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게티아 닷컴 (5)
하랑은 지갑에서 신용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터넷 쇼핑 용도로 최근에 만들었지만, 정말로 불가피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체이도 신용 카드 등록했었어요?”
하랑이 묻자, 체이가 곰곰이 기억을 되새겼다.
“아니. 나 때는 가상화폐로 받았던 것 같은데……. 코인 같은 것들 있잖아.”
“근데 나한테는 왜 신용 카드를 요구하는 거지? 지금 화면에 신용 카드 등록 창이 떴거든요?”
“하랑한테 돈이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러는 거 아닐까?”
하랑은 크게 탄식했다.
게티아 닷컴 뒤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른오징어에서 물기를 짜내는 놈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랑이 웹페이지에 카드 정보를 입력하면서 말을 꺼냈다.
“크로울리라는 놈. 이놈도 악마죠?”
“글쎄……. 정체를 알 수는 없어. 다만 악마와 버금가는 존재라는 추정만 가능하지. 정식으로 계약을 하지도 않고, 힘을 빌려주지도 않아. 대가를 받고, 악마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존재야. 페널티도 없고, 리바운드도 없어.”
“페널티가 없어요? 대놓고 날 알거지로 만들려는 중인데?”
“게티아 닷컴은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대가만 받아가. 내가 가입했을 때의 연회비는 100만원이 조금 안됐었어. 내 통장의 잔고가 딱 그 정도였지.”
하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란 게,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말하는 거냐?
참으로 인정머리 넘치는 악마네.
체이가 말을 이었다.
“필요하지 않다면 언제든 멈춰도 된다는 의미야. 게티아 닷컴은 다른 악마들처럼 해코지하지는 않아.”
“차라리 해코지를 하라고 하세요. 인간에게 진정으로 무서운 게 뭔지, 정확히 아는 놈이에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이 가장 부담 없이 게티아 닷컴을 이용할 수 있는 시기라는 거야. 시트러스밤은 계속해서 수익을 벌어들일 거고, 네 통장에는 계속 돈이 쌓일 거야.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게티아 닷컴도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되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이 되면 이용하고 싶어도 이용할 수 없어.”
“체이도 연회비가 밀렸어요?”
체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십수 억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현실적인 문제가 생겨. 게티아 닷컴이 요구하는 금액은 주식, 채권, 부동산을 포함하거든. 현금화를 하기 힘드니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그런 이유로, 난 더 이상 게티아 닷컴을 이용하지 못해.”
“쓸데없이 현실적이네. 이놈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도 힘들단 이야기잖아요. 국세청 직원하고 계약하면 딱 어울릴 녀석이구만.”
카드 정보를 모두 입력한 하랑이 확인 버튼을 누르자, 다시금 이전의 채팅창 화면이 떠올랐다.
『결제 정보 등록에 감사드립니다. 크로울리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 다시 떴어요. 채팅창.”
채팅창 위로 한 줄의 메시지가 더해졌다.
『모든 질문에는 질문의 가치에 상응하는 요금이 부과됩니다.』
역시나 공짜가 아니다.
하랑이 헛바람이 섞인 탄식을 뱉고는 입을 열었다.
“질문할 때마다 돈이 나간다네요. 한결같이 악독한 놈들…….”
“쓸데없는 질문은 가급적이면 하지 마. 그 당시엔 나도 꽤 부담스러웠어.”
“오케이. 일류 변호사 상담료라고 생각하죠, 뭐.”
하랑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겨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야?』
『악마숭배자, 크로울리입니다.』
뭐지?
이 성의 없는 대답은?
- 위잉.
갑작스럽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스팸 메시지가 왔겠거니 생각한 하랑이 다시 자판을 두들겼다.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야. 네 정체가 뭐냐고 물어본 거지. 날 지켜보고 있는 거 맞지?』
『크로울리는 광학 기기와 음향 기기를 통해서 당신을 지켜보거나,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1시 방향의 주차장 CCTV. 정면에 주차된 스타카토 차량의 블랙박스. 노트북에 부착된 전면 카메라. 당신의 핸드폰 마이크.』
스토커 악마에 이어서 관음증 악마인가?
