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오월동주 (5)
“탤런트 4명, 모델 2명, 희극인 3명, 가수 6명……. 물갈이가 아니라 회사를 접어야 할 수준이군.”
명단이 기록된 장부를 보며, 이문학이 투덜거렸다.
하랑은 숟가락에 올라간 뜨거운 선지를 ‘후후’ 불어 식힌 뒤에 입으로 가져갔다.
제대로 식지 않았는지, 되새김질하는 라마처럼 괴롭게 입을 오물거렸다.
“아오……. 뜨거…….”
이문학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하랑의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천천히 먹어. 레몬 엔터는 밥 안 주는 줄 알겠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하랑이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멤버들은 새벽 조깅 하러 나간 줄로 알 거예요. 날 밝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돼요.”
24시간 선지해장국 가게에 걸려있는 아날로그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여긴 예전에 체이와 들렀던 가게인데, 맛도 없고 손님도 없다.
얼굴 팔릴 걱정 없이 이문학과 접선하기에 좋은 장소다.
이제 동이 트려는지, 쇼윈도 너머의 검은 하늘에는 파란 기운이 천천히 퍼지는 중이었다.
“숙소까지는 태워다 주마.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고생이 많았다.”
이문학이 장부를 챙겨 넣자, 하랑이 선짓국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한성이 체포되면 그 장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경찰에 불 거예요. 이제 와서 소속 연예인을 포스트로 이적시켜도 소용없어요.”
약물 게이트를 만든 장본인이 이한성이다.
장부가 없어도 얼음을 사용한 연예인이 누군지는 기억하고 있을 거다.
갱생의 여지가 있는 약쟁이들을 포스트로 이적시킨다 하더라도, 그루밍에서 벌어졌던 일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이문학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한성은 체포되지 않아.”
“몇몇은 경찰에 제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줄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이한성의 이름이 반드시 나올 텐데요.”
“그때쯤 되면, 이한성은 이 땅에 없는 사람이 될 거야.”
“해외 도피라도 도와주시려고요?”
이문학이 뚝배기의 국물을 밥그릇에 옮겨 담으며 깨작거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다.
이문학은 그렇게 자비로운 인간은 못 된다.
이 땅에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 양반, 자기가 시한부라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살해당할 낌새를 알아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하랑이 크게 뜬 선짓국을 입으로 가져가며, 은근히 이문학의 양심을 건드렸다.
“이한성, 가족도 있어요.”
“흐음……. 가족도 처리하란 말이지? 보기보다 냉혹하구나.”
“풉!”
입으로 들어가던 밥알이 테이블 위로 흩뿌려졌다.
이 양반이 날 뭘로 보고!
“처리하긴 뭘 처리해요! 나까지 대표님하고 같은 과로 묶지 말아요!”
“농담인데 뭘 그렇게 정색을…….”
“농담 같지 않으니까 그렇죠! 그렇게 살벌한 소리를 안색도 안 바꾸고……. 하여간 이 양반들하고는 정상적인 대화가 안 돼.”
이문학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입매를 씰룩거렸다.
인간미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결국 이문학도 평범한 사람이었나 보다.
하나, 그놈의 체면이 뭔지, 끝내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다.
다시 하랑에게 시선을 향한 이문학이 진지한 투로 말했다.
“오랜만에 실컷 웃었군.”
아? 그게 실컷 웃은 거야?
이빨도 안 보였는데?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저 양반처럼 웃음이 메마를 수가 있지?
이문학이 말을 이었다.
“이한성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그루밍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우선이야.”
“저도 이걸로 끝. 다시는 따로 불러서 일 시키지 마세요. 우리가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가졌어도, 함께 일을 도모할 사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 게 좋아. 시트러스밤이 재계약에 실패하고, 그루밍의 품에 안길 수도 있잖아. 너희 재계약 시즌에는 중식이가 레몬의 수장이 아닐 수도 있어.”
참, 말 밉게 한다.
클라우드는 이 인간의 어떤 면이 좋아서, 따라 나간 걸까?
하랑은 뚝배기의 국물까지 박박 긁어 먹었고, 이문학은 먹는 시늉만 내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요? 입맛에 안 맞으세요?”
“선지를 안 좋아해.”
사람 창자도 뽑아 먹게 생긴 양반이, 입맛이 까다롭네.
하랑이 이문학 앞에 놓여있는 뚝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그거 제가 먹어도 되죠? 여긴 가격도 싸고 다 좋은데, 건더기가 몇 개 없어요.”
이문학이 자신의 해장국을 하랑에게 밀어주면서 말했다.
“이번에 클라우드가 컴백하는 건 알고 있지?”
“네, 귀가 닳도록 들었어요.”
“타깃을 국내가 아닌 북미로 겨냥할 생각이야. 당분간은 해외에서 활동하게 될 거야.”
큼직한 선지를 찾아 숟가락으로 퍼 올리던 하랑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트러스밤이 컴백하면, 클라우드와 활동기가 겹쳐서 종종 마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크, 큰물에서 활동하는 건 축하받아 마땅하죠.”
“회사는 반대하는 입장이야. 프라이데이도 반 쪼가리가 났고, 경쟁할 상대도 없어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보이그룹 판이다. 컴백만 하면 1위를 따 놓은 당상인데, 굳이 모험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지.”
“그루밍이 추진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누가…….”
물 한 모금 마시며 뜸을 들인 이문학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누구긴 누구겠어. 리첼이지. 빌보드에 도전해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데, 꺾을 수가 없어. 멤버들도 리더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손을 들어줬고. 누가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하랑이 이문학의 시선을 피하며, 애먼 선지를 입안에 퍼 넣었다.
