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이나와 체이의 행방불명 (5)
분명 익숙한 목소리의 고성이 들렸고, 싸우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소리가 잠잠해졌고, 문이 열렸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이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 무슨 소란이에요? 누가 찾아온 거 맞죠?”
이나를 납치한 여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신경 쓰지 마.”
“분명히 소리가 들렸어요.”
“쓸데없이 귀가 밝네. 불청객이 하나 찾아왔는데, 우리가 제압했어. 주인 없는 공장에서 지내는 노숙자인 거 같더라고. 두들겨 패서 다른 방에 가둬놨지.”
거짓말이다.
이곳은, 빈말로도 방음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여자 목소리였고, 이나와 체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깡이 좋은 여자는, 이나가 아는 한 단 한 명뿐이었다.
“하랑이죠? 하랑이 왔었죠?”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정체불명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꼬맹이가 너희 왕자님인가 보네? 근데 이걸 어째……. 현실은 동화책과는 아주 다르지. 왕자님도 다구리 맞으면 기절하더라.”
이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읍! 읍!’ 하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같이 납치되어 온 체이일 거다.
이나와는 다르게, 납치범들은 체이의 입까지 봉해버렸다.
계속해서 입을 놀려, 납치범들의 신경을 긁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나가 흥분한 체이를 대신해서 물었다.
“하랑이한테 무슨 짓 한 거예요?”
“그 꼬맹이는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과격하게 저항하길래, 조금 심하게 손을 봐줬어.”
목소리는 이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살아는 있으니까 신경 꺼.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야지?”
“하랑이한테 손을 댄 이상, 협상은 없어요.”
얼굴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나가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상체와 발목이 밧줄로 결박된 탓에 납치범의 손에서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왜? 또 소리 지르게?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이제 널 도와주러 올 사람은 없어.”
두 눈을 가리던 검은 천이 벗겨졌고, 그제서야 주위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사방이 어두웠지만, 철거를 앞둔 폐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창문은 유리가 아닌 나무판자로 막혀있었고, 외부와 통하는 출구는 오직 방문뿐이었다.
반대편 구석에는 눈을 가린 체이가, 입에 청테이프를 붙인 채로 결박되어 있었다.
원래 납치 계획에는 체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나를 납치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바람에, 별수 없이 같이 납치한 것이다.
납치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진짜 별거 없어.”
이나의 시선이 납치범의 얼굴로 향했다.
가뜩이나 어두워서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는 데다, 흰색 마스크까지 쓰고 있다.
반짝이는 눈동자 한 쌍만 간신히 분간되는 정도였다.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는, 이나의 최애 야구 모자를 빼앗아 쓰고 있다는 것 정도?
납치범이 보이지도 않는 서류를 이나의 눈앞에 내밀었다.
주위가 원체 어두운지라, 글자도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에 네 서명이 필요해. 류이나.”
“이게 뭔데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몰라. 누구 심부름이야.”
이나가 시야에 초첨을 맞추고, 납치범이 내민 종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제서야 글자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글자가 구분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거였다.
문서 자체가 비어있고, 오직 서명란만 인쇄가 되어있는 ‘백지 각서’다.
“당신들, 미쳤군요. 이게 뭔지 알고, 나더러 서명하라는 거예요? 설사 내가 여기에 서명한들, 법적 효력이 있을 거 같아요?”
“효력이 있든 없든, 내 알 바가 아니야. 그건 오빠들이 알아서…….”
거기까지 말을 내뱉은 납치범이 당황한 듯이 횡설수설 말을 덧붙였다.
“오빠라는 건, 의뢰주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는 뜻이야. 네가 서명을 하면 나머지는 의뢰주가 알아서 하겠지.”
낮게 한숨을 쉰 이나가 말했다.
“여기서 그냥 우리 놔주고 돌아가요. 오늘 있었던 일은 문제 삼지 않을게요.”
“꼬맹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누가 절친 아니랄까 봐.”
“이봐요!”
“친절하게 대해줄 때, 서명하면 좋잖아. 네가 류이나만 아니었으면, 손가락 잘라서 지장 찍었어.”
납치범의 말을 상상한 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나의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납치범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말로 해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너희, 원래도 똥고집이잖아. 자존감만 더럽게 높은 쓰레기 년들.”
자리에서 일어난 납치범이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 손에 맥주병을 들고 돌아왔다.
‘설마, 이 자리에서 마시려나?’ 하고 이나는 생각했다.
