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292화 (292/376)

292화. 비쥬 레이디스 (2)

검은색 중형차 한 대가 ‘도담 어린이집’이라는 간판이 설치된 노란색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젊은 여성이 서둘러 뒷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었고, 이윽고 밤색 양복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밤색 양복의 사내는 건물의 간판을 올려다보고는,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맞아?”

“맞습니다. 최소영 씨는 연예계 은퇴 이후에 이곳,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밤색 양복의 사내는 다름 아닌, 포스트 뮤직의 이문학 대표였다.

그리고 이문학의 질문에 대답하는 젊은 여성은 포스트 뮤직의 비서실 직원이었다.

이문학이 턱짓으로 어린이집 입구를 가리키자, 눈치 빠른 여비서가 앞장서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입구에서 인터폰의 호출 벨을 누르자, 스피커를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떻게 오셨어요?

“최소영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잠시만요.

스피커에서는 ‘소영 쌤, 누가 찾아왔는데?’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작게 이어졌다.

잠시 후, 어린이집의 문이 열리며,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노란색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차림새는, 아이를 둔 모든 부모님이 바라는 이상적인 유치원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민 여성은, 이문학과 그의 비서를 경계심이 가득한 눈길로 번갈아 훑어보았다.

“제가 최소영인데……. 무슨 일로 오셨죠?”

“최소영 씨.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비서가 말하자 최소영은 난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 애기들 점심시간이라 바쁜데……. 절 찾아오신 거 맞나요?”

이문학이 말없이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최소영에게 내밀었다.

이문학의 험악한 인상에 기가 눌린 최소영은,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받아 들었다.

[포스트 뮤직 대표 이문학]

명함의 내용을 확인한 최소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 않은 세상의 사람들이다.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명함이 살짝 구겨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관심 없어요.”

최소영이 안쪽으로 돌아서서 문을 닫으려 하자, 이문학이 문고리를 꽉 붙잡았다.

“비쥬 레이디스 막내. 맞지?”

“이젠 관계없어요. 저는 더 이상 아이돌도 아니고, 평범한 어린이집 교사예요.”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

“할 말 없다니까요.”

다시 문을 잡아당겼지만, 이문학이 붙잡고 있는 문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최소영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를 거예요.”

“그러든지. 여기 어린이집 원장은, 최소영 씨가 정신과 치료받은 사실은 알고 있나? 피해망상이었지, 아마? 나한테 손자가 있었다면, 이 어린이집에는 못 맡길 거 같아.”

최소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어린이집 안으로 회피하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아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아버렸다.

“포스트 뮤직은 대표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네요. 치졸한 협박질로 사람 옥죄는 건, 그 회사 전통인가 보죠?”

비릿하게 웃은 이문학이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샬롯이 회사에 남은 건 알고 있지?”

“아뇨. 덕분에 지금 알았네요. TV도 안 보고, 인터넷도 안 해요. 그쪽 세상에는 어떤 관심도 두지 않기로 다짐했어요.”

“샬롯은 지금 아망뜨라는 걸그룹에 속해있어. 비쥬 레이디스 때보다 더 유명해졌지.”

최소영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잘됐네요. 전 애기들 배식하러 가야 돼요. 바쁘니까 용건만 이야기하세요.”

“비쥬는 회사와 합의하에 해체를 결정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해체할 이유가 없었단 말이지. 수익도 꾸준히 나고, 그룹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어. 계약 기간도 1년 넘게 남아있었고.”

이문학이 은근슬쩍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자, 최소영이 먼저 담배를 낚아챘다.

“여기 어린이집인 거 안 보이세요?”

“아, 미안. 사과하지. 습관이 돼놔서……. 나이를 먹으면 가끔, 사리 분별을 못 하는 경우가 있어.”

최소영은 담배를 구겨서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비쥬가 악성 루머 때문에 활동을 접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텐데요.”

“막내를 괴롭힌 게 들통 날 거 같으니까, 강제로 기자 회견시키고 덮었다는 소문도 있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룹을 해체했을 가능성도 있는 거지.”

“헛소문이에요. 그 기자 회견에서는 사실만 이야기했어요. 전 따돌림 당하지 않았어요.”

이문학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최소영을 바라보며, 턱의 흉터를 문질렀다.

“샬롯도 그렇게 말하더군. 걔야, 당장 활동하고 있으니까, 과거의 일이 다시 까발려지는 게 싫겠지.”

이문학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최소영은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잘 아시네요. 과거가 다시 언급되는 게 싫은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조용히 살고 싶어요.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최소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이문학이 팔을 뻗어 문이 열리지 않도록 막았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이문학이 비서에게 손을 내밀자, 비서는 재빨리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받은 이문학은, 시선을 여전히 최소영에게 둔 채로 서류의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 도달하자, 최소영에게 서류를 넘겼다.

“비쥬의 해체를 합의한 양해각서 사본이야. 포스트의 전(前) 대표가 보관하고 있었지. 이건 언론에 공개된 적도 없어.”

“회사랑 미리 합의한 게 잘못이라는 건가요?”

“잘못은 아니지. 그런데, 딱 한 사람의 서명이 없더군. 체이의 서명 말이야.”

문서의 서명란에는 다섯 명이 아닌, 네 명의 서명만이 존재했다.

최소영의 표정이 굳었다.

“양해각서잖아요. 어차피 법적 효력이 없는 문서였어요. 공식 합의서에는 비쥬들이 전부 모여서 다시 서명했고요.”

“더 흥미로운 건, 양해각서가 작성된 날짜야. 이 각서는 왕따 루머가 터지기, 일주일 전에 날인됐어. 중요한 문서에 날짜를 착각해서 적은 건 아닐 테고……. 루머 때문에 해체한 게 아니라, 해체를 결정짓고 난 후에 루머가 터진 거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데?”

