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강불괴 대채주-145화 (145/218)

145화 강호를 떠난 도객

강대력이 동방불패를 보며 말했다.

“돌파했어?”

경지를 돌파했을 때 나타나는 독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기운은 시간이 흐르면 점점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동방불패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동방불패가 위풍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전화위복이 따로 없군. 다 자네가 지켜준 덕분이야. 이 은혜와 자네와 약속했던 것들은 잊지 않을 거야.”

동방불패는 규화 진기를 돌파하자 여성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더 이상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여자로 거듭났다.

목소리도 변했다. 더 이상 중성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강대력은 멈칫거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건강을 되찾았다니 그동안 공들인 보람이 있네. 하지만 나는 자네를 지키려고 오악검파와 소림사를 건드렸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동방불패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그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자네가 입은 손실은 내가 일월신교를 바로 세운 후에 반드시 갚겠어.”

동방불패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의 목표는 나야. 그러니 내가 직접 갚아줄 거야.”

옆에서 소성하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내가 다행히도 동방 교주의 독을 배출해냈으니 두 사람도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네.”

강대력이 동방불패를 데리고 농아문을 찾았을 때, 소성하는 사실 강대력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강대력보다 동방불패를 훨씬 더 중히 여겼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그가 강대력에 대해 지녔던 인상이 크게 달려졌다. 강대력은 이곳에서 바둑을 두며 인생의 경지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숭산파와 소림파의 고수들까지 물리쳤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소성하가 강대력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강대력이 주먹을 맞대며 말했다.

“제가 산적 우두머리이긴 합니다만,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동방불패도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하겠다고 했다.

소성하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는 왕어언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이내 입을 꾹 닫고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소성하는 강대력과 동방불패가 정도(正道)의 길을 걷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신념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왕어언이 비록 악명 높은 두 사람의 곁에 있었지만 매우 안전하다고 여겼다. 자신만의 신념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창피한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방불패의 상태는 양호했다. 비록 원기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실력이 한 단계 상승하였다. 그는 강기경을 돌파하여 또 다른 경지, 천인경(天人境)에 들어섰다.

종무세계에서 이 경지에 들어선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강대력은 전생에서 강기경에 들어선 후에야 이 경지의 NPC를 세 명 정도 접할 수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은 낭번운(浪翻雲), 다른 두 사람은 사왕(邪王) 석지헌(石之軒)과 천도(天刀) 송결(宋缺)이었다.

물론 동방불패도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천인경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전생에서 동방불패는 좌맹의 침마 등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강대력이 구해준 덕분에 동방불패가 천인경에 들어설 수 있었다.

경지와 전투력은 또 다른 개념이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히 볼 것도 아니었다.

강대력은 목적을 달성했기에 더 머물 생각이 없었다. 강대력 일행은 소성하에게 인사한 후, 마응을 타고 떠났다.

***

강대력이 동방불패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흑목애로 돌아갈 건가? 만약 돌아갈 생각이라면 좌맹이 한 짓을 잊지 마. 자네가 이렇게 된 건 다 좌맹 때문이야.”

강대력은 동방불패에게 좌맹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가 재단에서 당분간 강대력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곳은 운가뿐이었다. 다른 세가들은 강대력의 활동에 방해가 되니 최대한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동방불패는 비스듬히 앉아 바늘구멍에 실을 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원기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올라간 경지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당분간 흑목애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 원기가 회복되면 자네를 데리고 전에 말한 실력을 강화할 수 있는 장소로 가겠어.”

“그곳이 어디야?”

동방불패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그곳은 사람이 갈만한 곳이 아니야. 내가 아는 어떤 자도 그곳에 갔었는데, 지금쯤이면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강대력의 품에 안긴 왕어언이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사람이 아니라고요?”

강대력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 정도의 실력자가, 그것도 경지를 돌파했음에도 두렵게 느껴진다는 거야?”

동방불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봤자 나도 사람이니까.”

강대력은 크게 놀라면서도 동방불패가 말하는 그 사람과 그 장소가 궁금했다.

동방불패가 말하는 그 존재는 대체 누구일까? 생각할수록 종무세계의 깊이와 심오함은 감탄스러웠다.

동방불패가 말했다.

“내 규화보전은 신교가 화산파에서 빼앗아 온 것이야. 그래서 사실은 불완전한 무공에 불과하지. 만약 완전한 규화보전을 얻을 수만 있으면 내 실력은 한층 더 강해질 거야.”

그 말을 들은 강대력이 물었다.

“그래? 그럼 완전한 규화 보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동방불패는 강대력의 폼에 안겨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자 왕어언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동방불패는 강대력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완전한 규화보전을 얻을 생각은 없어.”

