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게티아 닷컴 (4)
오후부터는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체이는 발코니에 기대서 멍하니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랑은 주방 찬장을 뒤져서, 치토세가 숨겨놓은 아몬드 음료 두 개를 꺼냈다.
머그컵 뒤에 교묘하게 숨겨놓았지만, 치토세의 습성을 알고 있는 하랑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충 많아 보이니까, 두 개쯤 없어져도 잘 모를 거다.
음료를 들고 베란다로 다가가니, 체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하랑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체이도 가을 타요? 뭘 그렇게 사색에 빠져있어요?”
“생각 좀 하고 있었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베란다로 나온 하랑이 거실과 연결된 창틀 문을 닫았다.
아홉 명의 멤버가 왁자지껄하게 모여 사는 숙소에서는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기 힘들다.
단둘이 대화를 나누려면, 그나마 만만한 장소가 베란다다.
그게 싫으면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좀 더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택시를 타고 사옥으로 가야 한다.
일부 멤버를 숙소에서 독립시키겠다는 회사의 결정이, 마냥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하랑이 아몬드 음료 하나를 체이에게 내밀었다.
“정말로 독립해요? 체이, 혼자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안 나가겠다고 버티면, 대표님도 막무가내로 내보내진 않았을 텐데요.”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
대표와의 면담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걸까?
체이의 표정에는 대체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어둡게 느껴졌다.
“설마……. 자의로 나가는 게 아니에요?”
체이가 음료를 따서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고가 아니라, 사실상 퇴거 명령이었어. 어쩌면 숙소가 아니라, 팀에서 나가게 될지도 몰라. 레몬 엔터는 지금, 내 탈퇴 절차를 밟고 있는 거야.”
하랑은 당황했다.
김중식은 체이와 혜수를 숙소에서 독립시킨다고 했지, 쫓아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까는 그런 말 없었잖아요.”
“멤버들이 전부 알 필요는 없잖아. 괜히 위로한답시고 돌아가면서 빈말 던지는 거. 난 딱 질색이야.”
“이건 너무 뜬금없잖아요. 체이가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팀의 주축이 되는 멤버를 예고도 없이 쳐내다뇨? 구멍가게에서 알바 자를 때도 그렇게는 안 해요.”
체이는 하랑과 눈을 마주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레몬 엔터 입장에서는 이게 예고야. 유예 기간을 주잖아. 임시로 살 곳도 마련해 주고.”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요?”
“비쥬 레이디스의 막내가 이문학의 손에 들어갔어. 곧 있으면 샬롯하고 같이 기자회견을 열 거야. 리카가 탈퇴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날 묻어버리려는 거겠지.”
하랑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리카가 아망뜨를 탈퇴했을 때는, 이문학이 의외로 깔끔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문학은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려야 한다.’는 연예계의 룰을 철저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만큼, 기세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걸 아는 거다.
이것도 리카의 학폭 사건만큼이나, 치명적인 이슈다.
정말로 체이가 비쥬의 막내를 괴롭혔다면, 시트러스밤은 이미지의 타격을 입고 체이는 퇴출당하게 된다.
체이가 곤혹스러워하는 하랑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내가 쌓은 업보가, 뒤늦게 내 발목을 잡는 거야. 이 정도면 꽤 많이 해 먹었지.”
비쥬 레이디스의 어두운 그림자가 기어이 체이를 쫓아왔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매력을 가진 멤버들.
행사비를 갈취하는 것도 모자라, 성 접대를 권유하는 기획사.
메이저가 아니면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는 방송사.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팬덤.
의상 협찬도 없고, 지정 샵도 없고, 나아질 거라는 희망조차 없었다.
비쥬가 들고 있는 무기라고는, 표절이 의심되는 타이틀곡 하나와 아마추어 댄서가 만들어준 50만 원짜리 안무가 전부였다.
체이는 그런 비쥬를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악마와 계약을 통해 인간성까지 상실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인간들을 전부 치워버리고, 위로 올라가는 데 필요한 인간들은 죄다 협박했다.
철두철미하게 일 처리를 했지만, 체이도 인간인 이상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적이 없기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정말로 체이가 한 거 맞아요?”
하랑의 물음에 체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멤버를 괴롭힌 걸 묻는 거라면……. 맞아. 내가 그랬어.”