“샬롯 언니한테 물어보세요. 아직 회사에 남았다면서요?”

이문학이 앞니를 드러내고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것도 확인 않고, 널 찾아왔을까? 최소영.”

최소영이 미간을 찌푸렸고, 이문학은 계속해서 그녀를 압박했다.

“체이는 비쥬 레이디스를 계속 유지하길 원했다더군. 체이를 배제하고, 그룹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던 건 나머지 멤버들이고. 샬롯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일거리를 독점하는 체이가 얄미웠다는 터무니없는 변명을 지껄였지. 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아.”

“다 지난 일이에요.”

“너희 넷과 포스트 뮤직은 비쥬를 해체하려고 했어. 회사의 유일한 캐시카우(Cash cow)를 해체하는 건, 결코 정상적인 결정이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지.”

이문학이 최소영의 눈빛을 읽으며 말을 이었다.

“비쥬 레이디스에는 회사의 존폐와, 너희의 가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었을 거야. 그게 체이였나?”

최소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문학은 확신을 얻었다.

“최소영. 네가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것도 체이 때문인가? 피해망상에 시달린 것도 체이 때문이고? 그룹 내 따돌림도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최소영은 패닉에 빠진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었으니까.

이문학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전(前) 대표가 체이를 어째서 레몬 엔터에 떠넘겼는지 알겠군.”

포스트 뮤직이 체이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면, 그룹 내 따돌림은 결국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멘탈이 약한 최소영이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기자 회견 직전까지도 루머는 확대 생산되는 중이었고, 언론은 최소영이 치명적인 폭로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사실무근’이라는 이름의 김빠진 콜라가 나왔지만 말이다.

당시에 체이는 수많은 중견기업의 광고 모델이었고, 논란을 일으켜 이미지가 실추되면 막대한 위약금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체이 본인은 물론, 소속사인 포스트 뮤직이 함께 파산한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쥬 레이디스가 가져다줄 미래의 수익보다, 물어야 할 위약금이 많다는 걸 깨달은 포스트 뮤직은, 진실이 알려지기 전에 그룹을 해체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거다.

체이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도 회사의 설득에 넘어갔을 테고.

이대로 논란에 휩싸이고 주홍글씨가 새겨지느니, 뿔뿔이 흩어져서 솔로로 재데뷔하거나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문제의 근원인 체이는, 협업의 형태로 레몬 엔터에 던져졌다.

레몬 엔터는 체이가 자사와 재계약한다는 조건으로, 꽤 비싼 값을 치르고 체이의 이적을 수락했다.

매물로 나온 블루칩을 거둬들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당시의 A&R 부서 수장이 레몬 엔터의 이사로 앉아있던 이문학이었다.

체이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빠르게 인지하고, 데뷔조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는 시트러스밤이 망하길 바랐으니까.

그 대가로 이문학은 포스트 뮤직의 주식을 리베이트로 양도받았고, 결국에는 포스트 뮤직까지 먹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게 체이가 일으킨 나비효과였다.

이제는, 의도치 않게 받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을 시간이다.

남의 새끼를 죽이면 자기 새끼도 죽는다는 사실을, 김중식도 알아야 한다.

“최소영. 너에게 연예계로 돌아올 기회를 주마.”

이문학의 돌발적인 발언에, 마구잡이로 흔들리던 최소영의 눈동자가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최소영이 반응을 보이는 걸 확인한 이문학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 한 자리가 비었어. 비쥬 레이디스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걸그룹에 널 영입하도록 하지.”

“그게 무슨…….”

“널 연예계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원흉도 제거될 거야.”

최소영은 물끄러미 이문학을 바라보았다.

이문학이 말을 이었다.

“날 위해서 딱 하나만 해주면 돼. 그거면 체이를 매장할 수 있어. 2년 전의 너희가 해야 했던 일이지.”

2년 전에는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체이라는 폭탄은 포스트 뮤직이 아닌, 레몬 엔터의 품에서 폭발한다.

한참을 말없이 이문학을 바라보던 최소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기다렸던 질문이 나오자, 이문학은 최대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기자 회견. 2년 전에 비쥬 레이디스에서 있었던 일을 폭로해.”

“사람들 앞에 서라는 건가요?”

“무대에서 환호받는 게 아이돌의 숙명이야. 어린이집 교사로 인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잖아?”

최소영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이문학은 한발 물러섰다.

“마음이 결정되면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해. 아망뜨에 네 자릴 마련해 두고 기다릴 테니까.”

이문학이 돌아서자, 그의 비서 또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둘은 타고 왔던 중형차에 다시 올랐고, 중형차는 이내 최소영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멀어지던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최소영은 구겨진 명함을 다시 펴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전 대표는 변태 새끼였는데, 이번 대표는 쓰레기 새끼네.”

최소영은 어린이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아 으슥한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어귀에서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최소영도 그 근처로 다가가, 앞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이문학에게 빼앗은 담배가 손에 잡혔고, 꺼내서 망설임 없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태우고 있는 고등학생을 불렀다.

“야, 이리 와봐. 불 있냐?”

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라이터에 불을 댕기자, 최소영은 깊숙이 숨을 들이쉬며 담배 끝에 불씨를 만들었다.

학생은 담배에 불을 붙여준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최소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기……. 혹시…….”

“니가 생각하는 그 사람 아니야. 가서 네 친구들이랑 도너스나 만들어.”

학생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섰고, 최소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체이 언니. 오랜만이야. 거진 2년 만이지? 누구긴 누구야? 내 전화번호 지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