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371화 (371/376)

371화. 후일담 (1)

“꼬맹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리첼은 잘 구워진 흑돼지 목살 한 접시와 맥주 두 캔을 들고, 하랑과 체이를 찾아 나섰다.

체이가 서럽게 운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잘못해서 운 것 같지는 않은데, 시트러스밤 멤버들의 눈총이 사나워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욱에게 반쯤 등이 떠밀려, 사라진 두 사람을 찾으려고 펜션 뒤를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뒷마당 담벼락에 걸터앉아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을 찾았다.

작은 실루엣이 큰 실루엣을 달래주듯, 그녀의 얼굴에 두 손을 가져갔다.

뻘쭘해진 리첼은 펜션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하랑이 체이를 완전히 달래고 나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또다시 엉뚱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아, 아니……. 리첼하고는 헤어졌다니까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분명 하랑의 목소리다.

사귄 적도 없는데 헤어지다니…….

리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꼬맹이가, 팀 내에서 연애에 대한 압박을 받았던 걸까?

자신을 살갑게 대하면서도 계속 밀어냈던 건, 팀원들의 질타 때문일 수도 있다.

소진이에게 물어봤을 땐,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 큰 여자애들이 그룹 막내의 연애사에 간섭하고, 대놓고 눈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돌의 연애가 인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건 본인이 결정할 일이다.

남들이 왈가왈부할 일은 절대로 아니다.

게다가 체이는 전적이 있다.

기자회견이니, 뭐니 해서 의혹을 씻은 것처럼 보였지만, 여긴 쇼 비즈니스의 세계다.

보이는 게 진실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에 저 분홍 머리가 꼬맹이를 가스라이팅하는 거라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마음을 굳게 먹은 리첼이, 담벼락에 앉아있는 두 소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희…….”

첫 단어를 뱉기도 전에 목소리의 볼륨이 죽어버렸다.

작은 실루엣이 큰 실루엣과 입을 맞추는 광경이, 리첼의 시야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뭐지?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어째서 내 꼬맹이가 분홍 머리랑 입술을 부대끼고 있는 건데?

혼란에 빠져서, 들고 있던 접시를 엎을 뻔했다.

리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리질을 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누군가 리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형, 일어나.”

“필립?”

막내인 필립이다.

트레이드 마크인 뽀글 머리를 포기하고, 스트레이트 펌으로 곧게 폈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미소년 같은 모습이다.

“언제 샵에 들렀냐? 아까 전까지만 해도 곱슬머리였잖아.”

“잠꼬대 그만하고 일어나. 대표님이 찾아.”

“무슨 잠꼬대?”

“회사에 하랑이 찾아온 거 같더라.”

하랑이?

하랑이는 저기에 체이하고 같이…….

고개를 돌렸지만, 두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그제야 비현실적인 꿈의 세상이 붕괴하고, 리첼을 현실로 돌려보냈다.

앓는 소리를 낸 리첼이.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후 연습을 마치고 소파에서 잠깐 쉰다는 게, 깜빡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또렷해지는 시야로, 꿈속에서 보았던 필립의 모습이 들어왔다.

“끄응……. 나 오래 잤냐?”

“아주 코까지 골면서 꿀잠 자더라. 얼른 일어나서 세수라도 하고 와. 눈곱도 좀 떼고.”

소파 아래로 발을 디딘 리첼은, 편두통이 오는 이마를 움켜쥐며 말했다.

“애들 불러. 야간 연습 들어가야지.”

“형이 의욕 만땅인 건 알겠는데, 이러다 컴백하기도 전에 쓰러지겠어. 오늘은 우리도 파업이야.”

“뭐?”

인상을 쓰는 리첼의 눈앞에, 필립이 손바닥을 펼쳐 흔들었다.

리첼이 인상을 찌푸리자, 필립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깼네. 얼른 대표실로 가 봐. 하랑이 왔어.”

“하랑이가 여길 왜 와? 그전에……. 걔가 대표실에 왜 있는데?”

“난들 아나. 형 보러 왔다가 대표님한테 걸렸나 보지. 암튼 우리는 정리하고 들어간다. 둘이서 데이트하고 천천히 들어와. 미국 가면 한동안 못 볼 거 아냐.”

* * *

- 똑똑.

“들어와.”

이문학의 허락을 받고, 리첼이 대표실로 들어섰다.

포스트 뮤직의 대표실은 항상 은은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루밍으로 옮기고 난 뒤의 대표실에서는 방향제의 꽃향기가 그윽하게 퍼진다.

이문학이 금연을 선언한 건 아니지만, 장소를 불문하고 담배를 꼬나무는 습관은 많이 고쳐진 모양이다.

응접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문학과 하랑이 마주 앉아있는 모습은, 리첼에게도 많이 낯선 그림이었다.

“대표님, 절 찾으셨다고…….”

“일단 앉아.”

리첼은 하랑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그루밍 사옥에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얼굴을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댄 이문학이,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투 샷이 나쁘진 않네. 이하랑, 연말 시즌에 리첼하고 스페셜 무대 준비해 보는 건 어때? 레몬에 협조 요청할 테니까.”

