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액막이 악마 (7)
택시에서 내린 하민은 쏟아지는 비를 피해 파란 대문의 집으로 달려갔다.
무너져 가는 담장과 녹슨 대문, 성이 ‘이’씨라는 것 외에는 알아볼 수 없는 낡은 한자 명패.
기억하고 있는 주소가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찾아봤지만, 대문 어디에도 초인종은 없었다.
“여기가 맞긴 한 거야?”
슬쩍 문을 밀자, 거짓말처럼 안으로 열렸다.
하민은 열린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작은 마당 너머로 안채가 있는 구조였고, 안채의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계세…….”
- 컹! 컹!
처마 밑에 눈에 익은 강하지 한 마리가 닫힌 방문을 향해 짖고 있었다.
아침나절에 하랑이 데려왔던 그 말티즈다.
집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소리를 내어 자신의 방문을 알리려던 하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좋은 목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 저 강아지를 없애려고 찾아온 거다.
차라리 하랑이 모르게 하는 게 낫다.
체이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말했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하민이었다.
‘멀리 보내서, 하랑이의 눈에 띄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개장수의 짓으로 꾸미든, 강아지의 가출로 꾸미든, 일단 개를 들고 나간 뒤에 생각할 일이다.
조금 전까지는 무식하게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있으니까.
등을 돌리고 있는 강아지를 향해 하민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얀 털 뭉치 위에 젖은 손이 닿자, 강아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죽는 소리를 내었다.
- 깨갱! 깽!
화들짝 놀란 하민이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도 방 안에는 사람이 없는 건지, 방문이 열리진 않았다.
귀를 바짝 세우고 하민을 잔뜩 경계하던 강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었다.
아침에 잠깐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하민을 알아본 모양이다.
생각보다는 훨씬 똑똑한 강아지였다.
하민은 다시 손을 뻗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 알지? 우리, 아침에 봤었잖아.’
- 헥! 헥!
머리를 쓰다듬자, 그저 좋다고 하민의 손을 핥아대는 강아지였다.
하민은 강아지의 눈치를 보며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안은 자세가 불편했는지, 강아지는 몸을 뒤틀며 방문을 향해 다시 짖었다.
- 컹! 컹!
‘짖지 마, 인마.’
하민은 서둘러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마를 벗어나자, 구멍 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우산이라도 하나 사올걸.
졸지에 함께 비를 맞게 된 강아지가 자지러지게 짖기 시작했다.
- 컹! 컹컹!
이미 내친걸음이라, 돌이킬 수도 없다.
강아지를 최대한 달래면서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막 대문을 벗어나려는 순간, 안채의 방문이 열렸다.
하민이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방 안에 있던 하랑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하민은, 강아지가 왜 그렇게 방문을 보고 짖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아무도 없는 마루에 내어놓고, 주인이라는 인간은 고양이와 단둘이 방 안에서 놀고 있으니 질투가 난 것이다.
츄르로 보이는 스틱을 들고 있던 하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류하민?”
하민은 고민했다.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지만, 걸음을 돌려 하랑에게 해명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안면 몰수하고 개도둑처럼 내빼는 게 나을까?
하민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하랑을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 내가 빈손으로 온 걸 깜빡했다. 남의 집에 올 땐, 음료수라도 사 오는 게 예의인데 말야.”
“스톱! 오해 살 짓 하지 말고, 조용히 강아지 내려놔.”
체면을 차리는 게 낫다고 결정한 하민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하민의 머릿속을 직접 파고들었다.
[망할 인간 놈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계약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그새 내 뒤통수를 쳐?]
하랑이 손에 들고 있던 츄르를 내던지고, 소환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하민에게 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류하민, 이 트롤러 같은 자식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강아지 내려놔!”
[원 안으로 숨으시겠다? 좋아.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저놈의 머리통을 끊어놓고 돌아와서, 네년의 사지도 찢어놓을 테니까.]
하랑이 애써 변명했다.
“내가 시킨 거 아냐! 저 멍청한 자식이 착각하는 거라고!”
하민은 멍한 표정으로 방 안의 둘을 지켜보았다.
말하는 부엉이에 이어서 말하는 고양이다.
둘 다 귀여운 동물이지만, 체이가 올빼미를 대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민이었지만, 시각으로 전해져 오는 정보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저렇게 작은 고양이를 무서워할 이유가 있나?
- 까드득. 뻐걱. 빠가가각.
벵갈 고양이가 마루로 걸어 나오면서, 뼈가 뒤틀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도망쳐야 한다는 경고다.
뼈가 으스러지고 골격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오대식이 말대가리로 변태했을 때도 이런 소리가 났었다.
마루 끝까지 걸어오는 동안, 고양이인 줄만 알았던 그것은, 점차 범의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안고 있는 강아지보다도 작았던 덩치는, 마루를 걷는 잠깐 사이에 대형견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는 지금도 이어졌다.
“류하민, 튀어!”
바닥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던 뒤꿈치가, 하랑의 고함과 함께 바닥을 밀어냈다.
하민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서 대문 밖으로 냅다 달렸다.
“개는 두고 가야지! 얼빠진 새끼야!”
