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별 후 월드스타-7화 (7/165)

7화(수정됨)

7화 – 역시 기적이야

출입증을 받아든 동하는 엔터 안쪽으로 들어섰다.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위로 올라가니 거의 다 없어졌다.

간간이 들리는 소리와 이따금 지나가면서 고개를 숙이는 이들이 전부였다.

엔터는 정말 넓었다.

여기저기 연습실과 휴계 공간, 그리고 다양한 복지 시설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요. 잠깐 기다려 주실래요? 안이 엉망이라 좀 치워야겠네요.”

“도와드릴까요?”

“아뇨아뇨, 이건 혼자 하는 게 더 빨라요. 금방 끝나니까 편히 앉아서 기다리십쇼.”

지아가 장난식으로 말하곤 휙 들어가 버렸다.

옆에 간이 의자가 있기에 털썩 앉았다.

안에서 뭔가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으니, 잠깐 주변이라도 둘러볼까.

화장실도 들를 겸 해서.

동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에 대고 말했다.

“지아씨. 여기 화장실이 어딘가요?”

“아, 쭉 가셔서 왼쪽이요!”

“금방 오겠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돼요! 주변도 둘러보시고!”

미소가 절로 나오는 발랄함이었다.

동하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연습실, 스튜디오······.

이 층은 무언가를 제작하거나 연습생들이 트레이닝하기 위한 곳인 것 같았다.

화장실로 가는 길은 짧았지만, 그 거리 안에 있는 것들은 밀도가 아주 높았다.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로 향하려 했을 때였다.

그로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이가 눈에 보였다.

“아······.”

“······.”

한유라.

그녀가 막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으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별다른 할 말도 없어, 동하는 눈을 피하고 걸음을 옮겼다.

딱히 갈등을 만들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 그와 한유라는 남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그녀의 얼굴을 본다고 해서 이상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얼굴이 조금 익숙한 남을 보는 수준?

‘생각보다 괜찮은 게 더 이상하네.’

그렇게 한유라를 무시하고 화장실로 들어가려 했을 때, 그를 붙잡는 소리.

뾰족한, 그리고 짜증이 가득 묻어있는 한유라의 목소리였다.

“야, 네가 여기 왜 있어?”

“······.”

“아, 대답하기 싫구나. 그래. 성민이 보러 왔거나 면접이라도 보러 왔겠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닌데. 바쁜 거 아니야?”

너무도 덤덤했다.

요즘 일이 너무 고되, 까칠하고 자기 시간이 없는 자신과 달리 동하는 너무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혈색까지 좋아진 느낌.

자연스럽게 생각이 함께 있었던 여자 쪽으로 향했다.

자신과 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옛날 버릇이 슬슬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짜증이 날 때면 항상 동하에게 풀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신입사원으로서 받는 스트레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거기다 자신 말고 다른 여성이랑 같이 있는 장면이 떠오르자, 속에서 무언가가 욱하고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유라의 입에서 싸늘한 말이 나왔다.

“그새 여자랑 노닥거리는 거 보니, 넌 날 사랑하지도 않았나 보네.”

“연애? 내가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 됐다, 서로 바쁜데 갈 길 가자.”

“허 참······저번에 봤던 여자는 그럼 뭔데? 내가 못 본줄 알았어?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저기요.”

이젠 분노에 사로잡혀 막말을 퍼붓는 한유라의 말이 심해질 때, 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팔짱을 끼고 싸늘한 표정이 되어 있는 지아가 한유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의 아우라가 그녀의 뒤에 떠있는 것 같은 느낌.

지아는 한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사원증, 아니면 출입증 줘 봐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첫째. 이곳은 연습생이나 녹음하시는 분들이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절대 정숙, 안 보이시나요?”

“······.”

“그리고 동하씨는 제가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매니저 통해서 말씀하세요. 지금 이 사람 바쁘니까. 그런 것도 안 배웠습니까?”

