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세력전 개시
이검봉이 고색이인의 의견에 대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놈들이 요즘 기세가 좋다지만, 우리 흑풍채가 전력상 우위에 있다. 흑풍채에는 취력경이 마흔 명이나 되잖아. 전반적인 실력을 따져봐. 우리가 훨씬 강해.”
이검봉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세웠던 작전 기억나? 철포삼 3경을 돌파한 사람들이 맨 앞에서 쳐들어가고 만천비우 3경을 익힌 사람들이 그 뒤에, 그리고 나머지는 양쪽으로 갈라져서 쳐들어가는 거야. 그렇게 진형을 갖춰서 돌파하고, 산 위에만 도착하면 우리가 무조건 이겨.”
중원묘인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일단 계획대로 한 번 밀어 붙여보자. 상황을 잘 지켜보다가 순발력 있게 대처하기로 하고.”
중원묘인봉은 주변의 동료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의 실력도 이제 많이 강해졌어. 적의 고수가 나타나면 빠르게 대처하자. 그래야 우리 쪽 사상자를 줄일 수 있어.”
대장들은 방침을 정한 이후, 각 소대에 작전 계획을 알렸다.
작전 계획을 전해들은 플레이어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저마다의 병기를 빼 들고 호산으로 달려 나갔다.
“칠살! 칠살! 흑풍채가 지나는 곳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으리!”
“흑풍채 만세!”
병기를 들고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흑풍채 플레이어들. 거침없고 광포한 모습이 진짜로 흉포한 산적 같았다.
멀리서 구경하던 플레이어들은 이들의 실감나고 생동감있는 모습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특히 흑풍채 산적들의 함성과 구호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광고 구호처럼 귀에 익고 계속 멤도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산 아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시작된 흑풍채의 돌격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것들이 포문을 열었어. 공격하려나 봐.”
이들도 다 게임을 활발하게 참여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PK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종무세계의 특성상 무학의 위력과 전략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무학의 특성을 살린 전략을 사용해야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흑풍채의 산적들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열혈회의 열혈가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멍청한 것들이 겁도 없이 달려드는군. 우리 열혈회의 전반적 실력이 놈들에 비해서 떨어지는 건 맞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지리적 이점이 있지. 누가 이길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신색은 마치 승기를 잡은 것처럼 자신감 있게 웃으며 말했다.
“흑풍채 채주가 선제공격을 계획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아무리 흑풍채라도 해도 우리의 방어선을 쉽게 뚫을 수는 없을 거야.”
신색은 병력 앞으로 나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돌을 굴려라!”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미리 준비해 놓은 바위를 흑풍채 플레이어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산 아래로 투하했다.
쿠르릉 쿠릉.
바위는 굉음과 함께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 모습을 본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크게 흥분했다. 그들은 흥이 오른 표정으로 목을 길게 빼고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수라장이 됐을 산 밑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쿠르릉 쿵쿵.
요란하던 굉음이 잦아든 후, 싱글벙글 웃던 신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실은 신색의 상상과 달랐다.
신색은 고서에 나온 방식대로 돌을 투하할 위치나 크기를 선택했지만, 대부분의 돌은 적에게 명중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돌들은 나무 사이에 끼어 제대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밑에 있던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일찌감치 투석에 대비하고 있었다. 산에서 굉음이 들려오자마자 서둘러 팔보간섬을 시전하며 몸을 피했다.
열혈회의 돌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백색광이 되어 사라진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신색의 예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주변의 구경꾼들도 처음에는 커다란 굉음과 섬뜩한 광경에 말을 잃었으나 곧바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저게 뭐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웃겨 죽겠네.”
“열혈회 녀석들, 정말 형편없군. 호산 산채를 무너뜨린 것도 희한하네? 그냥 운인가?”
“열혈회는 이제 끝났구만. 저대로 흑풍채가 산 위로 올라가면 상황은 끝이야. 대형 세력전이라서 제법 기대했는데, 싱겁게 끝나겠는걸?”
***
중원묘인봉은 멀지 않은 곳에 굴러 떨어진 바위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에잇, 뭐야! 놀랐잖아. 그냥 소리만 요란하네!”
중원묘인봉은 부하들에게 즉시 돌격할 것을 명했다.
그 모습을 본 열혈가지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궁수들 준비해. 놈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주저하지 말고 쏴버려.”
열혈회의 궁수 다섯 명이 활을 들고 준비했다. 이들은 산 아래서 올라오는 적군을 바라보며 흥분과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열혈가지는 어렵게 구한 다섯 명의 궁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는 저들을 저지할 수 없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위기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자 전에 우연히 만났던 어느 고수가 떠올랐다.
‘만약 이번 세력전에서 패배한다면……. 우리를 지켜달라고 하고 대신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나? 하지만 그 고수를 통해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을 물리친다 해도, 흑풍채에는 그 유명한 강대력 채주가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흑풍채 채주의 상대가 될까?’