등 뒤에서 하랑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기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만 몰두한 하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폭우 속을 뚫고 비포장도로 위를 달릴 뿐이었다.
산길이라도 불러도 어색함이 없을 이 도로는 애초에 외부 차량이 통행하는 길목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하랑의 집은 택시를 타고 산길을 따라 10여 분을 올라와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 살 만한 민가는, 길을 따라 그 이상을 내려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민은 훤히 보이는 내리막길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길을 따라가면 안 된다.
내 발걸음이 빨리지는 만큼, 놈의 속도도 빨라진다.
눈에 보이면 100% 따라잡힌다.
- 크와아아아!
천둥소리와 맞먹는 짐승의 포효가 대기를 흔들자, 하민은 본능적으로 도로를 벗어나 수풀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낙엽 뭉치를 밟고, 경사진 비탈 아래로 주욱 미끄러졌다.
진흙과 썩은 낙엽이 옷소매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이 소나기가, 자신의 냄새와 소리를 지워주길 바랄 뿐이었다.
- 끼잉. 낑. 낑.
강아지는 귀를 바짝 세우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민은 비탈 아래에 버려진 벌통 더미 뒤로 몸을 감추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낑낑대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벌통 사이의 틈으로 언덕 위를 지켜봤다.
곧이어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우다다다’ 하는 달음질 소리가 들리며, 완전히 성체로 변모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견만큼 커질 때도 놀랐지만, 이제는 스타밴, 아니, 마을버스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맹렬하게 달려온 호랑이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하민이 숨어있는 곳을 지나쳐, 산길 아래로 사라졌다.
생각만큼 똑똑한 놈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저 정도 운동신경이라면 차를 몰고 도망쳤대도 따라잡혔을 거다.
하민은 위로 올라가는 대신, 이대로 비탈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길 선택했다.
길도 보이지 않고, 수풀도 우거져 있지만,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 괴물 호랑이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자신보다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는 걸 알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길을 되짚어서 올라올 거고, 목표가 길을 벗어나 산비탈을 타고 내려갔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깨닫겠지.
그전에 최대한 거리를 벌려두어야 한다.
하민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가며 비탈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엉겨있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걷어내며 한참을 내려갈 때쯤, 언덕 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하민!”
하랑의 목소리다.
그 호랑이 괴물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에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류하민! 호랑이는 돌려보냈으니까 그냥 올라와!”
하민은 경사진 흙바닥 위에 몸을 뉘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을 벌리고 떨어지는 비를 머금어, 입안의 흙도 뱉어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위를 올려다보자, 저 멀리 수풀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렇게 쉽게 보낼 수 있는 거였으면, 쫓기기 전에 진작에 보내버릴 것이지.
망할 꼬맹이.
강아지도 흔들리는 수풀을 확인했는지, 꼬리를 흔들며 시끄럽게 짖었다.
- 컹!
“류하민! 어딨어? 거기 낭떠러지야! 길 없다고!”
하랑이 세 번째로 하민을 찾았을 때, 하민이 비로소 응답했다.
“하아…….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다! 이것들이 내가 만만한가? 체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선배 이름을 함부로 막…….”
하랑의 목소리가 묘하게 굵어졌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통해 들려옴과 동시에 머릿속에도 직접 꽂혔다.
“거기 있었네?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거기 있었네?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속았다.
하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는 목소리가 이름을 세 번 불러도 대답하지 말라는 전승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조상님들의 조언은 허투루 넘기는 게 아니다.
“지가 무슨 창귀야? 아오…….”
멀리서 수풀을 헤지고 등장한 건, 역시나 하랑이 아니었다.
코끼리만 한 산군(山君)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고, 위풍도 당당하게 하민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포기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줄……. 으어어?]
- 후두두둑!
하민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잘난 체를 하며 하민을 향해 다가오던 호랑이가 빗물에 미끄러졌다.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하릴없이 자빠지는 맹수의 모습은 한 편의 슬립 스틱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네 발을 허우적거리며 비탈을 구른 호랑이는,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 아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한참을 굴러 사라졌다.
[으억! 너 거기! 억! 꼼짝 말고 기다……. 끄억!]
거창한 단말마와 함께, 머릿속을 파고들던 전언도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황당한 눈으로 호랑이가 쓸고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던 하민을 향해, 강아지가 짖었다.
- 컹!
“그, 그래, 가자. 호랑이한테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보다.”
하민이 호랑이가 사라진 반대쪽 비탈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다시 현재.
하민은 물살이 불어난 감천에 몸을 담그고, 위태롭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난 이미 한번 죽었어.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허리까지 강물에 잠긴 하민이, 강아지를 급류에 던지려고 시늉했다.
금방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굴던 호랑이는,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야! 야! 야! 진정해! 그 작은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너 인성 문제 있어?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솔직히 나도 잘 몰라. 이 개가 살아있으면, 하랑이가 대신 죽는다고 했어.”
[누구?]
“이하랑! 너랑 같이 있던 여자애!”
하민이 다시 개를 던지려고 하자, 호랑이가 앞발을 번쩍 들었다.