강대력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지.”

강대력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무튼 흑목애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 나와 함께 물건이나 좀 찾으러 가자고.”

“어디로 갈 건데?”

강대력이 마응의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낙양!”

“찾는 건 뭐야?”

“도보(刀譜). 패도적인 도보!”

“옛 절정산장 장주, 패도를 말하는 거야?”

동방불패의 물음은 구름 사이로 흩어졌다.

***

도시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많고

낙양의 소년들은 거리로 나와 있네.

차고 다니는 보검은 천금의 가치가 있고

입은 옷은 참으로 곱고 화려하구나.

낙양은 그 이름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주민과 여행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리의 양쪽 주막은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주막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구성진 노래와 은은한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유명한 객잔은 이미 초롱을 달고 주변을 오색천으로 장식했다. 몇몇 여인들이 입구에 서서 향기를 풍기며 손님을 끌었다.

강호인들은 이 여인들을 사랑스럽다 여겼고, 문인들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강호인들은 술을 마시고 말을 타며 칼날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강호인은 의지가 강인한 사람도 지극히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하곤 했다. 이들의 몸에서는 땀내와 피 비린내 대신 여인의 향기와 술의 향기가 풍겼다.

패도는 이곳 낙양에서 강호를 떠나 시정아치가 되었다. 그는 지난날의 비정함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처자식이 전부였다. 칼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사과 깎는 칼조차도 손에 대지 않았다.

강호를 떠났으니 더 이상 도객(刀客)이 아니었다. 칼을 움켜쥐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람이 강호에 발을 담근 이상, 어찌 은퇴라는 말로 과거의 은원을 말끔히 지워 버릴 수 있겠는가?

바람이 불었다.

날개가 십여 미터나 되는 커다란 마응이 마치 먹구름처럼 낙양의 하늘을 뒤덮더니 이내 땅을 향해 내려왔다.

그 위의 빙백옥석에 앉은 사람의 체구는 마치 작은 산처럼 거대했다. 그는 강인한 의지가 담긴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힘 있고 위압적이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검은 머리칼이 흩날리며 바늘구멍에 실을 꿰고 있었다. 미간에 위엄이 살아 있었고 표정은 덤덤하면서도 기세등등하였다.

***

낙양의 한 주택.

패도는 우물에서 물 한 통을 들어 올리는 고색이인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패도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피가 솟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낯익은 느낌.

과거 절정장(絶情莊) 장주였을 때가 절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전에 패도는 이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적에 대한 강력한 투지를 불태웠다.

패도는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패도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고(小古)야. 물통을 내려놓고 나가서 귤이나 사오너라.”

고색이인은 귤을 사러 가면서 심적 갈등을 느꼈다. 고색이인 역시 강대력이 찾아왔음을 눈치 챘다.

패도 역시 이를 눈치 챘을 터.

한 달 전, 강대력은 고색이인에게 잠복 임무를 지시했다. 패도의 곁에서 그의 신임을 얻으라는 것이 임무의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고색이인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했었다.

고색이인은 강대력의 지시에 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일을 잘했다. 그래서 고색이인이 돕기 시작한 이후부터 패도는 일상생활에 대한 근심을 크게 덜게 되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패도는 고색이인을 중히 여기며 잘해주었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고색이인도 강호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흑풍채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혈전을 치를 때만큼 뜨겁지는 않았지만, 평범하면서도 사소하고 잡다한 일들이 많았다. 고색이인은 자기도 모르게 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 그는 과일 가게를 좋아했다. 그곳에는 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는 매일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팔았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금 상해서 팔 수 없는 과일을 골라 고색이인에게 건네주곤 했다.

패도는 이 광경을 보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패도는 매일 밤 술을 마셨는데, 외롭거나 심심할 때면 고색이인을 불러 같이 마셨다.

술안주라고 해봤자 땅콩이나 누에콩이 전부였다.

고색이인이 물었다.

“다른 안주는 없습니까?”

패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니 ‘가난’ 두 글자로 답했음을 알 수 있었다.

패도는 술을 마실 때 지극히 조용했다. 마치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인생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묵묵히 술만 마시다가 안주를 먹었고, 안주를 다 먹고 나면 술자리도 끝이 났다.

침묵한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말들이 술잔에 담겨있으니까.

고색이인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침묵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침묵할 줄 아는 사람만이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색이인은 원래 본인은 게임 플레이어이고 이들은 그저 NPC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고색이인이 패도를 찾아온 것도 단지 강대력이 맡겨준 임무를 완수하고 두둑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임무가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