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인데 악마와 계약했습니다-374화 (374/376)

374화. 후일담 (4)

- 오늘 새벽 6시, 파양호에서 신원 미상의 사체 한 구가 낚시를 하던 시민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체를, 1년 전 약물 유통 및 살인 청부 혐의로 수배되었던 이한성 씨로 확인하고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 레몬 엔터는 금일 공시를 통해, 그루밍 엔터 최대주주인 고(故) 이문학 대표의 지분 18.2%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고 이문학 대표는 이한성 씨로부터 주식을 헐값으로 매입했고, 이한성 씨의 실종 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랐습니다. 최근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된 바 있습니다.

- 클라우드 엑스의 신곡 ‘Tiger Girl’이 음원 공개 일주일 만에 빌보드 아시아 차트 1위, 글로벌 차트 4위에 랭크되었습니다. 작년 11월, K-Pop의 세계화를 선언하며 해외 진출에 나섰던 클라우드 엑스는, 빌보드 차트 2위라는 성적으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올해에는 글로벌 1위를 달성해, K-Pop의 위상을 다시 한번 드높이길 기대해 봅니다.

“에이……. 엿 됐네. 미국 애들은 왜 클라우드 노래를 좋아하는 걸까요? 한국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하랑이 대기실의 TV를 보며 투덜거리자, 희영이 히죽거렸다.

“내심 좋으면서 그런다. 월드 랭킹 1위 가수랑 사귀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완벽한 서울말.

방송에서만 서울말을 구사하던 희영은, 어느덧 사석에서도 서울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투리 억양은 여전히 묻어나지만.

하랑은 입매를 삐죽거리며 말했다.

“본인 자랑이죠?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내가 대표님한테 말해서 언니 SNS 금지시키라고 할 거예요.”

“적어도 넌, 내 편 들어줘야지. 동병상련 몰라?”

“동변상련은 무슨……. 동반쌍년이겠죠. 홀리데이에 이어서 레이니아가 우리 안티로 돌아섰잖아요. 여우같은 년들이 쌍으로 리첼하고 이욱 선배 채 갔다고. 난 진짜 아닌데.”

희영이 하랑의 푸념을 무시하고, 핸드폰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지창현의 뉴스타그램 페이지가 화면에 떠 있다.

“창현 선배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이욱 오빠 피드마다 ‘좋아요’를 눌렀어. 시트러스밤이 다 팔로우되어 있는데, 나만 언팔했고. 이거 멕이는 거 맞지?”

하랑이 짓궂게 대답했다.

“창현 선배가 언니 좋아했나 보네. 이욱 형하고 열애설 터지니까, 심술부리는 거고.”

“그렇지? 어쩐지 날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더라니.”

“한번 대쉬해 봐요. 이욱 형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사탄이냐? 그 입 다물라.”

의상 점검을 마치고 돌아온 체이가 소파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희영과 하랑 사이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틈을 벌려 앉았다.

희영이 진저리를 치며 옆으로 이동했다.

“아우……. 언니. 저쪽에도 자리 많잖아요.”

“하랑이 옆에 앉을 거야.”

“아니, 이 언니는 어떻게 갈수록 애가 돼? 나 진심으로, 과묵했던 체이 언니가 그리워요.”

“과묵했던 체이는 죽었어. 하랑이 내 거야. 이상한 헛바람 넣을 거면 저리 가. 훠이.”

기어이 희영과 하랑 사이를 비집고 앉은 체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만두 머리를 한 치토세가 달려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뽕스, 젤리 먹을래?”

치토세의 호칭에 체이가 발끈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왜? 감귤단도 다 좋아하던데.”

겁대가리를 상실한 치토세는, 언젠가부터 체이를 본명인 봉순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봉순에 된소리가 섞여 뽕순이 되었고. 급기야는 뽕스로 굳혀졌다.

치토세가 부르던 호칭이 브이로그 콘텐츠로 업로드된 이후부터는, 감귤단 전체에 체이를 부르는 애칭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에 체이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발음이 조금 뒤틀리긴 했지만, 아무렴 어때.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체이에게 허당 같은 이미지가 더해진 건, 전부 치토세 덕분이다.

이제야 사람 냄새가 좀 난다.

치토세는 작은 상자에서 초록색 콩알 젤리를 꺼내, 직접 체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짜증을 부리는 것 같던 체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콩알을 날름 받아먹었다.

“맛있지, 뽕스?”

“사과 맛이야? 맛있네. 하랑이도 줘.”

