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패절당의 당주
게임이 진행될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패절당이 아니라 흑풍채였다.
플레이어들의 성장 속도는 NPC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패절당 당주의 실력은 이미 보통이 아니잖은가. 어떻게 봐도 흑풍채 채주보다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로 흑풍채 채주가 저 자리에 나타나면 순식간에 패절당 당주의 손에 죽을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플레이어 공회의 사람들은 오히려 패절당이 흑풍채를 멸망시키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찌 됐든 패절당은 세가 재단이 전력을 다해 발전시킨 플레이어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익을 따져볼 때 세가 재단과 플레이어 공회 사이에는 협력할 기회가 많았다.
이러한 관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종무세계에 관한 놀라운 정보들이 터져 나오면서, 관련된 이해관계의 사슬은 점점 더 커졌고 투입된 자본도 점점 더 많아졌다. 이제는 종무세계를 하나의 평범한 게임으로 볼 수도 없는 사람이 많았다.
종무세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세가 재단의 권위도 커졌다.
그리고 수많은 플레이어 공회들이 그 옆에서 단물을 빨고 싶어 했다.
게임을 운영하는 세가 재단이 배포했던 고서와 메뉴얼들은 유력한 플레이어 공회들에게는 미리 전달되었으나, 일반 게임 플레이어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공회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이 모든 것들이 불공평하다고 느꼈지만 기껏해야 재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을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종무세계에서 각자의 이익을 찾아 떠났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종무세계 현실이었다.
이렇듯 플레이어 공회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했다. 세가 재단과 힘을 합쳐 종무세계를 개발하고 그 과정 속에서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욕설을 퍼부을 때도 공회의 사람들은 득실을 따지며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
마침내 패절당 당주가 화려하게 등장해 직접 나서니, 패절당을 비롯한 공회를 지지하는 플레이어들은 다시 한번 기세를 올렸다.
반대로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흑풍채에 남아 승전보를 기다리던 플레이어들도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은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이 승리하면 들어올 임무 보상에 대한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상상치도 못한 패절당의 등장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흑풍채 플레이어들의 교류방은 몹시 시끌벅적했다.
이들은 패절당을 향해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장에 나가 있는 동료들을 구할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흑풍채 채주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나 강대력의 실력이 강력하고 위세가 대단한 건 맞지만, 그럼에도 NPC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무열을 잡으러 숙주로 향한 뒤부터 감감무소식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채주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
패절당 당주에게 붙잡힌 중원묘인봉를 비롯한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호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의기소침해 있었다.
이들은 흑풍채 감옥에 갇힌 패절당 플레이어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강호 교류방에서 울분을 토해냈다. 앞으로 패절당의 플레이어들을 잡으면 대학살을 펼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동시에 이들에게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과연 흑풍채 채주가 이들을 구하러 올 것인가?
흑풍채 채주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대로의 인물이라면, 자신의 부하들이 인질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종무세계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설령 흑풍채 채주가 온다고 해도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과 겨울이 지나, 새로운 봄이 올 때쯤에나 도착하지는 않을까?
산꼭대기에서 붙잡힌 흑풍채의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들고 먼 하늘만 바라봤다.
서역의 땅은 넓고 가을은 더욱 쓸쓸했다.
광활한 하늘은 먹구름에 가려져 우중충했다. 먹구름은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심하고도 빠르게 흘러갔다.
강대력은 마응을 타고 호산에서 백 리쯤 떨어진 하늘을 빠르게 날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참,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내 수하들이 십중팔구 승전보를 알릴 줄 알았더니 이런 대어가 나타났군.”
강대력은 강호 교류방에 올라온 패절당 당주의 영상을 확인했다.
“패절당 당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약해. 가의신공을 완벽하게 수련하지 못했나 보군. 패절당 당주를 잡아다가 가의신공을 캐내거나 아니면 그가 가진 공력을 빼앗으면 어떤 재미난 광경이 펼쳐질까?”
강대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마치 맹호가 사냥감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강대력은 종무세계에 전생한 이후로 줄곧 세가 재단의 흔적을 쫓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그는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며 종무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그리고 이 위험천만한 세계에서 산적이나 청의루 살수의 신분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강대력은 서두르지 않고 CBT가 시작되기 전까지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했다.