[야! 야! 흥분하지 마! 대화로 풀 수 있는 건 대화로 풀자고. 먼저…… 난, 계약으로 인간의 목숨이라든지 수명을 원하는 악마가 아니야. 계약을 빌미로 아무도 안 죽여.]
“내 머리통을 끊는다고 한 거. 분명히 들었어. 발뺌하고 넘어갈 생각일랑 하지 마.”
당황한 호랑이가 과격하게 앞발을 내저었다.
[화가 나면 뭔 소린들 못 해? 너희 인간들도 똑같잖아. 죽여버린다고 말하는 놈 중에 실천으로 옮기는 놈이 몇이나 되겠어? 진짜로 머리통을 끊어버린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 화가 났다는 표현이잖아. 과장법 몰라? 과장법?]
“난 진짜 죽을 뻔했거든?”
[안 죽었잖아? 그럼 된 거 아냐?]
하민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무렵, 갈대밭을 헤치고 새로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에 흠뻑 젖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는 하랑이었다.
하랑도 산기슭을 타고 내려왔는지,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류하민. 그만하고 나와.”
“뭐? 내가 널 구하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체이가 시켰지? 보나 마나 개를 안 죽이면 나한테 위험이 닥친다고 했을 거야. 맞아?”
하민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랑이 헛웃음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 개, 던질 테면 던져.”
[헛소리 하지 마라, 인간! 계약을 잊었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를 무시한 하랑이 계속해서 하민에게 말했다.
“그 전에 하나만 명심해. 그 개가 죽으면, 체이도 죽어. 이건 공갈이 아니야.”
하민은 혼란에 빠졌다.
개가 살아있으면 하랑이 죽고, 개가 죽으면 체이가 죽는단다.
둘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도 없다.
어쩌면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이 마녀 같은 여자애들은 비현실적인 일을 현실로 만드는 애들이다.
하민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빗물은 닦여나갔지만, 곤혹스러움은 지워지질 않았다.
“너희 진짜 뭐야? 나한테 왜 이런 결정을 맡기는데! 난 그냥 제삼자라고!”
“오대식한테 시달리고 있지? 그 개가 죽으면, 넌 영원히 그 악마한테서 못 벗어나. 이러면 결정이 좀 쉬워지려나?”
하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체이는 하랑을 살리기 위해서 하민의 고통을 무시한 게 된다.
“네가 체이한테 가라며! 체이가 오대식을 쫓을 방법을 아는 거 아녔어?”
“체이가 시간을 벌어줄 거라고 했지, 오대식을 쫓아줄 거라는 말은 한 적 없어. 애초에 너흰 여기까지 왔으면 안 됐어. 이 일이 끝나면, 오대식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거야.”
“네가 죽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하랑은 침묵했지만, 긍정의 의미라는 것 정도는 하민도 눈치챌 수 있었다.
목숨의 경중을 따지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체이의 부탁대로 머리 위에 들고 있는 개를 강에 던지면, 하랑은 살고 나머지는 죽는다.
체이, 자신, 그리고 죄 없는 강아지 한 마리까지.
강아지를 무사히 돌려주면, 오직 하랑만 죽는다.
이건 트롤리 딜레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달려오고, 선로 위에 하랑이 누워있다.
하민은 선로를 바꾸는 스위치를 손에 쥐고 있지만, 바뀌는 선로 위에는 하민 자신과, 체이,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누워있다.
산술적으로는 1명이 죽는 게 합리적이지만, 하민은 결정하지 못한다.
그저 선로를 바꾸는 스위치를 머리 위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를 후들거리고, 팔에서는 힘이 빠지고 있다.
아무리 미뤄봐도 결국,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 거다.
하랑이 말을 보탰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는 원래 이기적인 놈들이잖아. 윤리 같은 거 따지지 말고, 숫자만 봐. 셋이 끝장나는 게 나을지, 하나만 끝장나는 게 나을지.”
“하나만 묻자.”
“묻는다고 달라질 건 없는데……. 좋아. 물어봐.”
하랑과 눈빛을 마주친 하민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하랑, 너. 나야?”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질문이,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하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랑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대식, 그 악마가 접근했으니, 하민의 멘탈을 흔들기 위해 말해줬으리라.
하랑은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하민 선배. 그따위 질문이 어딨어? 너무 줄인 거 아냐?”
“오대식한테 들었어. 네가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의심스러웠고. 그러니까 내 말은……. 네 정체성에 대해 의심이 생겨서,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거 아니냐고 묻는 거야.”
역시나 오대식이 불었다.
저 강물에 처넣으면, 주둥이만 물 위로 둥둥 떠오를 악마 놈 같으니.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하랑이 되물었다.
“하민 선배가 나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결정을 했을까?”
하민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아니.”
“그럼, 고민할 게 뭐 있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해. 그게 하민 선배와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반증이니까.”
하민도 피식 웃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우린 다른 사람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난 이거 결정 못 해. 대신, 신이 나 대신 주사위를 던지게 할 수는 있지.”
“뭐?”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은 하민이 거센 물살 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휘몰아치는 와류가 하민의 몸을 강의 중심으로 끌어당겼다.
하민의 돌발행동에 하랑이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