치토세가 하랑의 입에도 연두색 젤리를 넣어주었다.

아기 새처럼 젤리를 받아먹은 하랑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급기야는 손바닥에 젤리를 뱉어냈다.

“에퉤퉷. 이게 무슨 맛이야?”

“연두색은 아마도 코딱지 맛? 이거 미국에서 직수입했어. 귀지 맛도 있는데 먹어볼래?”

하랑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치토세를 노려봤다.

“김토세, 이리와. 이참에 미국으로 보내줄게.”

치토세가 잽싸게 대기실 바깥으로 튀었고, 벌떡 일어난 하랑이 사냥을 시작했다.

흔한 시트러스밤 대기실의 풍경이었다.

* * *

프라이데이 리유니온(Friday Reunion)의 대기실.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단발머리의 여성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하민 오빠, 시간 괜찮아?”

시트러스밤의 루비였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프라이데이 신규 멤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다섯이서 하나! 하나에서 다섯으로! 다섯 개의 빛나는 별 프라이데이입니다!”

오늘이 데뷔 무대라, 많이 긴장해 있던 모양이다.

루비가 리허설 사이사이에 들를 때마다, 여지없이 씩씩하게 캐치프레이즈를 포함한 인사를 건네고 있다.

루비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저한테는 앞으로 그거 하지 마요. 오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 같잖아.”

화장대 앞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지창현이, 심술궂게 입을 열었다.

“시위 맞아. 너랑 하민 형이랑 꽁냥대는 거 보고 있으면, 애들이 뭘 배우겠냐? 마음 놓고 연애해도 되는 줄 알 거 아냐.”

지창현이 거울에 반사된 신입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쟤 말 듣지 말고,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한텐 무조건 인사해. 특히 감귤 애들한테는 대기실이 떠나가라 부담스럽게. 알겠냐?”

“넵!”

군기가 바짝 든 신입들의 대답이 이어지자, 루비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동기끼리 진짜 이럴 거야? 하민 오빠한테 다 이른……. 오빠는 어디 갔어?”

파티션으로 구분해 놓은 탈의 공간을 비롯해, 대기실 어디에도 류하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루컷으로 머리를 밀고 하얗게 탈색까지 한 남자 멤버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프라이데이를 뽑는 오디션에서 우승하고 데뷔한 ‘태인’이다.

“하민 형은 여동생분하고 잠시 나가셨습니다. 매점에 들른다고 했으니 금방 오실 거예요.”

“저 기생오라비가 후배님들을 얼마나 휘어잡았길래, 다 표정이 굳어있어?”

“저흰 괜찮습니다!”

지창현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괜찮다잖아. 원래 신입일 때는 긴장 좀 하고 있어야 실수가 줄어.”

“실수 같은 소리 한다. 너 데뷔 무대 때, 마이크팩 빠져서 허둥대던 건 기억 안 나? 어스튜브에도 박제되어 올라갔잖아.”

“그, 그건 솔직히 내 실수가 아니라, 의상 점검 제대로 안 한 코디 실수지.”

대기실에 잔잔한 웃음이 흐를 무렵, 하민과 이나가 쮸쮸바를 나란히 입에 물고 대기실에 들어섰다.

루비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오빠! 이나도 같이 있었네?”

하민이 이나에게 아이스크림 봉투를 건넸고, 이나는 프라이데이 멤버들에게 다가가 아이스크림을 나눠주었다.

하민은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긴 왜 또 왔어?”

“또라니……. 섭섭하게시리. 사녹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왔지. 세트는 화려해? 프라이데이 네임벨류은 톡톡히 쳐주는 것 같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입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하민이, 루비를 대기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통로를 지나가는 스태프들의 눈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하민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자기야, 보고 싶다고 자꾸 찾아오면 안 돼.”

“어차피 시트러스밤도 알고, 프라이데이도 알잖아. 여기서 뭘 더 감춰?”

“팀원들이야 상관없지. 어디서 소문내고 다닐 애들도 아니고. 하지만 방송국에는 보는 눈이 많잖아.”

루비가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 진짜 너무한다. 날 정말로 사랑하긴 하니?”

“아니, 당연한 걸 왜 물어?”

“공식적으로 밝히고, 교제할 생각은 있고?”

류하민이 난감한 듯 입을 꾹 다물자, 루비가 다시 쏘아붙였다.

“오빠 하나만 보고 6년을 기다렸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꿈을 접을 뻔했던 것도 나고, 오빠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것도 나야. 내가 뭘 얼마나 더 기다려?”