납치범이 맥주병을 거꾸로 쥐는 순간,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마스크에 하관이 가려져 있음에도, 납치범이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이돌을 납치하려고 마음먹은 여자가, 제정신일 리가 만무했다.
“그, 그거 내려놔요! 지, 진정하고 천천히 대화로…….”
“난 저 분홍 머리 년이 이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덤으로 납치했지만, 협상 재료로는 나쁘지 않다고 봐.”
납치범의 눈동자는 이나가 아닌, 반대편 구석에 처박혀 있는 체이를 향하고 있었다.
체이는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여자 납치범을 올려다보았다.
“읍! 읍!”
“비명 소리는 들어주는 게 예의겠지?”
납치범이 체이의 입에 붙은 청테이프를 잡아 뜯었다.
입 주변이 따가웠는지, 체이가 인상을 구기며 한마디를 뱉었다.
“덕질도 정도껏 해야지.”
“뭐?”
“인생 말아먹으면서 덕질하면, 그게 팬심이냐? 그냥 등신이지.”
체이의 도발에 납치범이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체이가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 했다.
체이는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납치범의 얼굴을 정확히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 신기 있는 거 몰랐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았어야지. 얼굴 가리고 있겠다, 주위도 어두컴컴하겠다. 누군지 모를 것 같으니까, 이렇게 막 나가는 거 아냐?”
“미친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네 정체를 알면 어쩔 건데? 죽이기라도 할 거야?”
그때, 머리를 붉게 염색한 다른 납치범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대장! 바깥 복도에 이상한 새가 앉아있어. 올빼미 같은데 완전 하얘!”
야구모자를 쓴 납치범이 빨간 머리를 돌아보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너, 꼬맹이 감시하라고 했지? 올빼미가 복도에 있는 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걘 다른 애가 감시하고 있어. 난 야리 하나 빨려고 잠깐……. 그나저나 진짜 하얗다니까?”
“뺑끼 부리지 말고, 꼬맹이나 잘 감시하라고!”
붉은 머리가 ‘미동도 안 하는 애한테 뭘 둘씩이나 붙여?’라고 중얼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야구모자를 쓴 납치범이 다시 체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분홍 대가리. 넌 항상 입이 방정이구나?”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네가 혓바닥을 멍청하게 놀리는 바람에 누군지 알아버렸거든. 그럴 거면 아예 이름표를 달지 그랬어? 아……. 니들이 내 눈을 가려서 보지 못하긴 하겠다.”
눈매가 일그러진 야구모자가 맥주병을 거꾸로 쥐고 체이에게 다가갔다.
이나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체이에게 속삭였다.
‘언니, 도발 좀 그만 해요!’
하지만 체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어떻게 벌써 나왔냐? 1년 6개월 받지 않았어?”
“이 시발년이…….”
“아……. 2심에서 집행유예? 초범인 데다, 깊이 뉘우치고 있고……. 결정적으로 부모님이 비싼 로펌을 붙여주셨다고? 딸자식 하나 잘못 둬서 집안이 거덜 났네?”
체이가 마치 다른 사람과 대화하듯 떠들어댔다.
신들린 무당이 연상된다고나 할까?
이나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야구모자가 체이의 눈가리개를 힘껏 잡아당겼다.
시야가 열린 체이가 야구모자와 눈을 마주치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을 입에 담았다.
“오랜만이야, 우슬기. 뒤에 매니저는 안 붙여도 되지?”
“내가 입 놀리지 말라고 했지?”
“눈은 어디서 했어?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이전이 나은 것 같아.”
야구모자를 쓴 납치범.
시트러스밤의 전(前) 매니저 우슬기가 체이의 머리를 향해 맥주병을 휘둘렀다.
“그 입 닫아! 이 개 같은 년아!”
* * *
하랑은 강제로 방 안에 처박혔다.
유리창이 모두 제거된 복도처럼, 방 안 또한 유리창이 모두 제거되고 나무판자로 가려져 있었다.
“끄으응…….”
흥분이 가라앉자 아드레날린도 더는 분비되지 않는지, 쓰라린 통증이 몰려왔다.
발길에 차였던 눈두덩이도 부어올랐고, 손등에도 시퍼런 멍이 올라왔다.
터진 입술이 쓰라려 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스물여덟 평생, 여자들한테 두들겨 맞고 서러워할 날이 있을 줄이야.
아이러니하게도 때린 여자들이 프라이데이의 팬이다.
류하민, 너.
아이돌 활동 허투루 했다.
네 팬들이 날 먼지 나게 때렸어, 망할 자식아.
