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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321화 (321/376)

321화. 악마를 잡을 덫 (5)

안무 연습을 하고 있는 시트러스밤 연습실에, 별안간 김중식 대표가 찾아왔다.

평소에도 연습실에 종종 찾아와 팀원들을 격려하는 김중식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중대 발표가 있다. 전부 모여 앉아서 들어.”

음악을 끈 희영이 멤버들을 향해 모이라고 손짓했다.

이윽고 멤버들이 모두 모이자, 김중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시트러스밤의 다음 앨범은 미니가 아닌, 정규로 진행하기로 했다. 하민이가 작곡한 네 곡 이외에도 괜찮은 곡들이 들어왔어. 수록곡은 총 10곡. 난이도가 있는 곡이라 포지션 조정이 필요해.”

메인보컬인 희영이 대표로 물었다.

“10곡이요? 가이드 따고 연습해서, 녹음까지 들어 갈라모 일정이 빠듯할 긴데……. 혹시 저희 컴백은 딜레이 됩니꺼?”

“가이드 곡은 이미 나왔어. 하랑이가 어제오늘 수고를 해줬지. 팀을 위해 자진해서 고생한 하랑에게 박수.”

멤버들은 영문도 모르는 얼굴로 일단 박수를 쳤다.

하랑은 머쓱하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가 잦아들자, 김중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A&R 팀에서 회의를 했어. 지난 활동 때 시트러스밤이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팬들의 불만도 많았다더군. 일부 멤버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불만이 가장 많았어.”

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예? 코디는 전반적으로 괘안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야. 포지션에 비해서 실력이 뒤처지는 멤버들을 말하는 거지. 특히 보컬 쪽.”

김중식의 냉정한 말에 희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팀원 모두가 일제히 희영에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실력이 뒤처지는 멤버가 바로 너.’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중식은 한심함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희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섭섭하게 생각하진 마. 서브래퍼보다 노래를 못하는 메인보컬이라는 게……. 팬들이 봤을 때는 충분히 이상할 수 있잖아.”

“저……. 저는……. 처음 듣는 얘기라예!”

김중식이 한심한 투로 말했다.

“희영아. 노래를 못하면 모니터링이라도 잘했어야지. 시트러스밤의 콘텐츠에 달리는 악플의 90%가 너에 대한 악플이야. 읽어줘?”

김중식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얼마나 많은 악플을 수집해서 프린트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사전이나 성경책만큼 두꺼웠다.

김중식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종이에 인쇄된 악플을 읽기 시작했다.

“얘는 언제까지 방송에 나와 사투리를 쓸 건가? 귀여운 척하는 거, 역겨워서 못 보겠다.”

“가면가수왕을 래퍼로 쓰고, 음치를 메보로 쓰네. 레몬 엔터는 청각 장애인만 채용하냐?”

“사실 시트러스밤은 하랑 원툴이잖아. 하랑 없었으면, 이도 저도 아닌 듣보잡 그룹이지.”

“야한 옷 입고 몸매 드러내면 자기도 섹시해지는 줄 아나 봐. 체중 관리 좀 시켜. 옆구리 살 보기 흉해.”

듣도 보도 못한 악플들이다.

시트러스밤 오피셜 채널은 구독자의 대부분이 감귤단이라, 저런 노골적인 악플을 달지 못한다.

김중식 대표가 왜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오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희영이 몹시 당황하고 있는데도, 멤버 중 누구 하나 나서서 대신 따져주질 않았다.

믿고 있던 신소진마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있다.

얼굴이 벌게진 희영이, 손을 들어 김중식의 말을 막았다.

“그만하세요! 갑자기 저한테 와 이카시는 거라예?”

조금 전까지 김중식 대표가 서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유재이 트레이너가 서서 쓴소리를 던지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해. 네가 메인보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가당키나 한 것 같아?”

“대표님은 으데 가셨데요? 방금 전까지 거기 서 계셨는데?”

“말 돌리지 마. 이제부터 시트러스밤의 메인보컬은 하랑이 맡을 거야. 희영이 넌 오늘부터 하랑 대신 래퍼를 맡는다.”

“그건 무슨 소리라예? 랩이라꼬요? 갑자기 제가 어떻게 랩을 한데요?”