“저기, 루비야……. 딱 1년만. 프라이데이가 다시 자리 잡을 때까지만이라도……. 프라이데이, 이제 겨우 다시 시작했어. 나한테 시간을 좀 주라.”

애원하는 하민을 루비가 샐쭉하게 흘겨보았다.

“오래 안 기다릴 거야. 이번 활동 끝나기 전에 자리 잡아. 국민 아이돌 류하민,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 확실히 보여주고, 나한테 돌아와.”

류하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망하고 나서 나한테 빌붙기만 해봐라.”

루비가 하민의 무대의상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바가지 박박 긁을 거야.”

헤어지겠다는 말은 절대로 꺼내지 않는 루비였다.

넥타이를 더 세게 잡아당겨, 하민이 저절로 허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격렬하게 부대끼고, 립스틱이 엉망으로 묻어나고 있다.

- 끼익…….

별안간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고, 하민과 루비는 입을 맞추고 있는 상태 그대로 얼어붙었다.

“혹시나 해서 따라와 봤더니……. 재데뷔 첫날부터 잘하는 짓이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호텔을 잡으세요, 오라버니.”

류이나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하민이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손등으로 격하게 문질렀다.

“이나야, 이건…….”

“또 변명한다. 오빠는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이 없어. 무조건 루비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해. 나도 새언니 맞을 준비는 충분히 됐어.”

이나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붉히고 있는 루비에게 말했다.

“시트러스밤 전원 호출이에요. 인수 오빠가 대기실로 모이래요.”

* * *

“방금 희재 씨한테 연락이 왔어.”

허인수가 서두를 떼자, 치토세가 그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희재 언니, 다시 우리 매니저로 돌아오는 거야?”

희영이 치토세의 머리를 ‘꽁’ 하고 쥐어박으며 말했다.

“바보냐? 이제야 적성을 찾았는데, 매니저로 왜 돌아오겠어?”

어리바리 배희재는 작년 이맘때쯤, 매니저에서 연기자로 보직을 옮겼다.

레몬 엔터의 아티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난 김중식의 변덕이었을 수도 있고, 미녀 매니저로 이름을 날린 탓일 수도 있다.

시트러스밤의 매니저 출신이라는 특이한 경력은 배희재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호재로 작용했다.

배희재는 레몬 엔터라는 이름에 힘입어, 첫 작품부터 드라마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사를 까먹거나 연기가 서툴러서, 감독에게 갈굼받지 않을까 걱정할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연을 펼쳤고,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아 분량도 크게 늘어났다.

너무도 뜬금없이 일약 스타덤에 오른 거다.

허인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도 있을 거야. 배희수 씨라고……. 희재 씨 쌍둥이 오빠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어.”

“아, 알아요, 그분. 작년 워크숍에 스태프로 따라오신 분이잖아요. 자료 조사하는 거라면서.”

고작 한번 마주친 게 전부지만, 하랑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사람이다.

배희재와 많이 닮았고, 남자치고는 체력이 형편없었다.

TV에 출연한다고 했었는데, 실제로 출연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배희재가 계속 매니저로 있었다면, 근황을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갑작스럽게 사망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허인수가 계속 말을 이었다.

“희귀병을 앓았던 모양이야. 회사에 영입된 지 얼마 안 돼서 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연기자 활동은 전혀 못 했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희재 씨가 오빠의 꿈을 대신 이뤄주겠다고 연기자에 도전한 것 같아.”

소진이 안타까운 어조로 물었다.

“그 오빠라는 분은 계속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거예요?”

“아마 루게릭병이라고 했던가? 온몸이 마비돼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나 봐.”

허인수가 멤버들의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일도 새벽에 일어나서 사녹 참가해야 하는 건 아는데……. 한 명 정도는 대표로 장례식에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아. 기레기들한테 트집 잡을 건덕지를 줄 필요는 없으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인성 파탄 걸그룹’이라고 날조해서 기사를 쓰고도 남을 놈들이다.

배희재가 유명인이 되었으니, 배희재를 공격할 수도 있다.

소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제가 리더니까, 대표로 제가 갈게요.”

“그래. 오늘 스케줄 다 끝난 다음에, 빨리 갔다 오자.”

하랑이 머뭇거리다 손을 들었다.

“저도……. 갈게요.”

“부모상도 아닌데,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다.

떼어놓고 봤을 때는 몰랐던 부분이 갑자기 연결된 느낌이다.

배희재가 갑자기 연기에 도전한다고 매니저를 그만뒀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희재 언니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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