설마 하는 대답이 체이의 입에서 나오자, 하랑은 숨이 턱 막혔다.
왜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체이는 그저, 악마와의 계약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죄악을 덮어버리기엔, 체이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체이는 하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언젠가는 발목을 채여서 넘어지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체이가 한 짓이 폭로되면 다 끝장이라고요. 그건 김중식 대표 할아버지가 와도 수습 못 해요.”
“폭로는 없어. 막내는 이문학한테서 거마비만 챙기고, 기자회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그 애는 내 편이거든.”
“네?”
체이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아무래도 막내들한테 끌리는 취향을 가졌나 봐. 너도 그렇고, 소영이도 그렇고. 내가 비쥬에서 유일하게 아끼던 아이가 최소영이야. 비쥬의 막내.”
하랑이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막내를 아꼈다고요? 아까는 괴롭혔다면서요? 사디스트(Sadist)세요? 아끼는 사람을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는? 미리 말해두는데, 난 그런 취향 아니에요.”
체이가 피식 웃었다.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프네. 남을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는 건 맞는데, 그 대상은 소영이가 아니었어. 나율이었지.”
“나율? 비쥬 레이디스 리더, 나율을 말하는 거예요?”
“맞아, 그 나율. 비쥬 레이디스의 어그로 담당. 노래 못한다고 욕먹고, 못생겼다고 욕먹고, 나이 많다고 욕먹고. 심지어 왕따 루머가 퍼졌을 때도, 핵심 주동자로 의심받았지. 한사람에게 쏟아지는 혐오가 과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어그로 담당.
일명 욕받이.
인재 풀이 적은 기획사에서, 다른 멤버들의 비주얼이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팀에 넣는 멤버다.
독특한 개성과 콘셉트 때문에 갑자기 인지도가 오르는 경우도 있고, 연예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렇다 할 관심조차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비쥬의 나율은 명백한 후자였다.
본인에게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는데, 팀이 뜨는 바람에 얼떨결에 주류로 올라온 케이스.
비쥬가 역주행했을 때에도, 나율은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외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보컬 실력.
무대에서의 잦은 실수.
포토타임에는 그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팬이 없었고, 팬 사인회에서는 그녀 앞에 줄을 서는 팬들이 없었다.
체이는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마냥 웃으며 말했다.
“그거 다, 포스트 뮤직의 바이럴 마케팅이었어. 일부러 혐오를 부추겼지. 비쥬의 언급이 많이 될수록 대중의 관심도는 올라가니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못돼먹은 회사네요.”
“그 바이럴 마케팅. 내가 포스트 뮤직에 제안한 거야. 역주행에 속도를 붙이려면 희생양이 필요했거든.”
하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체이를 바라봤다.
하랑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체이는 격이 달랐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동고동락하는 멤버마저 지옥불에 던져버리는 사이코패스였다.
“아, 좀……. 나, 막 체이가 미워지려고 하는데? 나율이 리더였잖아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
“당연히 후회하고 반성해야죠.”
“기회가 왔을 때, 완전히 보내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반성하는 방향이 틀려먹었잖아.
이 분홍 대가리, 아직도 인간이 덜된 거 아냐?
체이가 말을 이었다.
“나율은 비쥬가 데뷔했을 때부터 나와 막내를 못살게 괴롭혔어. 난, 내가 벌인 일이 응당한 복수라고 생각해. 나율은 비쥬와 함께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었어.”
하랑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련하시겠어요…….”
“이문학은 내부고발자를 잘못 골랐어. 날 묻어버리고 싶었으면, 막내가 아니라 나율을 데려갔어야 해.”
“잘 기억해 뒀다가, 체이 묻어버리고 싶을 때 참고할게요.”
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화제를 바꿨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 했는데, 게티아 닷컴에서 문자가 왔어요.”
* * *
“저도 차 한 대 사야겠어요.”
하랑이 체이의 스포츠카 조수석에 오르며 말했다.
어디로 가려는 건 아니었고, 멤버들의 눈을 피해서 체이와 대화를 나눌 장소가 필요했다.
이제부터 나누는 대화는 멤버들이 이해할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대화였다.
숙소 주차장에 세워둔 체이의 차량이 그나마 비밀 대화를 나누기에 괜찮은 장소였다.