하랑은 노트북 상단에 달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초월적인 힘을 사용해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현대 문물에 의지하고 있다.
오대식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엘리베이터의 감시 카메라로 지켜보고 있었을까?
대체 이놈의 정체가 뭐지?
- 위잉.
또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제서야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한 하랑의 표정이 바짝 얼어붙었다.
[JB행복카드 해외 결제 <게티아 닷컴> KRW 1,000,000 승인]
[JB행복카드 해외 결제 <게티아 닷컴> KRW 285,400 승인]
“어?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무슨 일인데?”
채팅창을 보지 못하는 체이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묻자, 하랑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도…… 돈이요. 딱 두 번 물어봤는데, 이 사기꾼이 백만 원 넘게 뜯어갔어요!”
“뭘 물어봤길래?”
“정체가 뭐냐? 날 지켜보고 있냐? 일상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잖아요!”
체이가 혀를 끌끌 찼다.
“그래서 내가 쓸데없는 거 묻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 분홍 머리한테 공감을 바란 내가 등신이지.
하랑이 분노를 삼키며 다시 자판을 두들겼다.
『넌 돈값을 해야 할 거야.』
『크로울리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평범하게 건네는 말에 대해서는, AI처럼 정의된 문장을 반복해서 출력하는 것 같았다.
하랑은 잃어버린 돈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지우며, 다음 문장을 작성했다.
『안드라스의 리바운드를 피할 방법을 알고 있어?』
안드라스 본 그란.
체이에게 리바운드를 선사한 올빼미 악마의 진명이다.
하랑이 게티아 닷컴에 접촉한 이유이기도 했다.
크로울리의 짧막한 채팅이 올라왔다.
『네.』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였다.
[JB행복카드 해외 결제 <게티아 닷컴> KRW 10,800 승인]
‘네.’라는 대답 한마디를 하고, 또 만원을 가져갔다.
하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 돈 귀신 악마 놈아. 융통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냐? 알고 있으면 대답해 달라는 말이잖아! 니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고!”
핸드폰 마이크를 통해서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하랑의 말을 반박하는 듯한 메시지가 채팅창에 올라왔다.
『크로울리는 악마가 아닙니다. 악마숭배자입니다.』
“내가 알 바냐?”
하랑이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씹으면서, 다시 자판을 눌렀다.
『안드라스의 리바운드를 피할 방법을 알려줘.』
『크로울리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질문에‘만’ 대답하겠다는 뜻이다.
‘질문’에 대답하고 돈을 뜯어 가는 게, 이 악마 같은 돈귀신의 원칙인 모양이다.
“와, 이런 만들다 만 AI 스피커 같은 악마를 봤나…….”
하랑은 문장을 의문형으로 고쳐서, 다시 메시지를 띄웠다.
『안드라스의 리바운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뭐야?』
『안드라스를 현세에서 추방하십시오. 악마가 추방되면, 현세에 적용된 모든 권능과 저주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답과 ‘위잉’ 하는 핸드폰 진동이 돌아왔다.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차마 핸드폰 메시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말은 쉽네. 그러니까 그 추방이라는 걸 어떻게 하는데?』
질문을 하자마자 답이 올라왔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쩐지 답을 주기를 머뭇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악마가 현세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악마를 현세에 묶어둘 닻이 있어야 합니다. 보통은 계약자가 닻의 역할을 합니다.』
크로울리의 채팅이 이어졌다.
『닻이 사라지면, 악마는 현세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유일한 계약자의 죽음 또는 소멸을 의미합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체이가 죽기 전에는 올빼미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인가?
하랑이 멍하니 체이를 바라보자, 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번엔 뭘 물어봤는데?”
하랑이 애써 얼버무렸다.
“아니요. 별거 아니었어요.”
하랑이 다시 노트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안드라스는 현재 계약자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현세에 묶여 있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계약자를 찾아, 안드라스와 계약을 맺게 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계약자를 죽이세요. 그것이 종속자가 리바운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머리가 멍해졌다.
악마에 대해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계약을 맺게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계약자를 죽이라니…….
실행 불가능한 방법이다.
『체이를 살리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내가 이해한 게 맞아?』
잠시 후, 크로울리의 메시지가 화면에 새겨졌다.