하랑이 떨떠름한 투로 대답했다.

“신소리하실 거면 그냥 일어납니다?”

“까칠하긴. 리첼, 너는 생각 있어?”

평소라면 시켜만 달라고 말했을 리첼이, 오늘은 웬일로 과묵했다.

하랑에게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말에는 클라우드가 한국에 없습니다.”

마치 하랑에게 말하는 듯했다.

이문학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그건 그때 가서 봐야지. 결과가 시원찮으면 강제로라도 불러들일 거야.”

“아뇨. 기왕 이렇게 된 거, 1위 찍기 전엔 안 돌아와요.”

“고집은…….”

리첼이 이문학의 말을 끊고서 입을 열었다.

“저희 쇼케이스 준비하느라 시간이 부족합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빨리하세요. 그리고 하랑이는 왜 부르셨어요? 시트러스밤도 컴백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인데.”

“내가 부른 거 아냐. 너랑 이야기하고 싶다면서 제 발로 찾아왔지.”

이문학이 하랑에게 시선을 돌리며 재차 물었다.

“안 그래?”

아무렇지 않게 바통을 하랑에게 넘겼다.

하랑은 노골적으로 불만 가득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왕이면 대표실 말고, 편한 곳으로 부를 것이지.

레몬 엔터보다 더 높은 빌딩이니, 비어있는 회의실도 많을 거 아냐.

“대표님.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여기가 내 방인데?”

“그러니까 나가 달라고 부탁하잖아요. 대표님 방이 아니었으면, 강제로 쫓아냈죠.”

어처구니없는 궤변에 이문학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캐릭터야. 맘에 들어.”

이문학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문을 닫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희 둘. 아무도 없다고 수상한 짓 하면 안 된다? CCTV는 없지만, 다 아는 수가 있어.”

이문학이 턱으로 대형 벽 거울을 가리켰다.

하랑은 이 방 안에 오대식이 있음을 곧바로 알아들었지만, 리첼은 ‘저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문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리첼이 먼저 말을 꺼냈다.

“평소에 저러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따라 텐션이 올라가 계시네.”

“웃으며 살기로 마음먹었나 보지.”

‘남은 생에는 말야.’라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다. 저 양반은.

하랑이 조심스럽게 리첼을 불렀다.

“리첼 선배.”

“선배 호칭 떼고, 이름만. 이젠 네가 격식 차려서 날 부르면, 심장이 먼저 반응해서 철렁 내려앉아. 또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리첼의 말에, 죄책감이 사무치게 밀려드는 하랑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밀당으로, 끊임없이 상처받은 리첼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리첼.”

“말해.”

“클라우드가 북미 진출한다는 이야길 들었어. 혹시 그게 나 때문이면…….”

“너 때문이면 관두라는 이야길 하러 온 거야?”

리첼이 하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하랑이 먼저 눈길을 피했다.

차마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리첼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것도 가스라이팅이나 다를 바 없다.

다행히 리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해외 진출이 장난이야? 자칫 실패하면, 그간 클라우드가 쌓아 올린 명성 전부가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야. 물어뜯기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배가 터질 만치 떡밥을 던져주는 꼴이겠지. ‘클라우드도 결국, 국내 한정 여포구나.’, ‘거품이란 걸 증명했다.’ 무슨 악플이 달릴지, 벌써부터 훤히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가 해외로 향하는 건…….”

리첼이 피식 웃으며, 하랑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야!”

“이하랑, 너 때문이야. 책임져라.”

책임져라. 책임져라. 책임져라.

리첼의 마지막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딱밤을 맞았는데, 아무런 감각이 안 느껴진다.

생각 없이 쌓아 올린 업보가, 착실하게 살아온 네 사람의 인생 위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책임질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버렸는데?

그나저나, 여기가 레몬 대표실보다 화려하네?

인테리어 비용이 꽤 많이 들었겠지?

와……. 조명에 날파리 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하랑의 멘탈이 실시간으로 깨져나갔다.

평소라면 합리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았을 하랑은, 업보의 홍수에 휩쓸려 하염없이 떠내려가는 중이었다.

하랑의 동공에서 빛이 사라진 걸 확인한 리첼이, 다급하게 하랑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뭐야? 얘, 왜 고장 났어? 농담 한마디 했다고, 정신을 놓으면 어떡해! 정신 차려, 인마.”

“농담……?”

“당연히 농담이지. 우리도 승산이 있으니까, 도전하는 거야.”

리첼이 품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한동안 핸드폰을 조작해서, 하랑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봐. 오늘 자 빌보드 차트야.”

[99. Pygmalion – Klaud X]

빌보드 차트가 정리된 웹페이지다.

클라우드의 노래가 99위로 차트인(Chart-in) 되어있다.

시원찮은 성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핵심은 저 피그말리온이라는 노래가 2년도 넘은 클라우드의 노래라는 거다.

생소한 한국어 노래가.

그것도 2년전에 히트를 치고 사라졌던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태평양을 건너 북미 대륙의 음악 차트에 올라갈 확률은 얼마나 되는 걸까?