열혈가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길한 일보다는 흉한 일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열혈가지는 답답한 심정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강호가 흉험한 건 맞지만,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잖아. 산적 따위가 다른 지역까지 부하들을 파견하다니……. 무슨 산적이 이렇게 강하고 과감해? 애초에 이게 NPC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이게 말이 돼?’
***
슉 슉슉.
산 위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멈추지 말고 돌격해!”
“철포삼을 익힌 애들이 앞장서! 뒤에 있는 애들은 서둘러 올라가!”
“가자! 돌격!”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늑대처럼 재빠르게 산을 올랐다.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내기 소모가 적은 팔보간섬을 펼치며 이동했다.
철포삼을 시전한 백여 명의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손에 단도와 도끼를 들고 맨 앞에서 화살을 방어했다.
열혈회 궁수들은 화살에 불을 붙여 날려보기도 했지만 철포삼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이들은 급소를 공격당하지만 않으면 웬만한 공격은 거뜬히 버텨낼 수 있었다. 게다가 산채에서 제작한 옥로환을 한 알 복용하면 황소가 산을 넘는 것처럼 힘이 넘쳤다.
열혈회의 궁수들은 힘차게 활을 쐈지만, 흑풍채의 산적들을 단 한 명도 사살하지 못했다.
오히려 흑풍채의 산적들이 산중턱까지 빠르게 밀려오자 궁수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열혈회의 고위층과 플레이어들의 얼굴에도 실망감이 묻어났다.
이제 슬슬 흑풍채의 위풍당당한 함성이 제법 가까워졌다. 등골이 절로 오싹했다.
돌을 투하하고 활을 쏴도 적들을 물리치지 못하자, 열혈회 플레이어들의 사기는 상당히 떨어졌다.
열혈가지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쏴. 신색, 판전. 두 번째 계획으로 가자. 암기를 사용할 줄 아는 플레이어들은 산길을 막고, 나머지는 알아서 무기를 들고 움직여. 근접전이 벌어질 거다. 지금 바로 움직여!”
열혈가지는 불리해지는 듯한 형세에 위축되던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의 사기를 다시 북돋우며 지시를 내렸다.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일사불란하게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분주한 가운데 열혈가지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목소리만 들릴 뿐, 말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너무 커. 이대로는 인명 피해만 키울 뿐이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불교 종파의 하나인 밀종(密宗)의 진언처럼 들렸다. 충분한 내기가 없이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열혈가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항복할 수는 없잖아. 끝까지 싸울 거야.”
“고집은 여전하군. 그런 고집은 화만 키워.”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열혈가지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상대방이 제시했던 조건을 생각하면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열혈가지가 지금 막 시작된 전장을 바라보다가 칼을 들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호산 도처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흑풍채 플레이어들의 전투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열혈회의 플레이어들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수십 조로 구성된 소대가 벌떼처럼 달려들며, 사방에서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을 몰아붙였다.
흑풍채 플레이어들은 진짜 산적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악마와 같은 전투태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격렬한 투지가 돋보였다.
흑풍채의 산적들은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을 격살하고 두둑한 보상을 받기 위해 용감무쌍하게 달려들었다.
철포삼 플레이어를 앞세운 소대가 돌격하고 다양한 특기를 지닌 플레이어들이 보조했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자 흑풍채 플레이어들의 만천비우가 펼쳐졌다. 비황석, 독침, 수전, 송곳 등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만천비우의 공격에 당한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투구와 갑옷만 남긴 채 순식간에 백색광이 되어 사라졌다.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체계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청의루 서미의 도움이 컸다.
서미의 훈련 덕분에 오합지졸에서 벗어나 뛰어난 집단 전투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열혈회의 플레이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영을 갖춘 흑풍채의 공격에 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른 공회의 플레이어들도 섬뜩하긴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두 세력이 맞붙는 틈을 타 무언가 다른 일을 꾸며볼 생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남몰래 수군거리고만 있었다.
“흑풍채의 실력이 너무 뛰어난 거 아니야? 저렇게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잘 죽지도 않아. 지금까지 많아봐야 50명 정도 죽었나? 반면에 열혈회를 봐. 벌써 절반이나 죽었어.”
“실력 차이가 너무 커. 그렇지만 열혈회의 부활 지점은 바로 이 근처야. 지금쯤 부활해서 달려올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흑풍채도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열혈회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최근 끌어들인 고수들 덕분이라고 봐야겠지. 열혈회가 초빙한 고수는 아직 세 명밖에 안 죽었어. 다만 아직 살아남은 고수들이 죽으면 열혈회가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가 되겠지.”
열혈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던 중, 갑자기 산채 쪽에서 굉음이 터졌다.
열혈가지가 엄청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회의 몇몇 간부와 협력하여 강력한 기운을 쏟아내더니 순식간에 흑풍채의 실력자 한 명을 죽여버렸다.
주변의 구경꾼들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저건 무슨 무공이야?”
열혈가지가 뿜어내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열혈가지에게로 향했다.
‘무슨 비기라도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