애써 자신의 성장과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했고 끊임없이 남들과는 다른 뭔가를 만들려 했다.
강대력에게는 스스로가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이 세계에서 자리 잡고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세가 재단을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전 생을 돌이켜보면 패절당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행보는 장차 그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가 재단에서 가장 주력으로 운영하던 세력인 패절당의 당주를 불러내고 싶어 했다.
그를 통해 플레이어들의 주의와 시선을 끌고, 나아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강대력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플레이어 공회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세가 재단의 행동이 이치에 맞느냐 틀리냐보다 그 속에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가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나 개인 플레이어들은 달랐다. 플레이어들에게는 이익도 중요하지만 감정이나 성취감이 더 중요했다. 어쨌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잖은가.
강대력은 이런 플레이어들의 정서를 잘 파악해서 유도하면 패절당에 적지 않는 타격을 입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가 재단이 타격을 입어야 그들의 발전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세가 재단이 종무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과거와 같다면, 강대력의 운신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억제해야만 강대력에게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올 수 있었다.
강대력이 먼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패절당을 물리치기도 했고, NPC로서는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도 아닌 신비의 인물, 패절당 당주가 직접 나섰다.
정체가 감춰진 신비 고수 패절당 당주가 CBT 단계에서 등장한 것. 이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사건이었다.
종무세계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다.
강대력인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혹시 지금이라면 아직 실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한 패절당 당주를 그가 잡을 수 있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지금 패절당 당주를 제압한다 해서 세가 재단이 망하거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종무세계의 서비스 운영측으로서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무세계에서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 세가 제단은 외부 침입자에 불과했다.
‘운영이면 다야?’
세가 재단이 정성껏 키워낸 고수인 패절당 당주를 제압하면 그들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꼭 강대력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세가 재단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패절당 당주를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다양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강대력을 태운 마응이 호산 근처에 이르렀다.
***
서쪽 하늘이 어두워지며 서서히 어둠이 내렸다.
호산의 벼랑 끝에서 검은 망토를 걸치고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눈을 감고 있었다. 패절당의 당주 청수(聽水)였다.
패절당 당주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가면은 표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가면 아래에서도 무덤덤했다. 그는 신사격기의 명상 상태에 빠진 채 수련 중이었다.
그는 수련에 미친 사람이었다.
처음 종무세계에 왔을 때, 그도 처음 몇 달 동안은 적응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학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비록 패절당이라는 주요 세력의 당주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그는 그저 틀어 박혀 좀처럼 외출하지도 않고 오직 수련에만 집중했다.
보통 사람의 취미가 대자연을 감상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라면, 그의 유일한 취미는 수련, 수련 또 수련이었다.
수련 이외에 그가 하는 일이라곤 자신이 인정한 막강한 실력의 강호 고수를 찾아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집 문을 나선 지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해서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이번 외출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의 이번 목표는 흑풍채 채주 강대력.
고작해야 산적의 두목. 패절당 당주가 직접 나설 만한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풍영이 패배했고 상심소도가 잡혔다. 패절당으로서는 이 상황이 몹시 난감했다. 이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당주 청수뿐이었다.
청수는 이런 일을 질색했다.
그러나 세가 재단으로부터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당을 위해서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상심소도가 마음에 걸렸다.
청수는 상심소도가 잠재력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패절당 당주로서, 상심소도가 그냥 버릴 인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청수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마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쐐애애액.
청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왔군. 괴수를 소유한 자, 소림의 절기와 대리단씨의 일양지, 그리고 절학으로 보이는 내공을 소유한 독특한 인물. 심지어 부활 지점을 예상해서 미리 포위할 줄까지 아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라지.”
과거 기주(冀州)에서도 이런 특이한 인물을 만난 적이 있었다.
자칭 살인신의(殺人神醫)라는 인물이었다.
그자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기를 반복했다. 당시 종무세계에 매복해 있던 재단의 구성원들을 잡아다가, 플레이어들의 죽지 않는 이유에 대한 비밀을 연구하던 인물이었다.
청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강대력의 등장으로 시끌시끌해진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런 예상할 수 없는 인물들이 있으니까, 이 세계가 매력적인 거겠지. 이렇게나 생동감이 넘치는데 어떻게 이게 그저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