있었다.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가족이라는 카드 말이다.
류이나는 홀리데이가 시트러스밤을 응원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 수 있다.
반대로, 감귤단이 류하민을 응원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 수도 있다.
이름뿐인 남매 아이돌이 아닌 혈연으로 맺어진 남매 아이돌이다.
그뿐만 아니라, 류하민이 레몬으로 이적해야 할 정당한 이유도 만들 수 있다.
프라이데이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일부 사생팬’에게 공격을 받은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건 오직 류하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다.
- 시트러스밤에는 내 동생 이나가 있어. 식물인간인 오빠를 지극정성으로 간병해 준 아이야. 아마 이나가 없었더라면, 난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거야. 물론 홀리데이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기적도 없었겠지.
이나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오빠도 참……. 왜 그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해?”
은근히 기뻐하는 이나에게, 체이가 찬물을 끼얹었다.
“좋아할 거 없어. 저 멍청한 팬덤을 선동하려고 저러는 거야.”
하랑이 이나 대신 체이를 째려봤다.
“못된 말 좀 그만해요.”
“내 말이 맞아.”
그래, 니 말이 맞다.
인간성이 메말라 비틀어진 분홍 대가리 같으니.
- 오늘 무대는 내 복귀 무대야. 그리고 내 동생이 속해있는 시트러스밤과의 합작 무대지. 의식 있는 홀리데이라면 우리를 응원해 줄 거라 믿어. 정말 열심히 준비했거든.
류하민은 자신과 시트러스밤을 ‘우리’로 묶었다.
그리고 홀리데이와 사생팬을 분리해버렸다.
오후가 되면 여기 있는 홀리데이들이 류하민의 입장을 열심히 퍼다 날라 줄 거다.
어떻게 해야 홀리데이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는 애초에 없었다.
류하민에게 무대 인사를 시키면 전부 해결될 일이었다.
-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녹화가 많이 지체됐어. 사녹 끝나고 나서 팬미팅을 할 거니까 딴 데 가지 말고 광장에서 기다려 줘. 그래줄 수 있지?
- 네에!
홀리데이의 대답이 합창을 하듯 울려 퍼졌다.
류하민이 살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거의 동시에 시트러스밤 전 인원의 인이어에 무대 감독의 무선이 들려왔다.
- 시트러스밤, 무대 위에서 스탠바이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