하랑이 차량 이곳저곳으로 고개를 기웃거리자, 체이가 물었다.
“하랑, 운전할 줄 알아?”
“당연히 알죠. 운전 경력만 몇 년인데……. 시간 내서 면허만 따면 돼요.”
“몇 년이라…….”
체이가 말을 줄였다.
체이의 표정을 살피던, 하랑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체이. 설마 나 누군지 몰라요?”
예상치도 않은 질문이었을까?
체이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체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반대쪽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른다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체이였다.
이건 좀 충격이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체이는 이 몸뚱이에 엉뚱한 영혼이 들어와 있다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똥 마려운 개처럼 한참을 망설이던 체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누군지 알아.”
그럼 그렇지.
하랑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휴우…….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르는 척이에요? 나 운전하다 사고 난 거,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리고 하랑은 깨달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서 왜 계속 반말이지?
나는 어째서 지금껏 존댓말을 하고 있고?
하랑이 체이를 지그시 노려봤다.
체이는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넌 하랑이야. 다른 사람 아냐.”
“하랑이죠. 하랑이 맞긴 한데……. 지금은 겉모습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데?”
이 분홍 머리, 내가 누군지 진짜로 모르는 거 아냐?
하랑이 체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체이. 내가 오빠인 건 알지…… 요?”
존댓말이 입에 배서, 갑자기 말을 놓기가 쑥스럽다.
그제서야 체이가 하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는 무슨. 넌 그냥 하랑이야. 그 외에는 알고 싶지 않아.”
“난 류……. 웁!”
체이가 별안간 손을 뻗어, 하랑의 입을 막았다.
“말하지 마. 말하면 너 다시는 안 볼 거야.”
체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얘도 부끄럼이라는 걸 타나?
억지로 입이 봉해진 하랑이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가 손을 거두자, 하랑이 입가를 닦으면서 투덜거렸다.
“나 누군지 아는 거 맞아요?”
“알아.”
“알면,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잖아요. 최소한 둘이 있을 때는 말을 놓자고요.”
체이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하랑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가 언니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요?”
“꼬박꼬박 존댓말 써. 넌 누가 뭐래도 시트러스밤 막내 이하랑이야. 마음속에 있는 그 이름은 지워.”
“에이 씨……. 진짜…….”
은근슬쩍 서열 정리를 해보려다가 실패했다.
입술을 삐죽 내민 하랑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렸다.
“혜수는 말 놓게 해줬으면서……. 내 나이가……. 웁!”
체이가 다시 하랑의 입을 막았다.
상하 관계에 혼동을 주는 모든 정보를 막아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이하랑. 19살. 너한테 다른 이름, 다른 나이는 없어.”
“아우……. 입에 손가락 들어갔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하면, 너 안 본다고 경고했어.”
“완전 폭군이야, 폭군.”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지금은 분홍 머리를 거스를 때가 아니었다.
하랑은 노트북을 펼쳐, 게티아 닷컴에 접속했다.
오직 괴담 게시판 하나만 운영하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홈페이지다.
이놈들이 강탈해 간 2,500만 원이면, 똑같은 홈페이지 다섯 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화면 상단의 로그인 창에 아이디와 비번을 넣고 접속했다.
3초 정도 기다리자, 채팅창으로 보이는 인터페이스가 화면 한가운데 나타났다.
채팅창 오른쪽에는 채팅 참가자로 보이는 아이디 두 개가 떠올라 있었다.
[horang2]
[Crowley]
하나는 하랑의 아이디였고, 또 다른 하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아이디였다.
하랑이 화면을 가리키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체이. 원래 이게 다예요?”
체이도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만 껌벅이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접속했어?”
“접속을 했으니까, 화면이 바뀌었겠죠?”
체이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렷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역시 그렇네. 난 도와줄 수가 없어.”
체이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동안, 채팅창에 처음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 외의 존재는 크로울리의 개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핸드폰으로 왔던 문자 메시지와 동일한 내용이다.
오대식은 이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설마 체이도 보지 못하는 건가?
『크로울리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랑이 자판을 두드렸다.
『넌 누구지?』
『크로울리에게서 답을 얻으려면, 신용카드 등록이 필요합니다. 신용카드 등록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하랑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놈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놈은 영혼을 훔쳐가거나, 정신을 파괴하는 악마보다 더 끔찍한 악마임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