하랑이 리첼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클라우드가 해외시장에서 완전히 무명인 것은 아니다.

홀리데이만큼은 아니지만, 해외에도 레이니아가 존재한다.

빌보드 글로벌 탑 100에 차트인(Chart-in) 시킬 만한 화력이 부족할 뿐.

리첼이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틱택톡 이라고 알아? 어스튜브를 따라잡겠다고 선언한 영상 플랫폼이야. 우리가 포스트로 이적했을 때, 틱택톡에서 저작권에 대한 문의가 왔었어. 틱택톡에 클라우드의 음악을 사용해도 되냐는 문의였지. 공짜로 홍보해 주겠다는데, 안 할 이유가 있나.”

그루밍은 저작권 협회를 통하지 않고, 별도로 라이센스 협의를 하는 유일한 대형 기획사다.

그루밍의 자회사인 포스트도, 마찬가지의 정책을 따르는 중이고.

하랑이 아는 척을 했다.

“그거 챌린지인가 뭔가 하는 유치한 시리즈로 화제가 된 플랫폼이잖아.”

“맞아. 그 유치한 챌린지 콘텐츠에서 우리 노래가 대박이 터졌어. 피그말리온 댄스를 커버하는 챌린지인데, 해외 셀럽들이 참여하는 바람에 우리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가는 중이야.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랬다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간단히 말해서, 역주행 중이라는 뜻이다.

무명 걸그룹 에버로즈의 글로벌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마중물이 시원하게 부어졌으니, 펌프질만 잘하면 빌보드 점령도 마냥 꿈같은 소리는 아니다.

커리어를 걸어봄 직하다.

그런데…….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회사에서는 왜 반대하는 거지?

“이 좋은 기회를 그루밍에서는 왜 반대해?”

리첼이 생뚱맞은 소리를 들은 것 마냥, 하랑을 쳐다봤다.

“회사가 반대를 왜 해? 이거 우리 대표님이 푸쉬하는 기획인데……. 덕분에 로드맵도 다 어그러져서 직원들도 밤샘 작업하고 있어. 녹음도 영어 가사 넣어서 다시 해야 하고, 뮤비도 다시 찍어야 해.”

아놔, 이문학 이 양반!

날 또 속였어!

모든 상황이 삽시간에 파악되었다.

해외 진출을 포기하도록 설득해 달라는 소리는 전부 헛소리였다.

강행군으로 지친 리첼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게 더 합리적이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라는 의미다.

이 계획을 수립한 놈은, 전후 사정을 모두 꿰고 있는 오대식.

그놈이겠지.

지긋지긋한 악마 놈.

이젠 보이지도 않는데, 끝까지 날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겠냐?

‘내가 만난 인간 중에, 네가 리액션이 가장 찰지다니깐?’

거울 속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도 불쾌하진 않다.

클라우드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도박에 베팅을 했다.

이문학이 클라우드를 아끼는 한, 이 친구들은 프라이데이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하랑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다 망치는 건 줄 알았잖아.”

“설마…… 네가 빌보드 1등 찍고 오랬다고, 우리 팀 끌고 미국 가는 건 줄 알았어? 꼬맹이 주제에 자의식이 과해. 과해도 너무 과해.”

“아니면 됐어. 사람들은 나만 보면 놀리고 싶은가 봐. 싹 다 집단 괴롭힘으로 고소해 버릴까 보다.”

긴장이 풀어져서 소파에 축 늘어진 하랑을, 리첼이 뚫어지게 쳐다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 하랑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리첼이 하얀 치열을 드러내고 살갑게 웃었다.

“넌 진짜 미워하래야 미워할 수가 없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빌드업 하지 말고, 알아듣게 말해.”

리첼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 때문에 미국으로 가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날 했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 1위 찍고 오면 나랑 사귀어준다는 약속.”

아니, 왜 또 이야기가 거기로 새?

이참에 아예 못을 박아버려야겠다.

“저기……. 리첼. 난 말이야.”

별안간 허리를 굽힌 리첼의 얼굴이, 하랑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왔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어. 그게 여자라도 상관없고. 이번만큼은 절대로 양보 못 해.”

리첼의 입술이 훅 다가왔다.

하랑이 기겁하며 손을 뻗었지만, 리첼의 얼굴을 밀어내기 직전에 팔이 굳어버렸다.

내면의 장광호 씨가 리첼에게 힘을 쓰는 걸 거부해 버린 거다.

리첼의 입술이 바짝 다가오고, 하랑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던 입술에는 아무런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감은 눈꺼풀 위로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눈꺼풀 위에 닿은 입술의 감촉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음에 자괴감을 느끼는 하랑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눈꺼풀을 바들바들 떠는 하랑에게 리첼이 말했다.

“우린 이렇게 시작하자. 남들보다 천천히.”

얼굴이 빨개진 하랑이, 입술이 닿았던 눈꺼풀을 손으로 문질렀다.

‘1위만 안 하면 돼. 1위만……. 절대로 불가능하지. 프라이데이도 못 한 일인데 클라우드라고 다를까……. 리첼 이 자식.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이번 한 번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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