온몸이 쑤시는데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대식, 이 망할 악마 놈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다.
핸드폰 안 터지는 걸 알고서, 날 사지로 보내?
오대식이 해보라고 도발했을 때, 일단 의심부터 해봤어야 했는데…….
안경을 쓴 홀리데이가 죽은 사람처럼 널브러져 있는 하랑을 두고 입을 열었다.
“얘, 살아있는 거 맞지?”
빨간 머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숨은 쉬잖아.”
“병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귤폭탄 애들이 홀리데이 갈라 치는 거 못 봤어? 하민 오빠 빼 가서 지네 공연에 피처링 시켰잖아. 되게 약은 년들이라니까? 이 기회에 겸사겸사 본때를 보여줘야지.”
이 여자들은 시트러스밤에 대한 이유 없는 적의를 보인다.
진성 홀리데이가 확실하다.
차라리 평범한 납치범이라면 협상의 여지라도 있을 텐데, 걸려도 더럽게 걸렸다.
빨간머리가 자리에서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한 대 빨고 올 테니까, 잘 지키고 있어.”
“같이 가. 여기 어둡고 무서워.”
“대장년이 눈 크게 뜨고 지키고 있으래잖냐. 저런 비실비실한 꼬맹이가 뭐가 두렵다고……. 하여간 겁은 많아서.”
안경 여자도 유난히 겁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기나 통신도 연결되지 않는 지역이다.
조명이라고는 아까 야구모자의 손전등이 전부인 듯싶었다.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여자애 하나를, 어둠 속에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게 익숙할 리가 없었다.
단조로운 광경이 계속되자, 안경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안경이 수마에 빠져들 때쯤, 별안간 하랑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 위잉.
여기 서비스 불가 지역 아니었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여자들이 굳이 몸수색하지 않은 것도 통화가 안 되는 지역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거다.
다행히 보초를 서던 여자는 깨지 않았고, 하랑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상단의 안테나 아이콘은 여전히 사라진 상태고, 그 자리에 ‘서비스 불가’라는 문구가 떠올라있다.
다만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어쩌면 문자로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것도 잠시.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하랑의 심정은 짜게 식었다.
[★위기를 기회로! 단 한 번의 찬스!★]
이건 오대식이 보낸 스팸 문자다.
고객의 위기를 세일즈 포인트로 잡는 사악한 악마 같으니…….
통신이 안 되는 상황인데, 당연히 평범한 문자 메시지일 리가 없었다.
하랑은 핸드폰을 꺼버렸고, 안경 여자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길게 하품을 했다.
“하아암……. 거기. 깨어있어? 심하게 아픈 건 아니지?”
이 못된 년들아.
니들이 날 밟았잖아.
죽을 것같이 아프거든?
하랑은 대답하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저 안경 여자가 그나마 허술해 보이니, 빈틈을 노려볼 생각이었다.
문 바깥에서 와다다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얘들아! 밖에 올빼미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올빼미라…….
그게 그렇게 흔한 동물이던가?
‘완전 새하얘! 어디 동물원에서 탈출한 건가 봐!’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평범한 올빼미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체이의 종속이 체이를 찾아온 거다.
문틈 새로 흘러 들어오는 체이의 아지랑이 또한 핏빛이 훨씬 짙어졌다.
체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별안간 벽 너머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그 입 닫아! 이 개 같은 년아!”
그리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꺄아악!”
이건 이나의 목소리다.
벽 너머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안경 여자도 소리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하랑과 열린 문 너머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여기 그대로 있어. 어디 가면 안 돼.”
이미 하랑이 기절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서둘러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랑은 불안한 표정으로 벽 너머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 살려주세요! 으허어엉!”
공포에 질린 이나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 빌어먹을 년들이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하랑이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온몸이 이가 맞지 않는 톱니처럼 삐걱거린다.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지만, 무릎에 힘을 줄 때마다 눈앞에 시큰한 통증을 동반한 벼락이 쳤다.
가야 되는데…….
이나를 지켜주러 가야 하는데…….
“꺄아아악!”
- 쨍그랑!
이나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유리가 박살 나는 소리가 이어졌다.
동시에 하랑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터진 입술에서 또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염병……. 진짜 염병할……. 오대식. 이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을 악마 새끼…….”
하랑이 핸드폰을 집어 들어 방금 온 문자 메시지를 화면에 크게 띄웠다.
“류하민, 이 오라지게 재수가 없는 놈아. 그냥 날 원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