“아, 아니······얘 매니저라고요? 박동하 매니저?”

유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의 말이 진짜라면, 이건 꽤 심각한 사안이었다.

이지아.

2년차, 아직 많이 배워야 할 시기이지만 싹싹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여인.

하지만 그 역시 한 성깔 하는 여자였으며 학창시절 제법 유명했던 인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뒤를 봐주지 않는 생활엔 깡다구가 필요했다.

본인이 강해야 했고, 본인이 할 말을 똑바로 해야 했으며 본인이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여야 했다.

아무도 없는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봐요. 댁 어디 사람이죠? 어디 사람인데 SS엔터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까?”

“아니, 박동하, 얘가 그쪽 손님이라고요?”

“네. 무슨 이상한 생각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엄연한 업무 방해인 건 아시죠?”

“아니······.”

동하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사태를 바라봤다.

이야, 한유라도 한 성질 하는데, 지아씨는 더하네.

저런 점은 배워야겠는걸.

“당장 나가세요. 험한 꼴 보기 싫으시면.”

“······.”

“아, 사과도 하셔야죠. 손님에게 무례하게 막말하셨으니.”

입술을 깨문 한유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동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머뭇머뭇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제 나가세요. 동하씨, 정리 끝내놨으니까 가시죠.”

“예.”

동하는 지아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유라는, 허망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따가운 시선들을 받은 그녀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녹음실로 걸어가던 지아는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톡을 날렸다.

“저 사람이죠?”

“네?”

“헤어졌다는 전여친. 저 분 맞죠?”

“아, 뭐 그렇죠.”

“왜 저렇게 짜증 났을까요?”

“······글쎄요.”

지아는 열심히 톡을 보내고는 스튜디오 안쪽으로 동하를 안내했다.

동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아씨. 감사합니다. 나서주셔서.”

“에이, 임시긴 하지만 매니저인데, 신경 써 드려야죠.”

“그리고 저, 아직 화장실 못 갔거든요.”

“아······.”

“얼른 다녀올게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 대신 한방 멋지게 날려줄 수 있는 아군이 있다는 것, 생각보다 괜찮구나.

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도 내가 나설 줄 알아야겠지.

‘본받을 게 있는 사람이네.’

긴장은 모두 풀렸다.

이제 열심히 일할 시간이었다.

* * *

“스텐바이 끝났습니다. 신나게 불러보자고요!”

“네. 준비 끝났습니다.”

동하는 헤드셋을 쓰고 녹음실에 서, 악보를 바라봤다.

꿈속 자신은 내킬대로 불렀지만,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건 아니었던 모양.

이상하게도 악보의 정보가 뇌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박자, 음, 다양한 기호들.

오선지를 타고 흐르는 음악의 흐름.

크레센도, 데크레센도와 같은 기호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후우······.”

전주가 흘러나오고 눈을 감았다.

오늘 부를 노래는 무려 여성 보컬이 부른 노래.

다소 높은 음역대지만, 동하는 충분히 소화할 능력이 되었다.

[스물하나, 스물다섯]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누군가에게는 노래의 아름다움을, 또 누군가에게는 치유를 주었던 노래.

동하에게도 제법 의미가 컸던 노래였다.

스물다섯에는 스물하나의 나를 떠올리곤 했지.

이십 대 끝자락에는 스물다섯을 떠올리겠지.

지금의 동하 자신은 이십 대라는 청춘을 보낸 뒤였다.

가장 찬란했던 순간.

가장 그리운 순간을 떠올리며 첫 소절을 불렀다.

‘와······.’

그의 입에서 벌어지는 감미로운 한 소절.

원곡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동하의 목소리에, 지아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원 가수의 오묘하고도 힘 있는, 그러면서도 감성적인 보이스는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경지였다.

그 누가 커버해도 원곡의 그 느낌을 살릴 수 없노라 느꼈는데.

‘진짜 미쳤다. 미쳤어.’