리첼이 곰인형을 들고 와서 고백하던 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아무렇게나 떠들어댔던 빈말이 덜컥 떠올랐다.
‘비, 빌보드차트 글로벌 1위 찍고 와. 그때는 정식으로 사귀어 줄게.’
절대로 사귀지 않겠다는 말을 돌려서 한 거였는데…….
이 여자에 미친 자식이, 확률 낮은 복권에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
하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문학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이하랑. 네가 바람 넣은 거 아냐?”
“컥! 쿨럭!”
사래가 걸린 하랑이 물을 급하게 들이켰다.
이문학이 냅킨을 뽑아주며 말했다.
“농담이었는데……. 내 유머 감각이 아직 녹슬지 않았나 봐.”
입을 닦은 하랑이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나 아니거든요?”
“너희 시트러스밤. 클라우드와 복귀 시즌이 겹치잖아. 경쟁하기 싫어서 클라우드를 해외로 내보내는 계략일 수도 있지. 시트러스밤의 숨겨진 모략가가, 이하랑 너라고 중식이가 그러던데.”
내가 왜 모략가야?
대부분은 선빵을 맞았으니까 반격한 거라고.
“리첼이 등신이에요? 이제 갓 스무 살 먹은 여자애 말을 듣고 해외 진출을 노리게?”
뻔뻔하게 반문했지만, 표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리첼, 그 자식은 등신이다.
공수표에 속아서 자신의 커리어를 냅다 배팅해 버리는 상등신.
이럴 줄 알았으면, 워크숍에서 친한 척하지 말걸 그랬다.
이문학이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리첼하고 꽤 친하지?”
“막 그렇게 친한 건 아니고……. 말을 놓고 대화할 정도는 돼요. 오해하지 마세요. 연애 감정 같은 건 일도 없으니까. 절친한 선후배 같은 거예요.”
계속 하랑의 표정을 관찰하던 이문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됐어. 마음 같아서는 리첼을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나도 염치가 있지. 나 먼저 차에 가 있을 테니, 얼른 먹고 나와. 나도 처리할 일이 많아서 바빠.”
이문학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양복 외투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다급해진 하랑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제, 제가 설득해 볼까요? 어쩌면 마음을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문학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따로 불러서 일 시키지 말라며? 됐어. 계속 고집부리면, 미국 보내야지 어쩌겠어. 세상의 쓴맛을 경험해 봐야, 집이 제일 따뜻하다는 걸 깨닫는 법이야.”
이문학이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랑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거, 프라이데이의 빌보드 도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수천㎞의 거리를 이동하며 순회공연을 감행했고, 불러주는 방송사가 있으면 라디오, TV를 가리지 않고 날아갔다.
프라이데이의 공연은 늘 만석이었지만, 재미교포 혹은 아시아 계열 인종의 관객이 주를 이뤘고 상당량의 티켓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무료로 배포된 것들이었다.
음원 사재기 같은 편법까지 동원되어 세운 기록이 빌보드차트 6위.
모래 위에 세운 업적이 제대로 버틸 리 없다.
기록을 세운 다음 주엔 78위.
그다음 주엔 100위권 밖으로 차트 아웃.
모두 그루밍이 계획적으로 벌인 짓이다.
국내로 돌아와서는 빌보드를 점령했느니, 글로벌 가수라느니 허세를 부렸지만, 헛바람이 든 결과는 참혹했다.
미국에서 시간을 버리는 동안 팬들은 떨어져 나갔고, 차기 앨범의 투자금까지 대폭 삭감되었다.
북미 프로모션을 진행한다고 쏟아부은 자금 때문에, 초라한 정산을 받게 된 건 덤이다.
하랑이 보기엔 이한성이나 이문학이나, 성향만 다른 나쁜 놈에 불과하다.
밑도 끝도 없이 던진 공수표 때문에 클라우드 놈들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건 내 책임이 크다.
“제가 설득할게요! 아니, 설득하게 해주세요!”
“우리는 함께 일을 도모할 사이가 아니라며? 네가 왜 클라우드에 집착해? 그루밍이 알아서 할 일이지.”
이문학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느새 입장이 뒤바뀌었다는 걸.
이 얍삽한 늙은 여우는, 자신과 리첼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다.
모든 걸 다 알고서 미끼를 던진 거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게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덥석 물어버릴 수밖에 없다.
“에잇, 진짜……. 장부까지 갖다 줬는데 이러기예요?”
“맞다. 장부가 있었지. 장부값은 이걸로 갈음하는 거다?”
하랑이 어이없는 얼굴로 탄식을 뱉었다.
“완전 사기잖아요. 나 좋자고 클라우드를 설득하냐고요! 다 클라우드를 위한 일이잖아요.”
“싫으면 말고. 혹시 알아? 클라우드가 미국 가서 대박 날 수도 있잖아.”
대박은 무슨!
국내 원탑이었던 프라이데이도, 헛물만 켜다 돌아왔구먼.
저 깡패 아저씨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저러는 거다.
결국, 하랑이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이문학에게 빚을 지워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죽어가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치자.
“퉁 쳐요, 퉁. 내 참……. 더럽고 치사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이문학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저 양반이 죽을 날을 받아놔서 그런가?
왜 자꾸 기분 나쁘게 웃지?
이문학이 외투를 몸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루밍으로 찾아와. 클라우드는 철야 연습 중이니까, 저녁에 찾아와도 상관없어.”
“그거 아세요? 대표님 진짜 밉상인 거?”
이문학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암튼 특이해. 내 면전에 대놓고 험담하는 아티스트는 한 번도 보질 못했는데. 혹시 생각 있으면 그루밍으로 이적해라. 위약금은 치러줄 테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Never. 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