자리에서 일어난 하랑이 입매를 비틀고 웃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여기서 메인보컬 맡을 사람이 저 말과 또 있어요? 언니는 내가 양보해 줘서,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깜냥도 안 되면서 메인 잡고 있는 거, 창피한 줄이나 아세요.”

“하랑! 와 말을 그런 식으로 카는데!”

“왜요? 정곡을 찔리니까 화가 나시나? 그럼 누가 메보를 맡을 건지, 정정당당하게 씨름으로 결정해 볼까요?”

씨름?

여기서 씨름이 왜 나와?

무언가 이상했지만, 화가 난 희영은 하랑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쳤다.

“샅바 잡그라! 내가 이래 봬도 아체대 씨름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데이!”

* * *

“으어어어……. 숨 막혀…….”

숨이 넘어가는 하랑의 목소리에 희영은 불현듯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이 옆에 누운 하랑의 얼굴을 찐빵처럼 밀치고 있었다.

모든 게 꿈이었고, 지금은 해도 들지 않은 새벽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씨름으로 메인보컬을 결정하는 상황이 있을 리 없었다.

민망해진 희영이 황급히 하랑을 보듬으며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계속 자래이. 언니가 미안타.”

“음냐냐…….”

다행히 하랑도 잠결에 잠꼬대를 한 것인지, 금세 다시 곯아떨어졌다.

희영은 달빛에 비친 하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작고 귀여운 데다, 놀라울 정도로 다재다능한 아이다.

시트러스밤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제 한 몸을 던져 팀을 구해내곤 했다.

그룹 막내인 주제에 언니들보다 리더십이 강하고, 통찰력도 뛰어나다.

간혹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일부터 저질러서, 말썽꾼 내지는 사고뭉치로 폄하 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사고가 수습되고 나면, 하랑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이 내려준 재능에 질투는 나지만, 결단코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아이가 바로 하랑이었다.

희영이 살포시 하랑의 앞머리를 이마 위로 넘겨주자,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이어졌다.

“음냐……. 난 살아남을 거야…….”

“하모, 살아남아야제. 우리가 우째 여까정 올라왔는데.”

“오대식……. 잡아…….”

희영이 피식하고 웃음 지었다.

“꿈나라서 강새이랑 놀고 있는 갑네. 애는 애인 갑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을 상대로 칭찬은 못 해줄망정, 몹쓸 질투심을 느끼고 이상한 꿈이나 꾸다니…….

문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희영이었다.

머리맡의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희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위로 손을 더듬어, 무선 이어폰을 챙겨 들었다.

하랑이 녹음했다는 가이드 곡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볼 생각이었다.

건너편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이나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을 지나 주방에 도착한 희영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강새이가 없으니까 허전하데이.”

주방 구석에는 강아지의 보금자리였던 도넛 모양의 방석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다른 멤버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질 때면, 잠이 덜 깬 눈으로 꼬리를 치며 반겨줬었는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새벽에 시끄럽게 짓고, 사방에 털을 흘리고 다니는 애물단지였지만, 막상 눈에 보이지 않으니 서운함이 밀려왔다.

물이 끓는 동안, 방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을 때리던 희영이 다시 혼잣말을 했다.

“체이 언니 집에서 잘 지내그라. 그래도 ‘오대식이’ 니, 살뜰하게 챙겨주는 건, 그 언니뿐이데이.”

- 치이익. 탁!

물이 완전히 끓자 커피포트의 스위치가 올라갔다.

소리가 꽤나 커서, 정신을 놓고 있던 희영은 화들짝 놀랐다.

거실에 불을 켜지 않아서 그런지, 어째 으스스한 기분도 들었다.

숨을 내뱉자 어둠 속에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희영은 적막 속의 두려움을 떨쳐낼 요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날이 와 이리 차노. 인자 겨울이 오려는가 보제?”

[겨울이 오는 게 아냐. 악마가 오는 거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하랑의 목소리에, 희영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랑, 깼나? 내가 잠꼬대가 좀 심했제?”

불 꺼진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하랑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거실이 텅 비어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희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다시 환청이다.

한동안 듣지 못했었는데, 또다시 재발했다.

어처구니없었던 꿈은, 아무 이유가 없던 게 아니었다.

하랑의 가이드 곡을 들은 이후에 느낀 상대적 박탈감이, 꿈에 반영된 것이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였다.