그녀는 라이브로 동하의 노래를 들었다.

동영상에서 보는 이들이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직접 듣고 있는 그녀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잔잔하게 생각을 잇다, 갑자기 감정이 휘몰아칠 때가 있다.

좋은 감정, 혹은 안 좋은 감정.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의 진상들이 낱낱이 들춰질 때.

갑자기 울컥해 어디론가 뛰어나가고 싶을 때.

이불을 차고 싶을 때.

소리를 왁 지르고 싶을 때······.

‘할머니 보고 싶다.’

지아 역시 그런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회에 묻혀 그렇게 아픔을 잊어갔더랬다.

정신없이 생활하다 보니, 잊었던 것들이 있었더랬다.

동하의 노래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건드렸다.

원곡만큼 오묘한 색은 아니었지만, 청명하고 아름답다.

목소리로 송곳을 만들어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 이런 걸까.

동하의 목소리는 그랬다.

“······어땠나요? 지아씨?”

“아.”

지아는 어느새 노래가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볼이 축축해져있다는 것 역시.

“아, 죄송, 스읍······아하하, 노래가 엄청, 엄청 좋네요.”

“괜찮아요?”

동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지아는 슥슥,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괜찮아서 문제지.

어쨌든, 지금은 얼른 결과물을 확인해 봐야 할 차례였다.

“괜찮아요. 동하씨가 그만큼 잘 부른다는 거니까. 그럼 모니터링 해 볼까요?”

“예. 진짜 별일 없으신 거 맞죠?”

“그럼요 헤헤.”

지아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동하와 함께 노래를 들었다.

카메라에 담긴 동하는 완벽, 그 자체였다.

“오······노래 부르는 모습은 또 엄청 섹시, 아니 멋지네요.”

“이렇게 보니까 좀 어색하기도 하고······.”

“에헤이, 이제 익숙해져야죠. 이거 성민 트레이너님한테 보여드리면 믹싱이랑 편집까지는 얼추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동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자신을 선뜻 도와준다.

물론 나중을 보고서야 하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

다만, 그게 지금 무척이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

이 감사한 마음을 품고 더욱 열심히 해야지.

그런 마음을 담아 지아에게 다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계약서 쓰시게?”

“그건 제가 좀 더 큰 후에 하죠.”

“좋아요. 그말, 잊지 않을게요. 아싸!”

벌써 영업에 재능을 보이는 지아의 모습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일을 척척 진행했다.

노래 몇 개를 더 녹음하고 믹싱까지.

새로운 신분으로의 도약 준비가 철저히 이뤄지는 중이었다.

* * *

한편.

한유라는 오늘 일진이 정말 사납다고 느꼈다.

아니, 진심으로 퇴사가 고파졌다.

눈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팀장.

“한유라! 너 대체 일을 어떤 식으로 하고 다니는 거야!?”

“······.”

유구무언.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사정이야 어쨌든, SS엔터의 손님에게 막말했고 그게 관계자의 눈에 띄기까지 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유야무야 넘어갔겠지만 이미 소문이 쫙 다 퍼졌다.

오늘 그녀가 SS엔터에 방문한 것은 인력 섭외 때문이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었고, 그냥 가서 사인만 받아오면 되는 일.

무척 간단한 일이었기에 신입인 그녀를 보냈겠지.

“내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사인했다. 손님이 바람난 전남친이라도 되냐? 어!?”

“죄송합니다.”

“이딴 것도 신입이라고 뽑아왔어, 으휴······. 넌 복사기 앞에서 죽치고 있어야겠다, 그냥.”

“······.”

여태 허드렛일만 하다 겨우 잡은 기회였다.

사인까지 무사히 받아두었다.

그런데 막판에 박동하, 그새끼를 만나는 바람에······.

“알아들었으면 빨리 어디든 가라. 내 눈앞에서 화딱지 나게 하지 말고. 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최악의 하루.

최악의 마무리.

한유라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끓어올랐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