『다른 사람일 필요가 있습니까? 융통성을 발휘하십시오.』
* * *
[JB행복카드 한도 초과 승인 거절]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하랑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고작 한 번의 채팅에 카드 한도까지 끌어다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한도에 다다르자, 게티아 닷컴의 크로울리는 더 이상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채팅창에 야박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를 띄울 뿐이었다.
『입금이 되지 않으면, 크로울리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옆자리에서 핸드폰 화면을 훔쳐본 체이가 하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생활비 모자라면 말해. 빌려줄게,”
“다음 달 정산 안 되면, 전 파산이에요.”
“엄살은……. 카드 한도도 얼마 안 되잖아. 한 오백쯤 되나?”
“누구 때문에 내 재정이 이렇게 됐는데…….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어야 되겠어요.”
하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걸 함부로 만들었다가는, 크로울리인지 악마숭배자인지 하는 놈이 마이너스 한계치까지 뜯어먹으려고 덤벼들 게 분명했다.
본인은 악마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하는 짓은 악마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하랑이 노트북을 덮자, 체이가 넌지시 물었다.
“원하는 답은 다 얻었어?”
“네. 어쩌면 나하고 체이. 둘 다, 악마들하고 바이바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체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자연스러운 미소에서, 점점 감정을 되찾아 가는 느껴진다.
하랑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디데이는 일주일 후로 잡죠. 체이가 숙소에서 떠나기 전이요.”
“디데이?”
“게티아 닷컴에서 체이의 리바운드를 지워버릴 방법을 알아냈어요. 간단한 의식 하나만 진행하면 된대요.”
체이가 눈을 작게 뜨고, 하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짜야?”
“거짓말해서 뭐 하게요? 채팅창이라도 캡처 떠서 보여주고 싶은데, 안 보인다면서요?”
체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하랑의 얼굴에서 읽히면 안 되는 감정들이 읽혔다.
수월한 해결 방법을 찾았다면, 절대로 읽히면 안 되는 감정이었다.
슬픔, 절망, 고뇌 같은 네거티브한 감정들.
“하랑. 안 되는 일 때문에 억지로 애쓰지 마.”
“또 의심병 도지셨다.”
하랑이 너스레를 떨면서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체이의 서늘한 목소리가 등을 찔러왔다.
“네가 가져가려는 거지?”
“네?”
“올빼미 말야. 네가 가져가려는 거잖아. 네가 올빼미와 계약을 하고 사라지려는 거지?”
차 문을 열고 바닥에 발을 디딘 자세로 하랑은 굳어버렸다.
체이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티아에 접속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체이가 말을 이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너라면 혹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맡겨본 거야. 관점이 달라지면 게티아도 다른 답을 내주지 않을까 하고, 작은 확률에 걸어본 거지.”
하랑이 억지 웃음을 흘렸다.
“에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하고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삶의 목적을 잃은 사람으로는 보여.”
“…….”
“넌 누가 뭐래도 하랑이야. 누군가의 복사본 같은 게 아니야.”
속마음을 들키는 게, 이토록 기분이 더러운 일일지는 몰랐다.
하랑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남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이제는 지쳤어. 가짜인 내가, 좋은 일 하나 하고 떠날 기회잖아.”
“거부하겠어. 넌 올빼미와 계약할 수 없어. 올빼미가 나한테 종속되어있는 한, 내 허락 없이 다른 사람과의 계약은 불가능해.”
“체이, 다른 방법은 없어. 넌 올빼미를 놔줘야 할 거야.”
하랑이 차에서 내렸다.
오후부터 내렸던 부슬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체이도 차에서 내려, 서둘러 하랑을 뒤따랐다.
숙소로 돌아가는 하랑을 뒤쫓아 가던 체이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의 감촉을 느꼈다.
“하랑.”
체이의 아련한 목소리에 하랑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체이가 멍한 눈으로 하랑을 바라보며, 한손으로 귓바퀴를 매만졌다.
기억을 잃었다는 수신호다.
왜 이런 곳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김중식 대표와 면담을 마치고 나왔는데 블랙아웃이 되어버렸다.
하랑이 뒤로 돌아 천천히 다가오며, 부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올라가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