미간을 구긴 희영이 자책하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조희영. 와 이리 대범하질 못하노. 채신머리없게.”

[야! 너 여전히 이게 환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저번에 확실하게 보여줬잖아!]

목소리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희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머그잔에 커피를 탔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준 사탕 기억 안 나? 그거 효과 있었잖아.]

희영은 움찔했다.

악마가 준 박하사탕.

아니, 악마가 준 거라고 착각한 박하사탕.

그건 방송국 근처의 부대찌개 집에서 후식으로 나눠준 사탕이었다.

치토세가 한 움큼 집어 와서 멤버들에게 나눠줬던 것을 무심코 받았다가, 기억에서 잊힌 것뿐이었다.

악마에게 받았다고 생각한 건, 스스로의 환각이 만들어 낸 착각에 불과했다.

그 사탕을 먹은 날, 인생 최고의 무대를 완성했던 것 또한 플라시보 효과 때문이었다.

“세상에 악마가 어딨노. 전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착각이제.”

[천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어떻게 직접 경험하고도 부정할 수가 있지?]

희영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핸드폰의 볼륨을 높이고, 가이드 곡을 실행시켰다.

청각을 소란스럽게 자극하면 환청도 잦아들기 마련이다.

커피를 들고서 다시 거실로 이동하는 도중에, 거실에 위치한 전신거울과 마주쳤다.

최대한 거울을 바라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다가가기도 전에 거울 안에 누군가 서 있었다.

절대로 사람의 형체가 비칠 수 없는 각도인데.

이어폰의 음악을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세상에 이렇게 선명한 환각이 어딨어?]

거울 옆을 지나가며 희영은 눈을 감았다.

거울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다.

“니는 가짜데이. 니는 가짜데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라.”

주문을 외듯이 자기 암시를 건 희영은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찬바람이라도 맞으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베란다 창 앞에 도착한 희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야만 했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모든 베란다 창에,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희영. 네가 날 불렀어. 악마를 불렀으면, 원하는 걸 말해야 할 거 아냐.]

머그컵을 쥔 희영의 손이 덜덜 떨렸다.

뜨거운 커피가 넘쳐서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데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난 부른 적 없어. 난 부른 적 없어. 난 부른 적 없어.”

[넌 정확히 불렀어. ‘오대식’. 그게 내 이름이야. 저번에도 알려줬을 텐데.]

“개. 우, 우리가 키우는 개를 부른 기다. 너, 널 부른 게 아니라꼬.”

[여기에 개가 어디 있어?]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베란다를 등지고 서 있었지만, 환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빛을 반사하는 모든 오브제에 조희영 본인의 잔영이 같은 모습이 떠올라 있다.

TV, 거울, 장식장, 소파테이블, 심지어 들고 있는 머그컵의 표면까지.

“내, 내를 내버려 둬.”

[널 어떻게 하려고 온 게 아냐. 도와주러 온 거 라니깐? 당당하게 메인보컬로 서고 싶다면,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춰야 하잖아.]

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혜수……. 그녀의 음색이 내 목에서 나온 적이 있었데이. 딱 한 번뿐이지만.”

[거 봐. 기억나지? 나는 실존한다니까? 절대로 환각 같은 게 아니야.]

“정말로 신혜수의 목소리를 내한테 줄 수 있는 기가?”

희영의 모습을 한 악마들이 한꺼번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데……. 신혜수의 재능은 줄 수가 없게 됐어. 유통기한이 다해서 상해버렸거든. 대신 다른 재능을 줄게. 오페라 가수는 어때? 그레이스 리라고,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가 있어.]

“누군지 몰라.”

[저번엔 내가 수명의 절반을 달라고 했었지? 이번엔 아니야.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 주기로 했던 물건 대신 다른 걸 가져왔으니, 네고를 해주는 게 당연해.]

가벼운 말투를 사용하는 악마의 속삭임을 들으니, 희영의 경계심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뭣을 원하는데?”

[대박 할인. 점포 정리. 대출혈 서비스. 사장님이 미쳤어요 수준으로다가…….]

악마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1년의 수명 어때? 어느 홈쇼핑을 찾아봐도, 이 가격으로 이 정도 재능을 주는 곳은 없어.]

희영은 잠시 고민하는 척,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이 선명한 환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솔찌기 내는……. 니가 진짜 악마인지, 환각인지 구분하지 못하겠데이. 그니까, 진짜라꼬 가정하고 대답을 줄게.”

[얼마든지. 난 고객의 니즈를 듣기 위해 언제나 귀를 열고 있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봐. 최대한 조건을 맞춰줄 테니까.]

“1년의 수명, 줄 수 있구마. 노력하지 않고 재능을 얻게 해준다 카는데, 다 늙어가 골골대는 인생의 마지막 1년 정도는 얼마든지.”

[그럴 줄 알았어. 진작 그럴 것이지.]

희영이 숨을 길게 내쉬고,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쓴맛 나는 액체로 입안을 헹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내 대답은 거절인 기라. 내는 오로지 내 능력만으로 이 자리까정 올라왔데이. 이제 와가 내가 쌓은 노력을 부정할 짓을 와 하겠노? 그런 걸로 날 꼬실라 캤으면, 적어도 10년 전에 왔어야제.”

악마가 순간적으로 벙찐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 이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정말로 상종을 못 하겠네. 여기까지 불러내 놓고 한다는 소리가……. 내가 쌓은 업적에 숟가락 올리지 마라?]

“애초에 부른 적도 읍다. 강새이 불렀는데, 지가 잘못 듣고 처와놓고서는 이게 무신 억지고?”

[내가 우습지? 촐싹거리면서 대해주니까 한없이 만만하지?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보여줘?]

거울들의 주변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흘러내렸다.

동이 트는 빛마저도 삼켜버리는 짙은 어둠이었다.

거울에 비친 희영의 입매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뒤틀린 구강구조가 점차 앞으로 튀어나오고, 눈알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수백 개의 송곳니가 찢어진 입 바깥으로 솟아 나왔다.

그 형상은 말(馬)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버린 악마가 말머리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자, 희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항거할 수 없는 공포가 정신을 짓눌렀다.

온몸이 마비되어 눈을 감을 수도 없었고,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감히. 하찮은 피조물 따위가. 이 대악마 오로바스 데 시구르드를 능멸해?]

희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는 심장마저 제멋대로 뛰며, 호흡마저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숨통이 점점 조여들었다.

“커……. 커컥…….”

그 순간, 작은 손 하나가 등 뒤에서 넘어와 희영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괜찮아요, 언니?”

하랑의 목소리다.

시야가 가려지자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릎에 힘이 빠진 희영이 털썩 주저앉았고, 하랑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부축했다.

“언니! 정신 좀 차려봐요.”

“나……. 나……. 엄청 무서븐 걸 본 거 같데이.”

“가위눌린 거예요. 천천히 누워요. 심호흡도 크게 하시고요.”

하랑이 희영을 바닥에 눕혔다.

희영은 떨리는 눈망울로 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위 아이다. 거울 속에 자기가 악마라 카는 놈이 있었다. 소름 끼치게 무서븐 얼굴로 변하니까, 내는 몸이 굳어가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하겠더라.”

“가위 맞아요. 언니가 비틀거리면서 나가는 거 보고, 물이나 마실까 하고 따라 나왔는데……. 소파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계셨어요. 잠꼬대가 이렇게 심해서 어떡해요?”

“맞나? 내 지금 악몽 꾼 기라?”

“귀신도 아니고, 악마가 왜 나와요? 가위 한번 버라이어티하게 눌리셨네. 그대로 계세요. 침대까지 옮겨 드릴게요.”

하랑이 희영의 허리 아래로 손을 넣고, 공주님을 안듯이 번쩍 들어 올렸다.

하랑의 품 안에서 축 늘어진 희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번처럼 내 허리 꺾을 건 아니제?”

농담을 하는 걸 보니,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랑은 희영을 침대에 눕히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오대식이 희영에게 손을 뻗친 게 분명했다.

전신거울 앞에 선 하랑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말했다.

“내 사람들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지?”

거울 속의 잔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역시나 희영에게 오대식이 접근한 거다.

[까칠하게 굴긴……. 겁만 약간 줬어. 저 부산 아가씨, 의외로 강단이 있어서 유혹에 넘어오지도 않겠더만. 나만 헛물 켠 거지, 뭐.]

“한 번만 더 이따위 짓거리를 했다간, 계약이고 뭐고 없을 줄 알아.”

[아이고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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