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76화 - 타지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할리우드의 일정은 무척 여유로운 편이었다.
한국에서만큼 치열하게 살아가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일까?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워라밸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동하는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아는 미리 지시받은 것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동하 본인은 남은 시간 동안 솔의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은 이제 새벽녘이겠지.
그럼에도 먼저 연락이 와, 항상 솔에 대한 이야기를 묻곤 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찾아보니까 미국에 계시던데…… 그러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봐주고 있나요?”
“네. 제 친구 중에 트레이너가 있어요. 저도 그 친구 때문에 SS 엔터로 오게 되었고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솔의 어머니는 알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의 불화가 있었고 항상 밖에서 여자와 술에 미쳐 사는 남편이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자신이 키우게 되었지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숱한 고생, 그리고 남편과의 일 때문에 심신이 지치고 갖은 병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티 내지 않고 딸을 키우는 것.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하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상처가 많을 거예요. 아마 학교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겠죠. 여긴 워낙 작은 동네라 다 알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어머님도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새끼 월세방에서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죠. 저랑 있는 것도 불편했을 아이인데.”
동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한솔이 성공하게 된 후, 어머니를 어떻게 대할까?
깊은 속내를 모를 가능성이 높겠지.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번듯하게 키워 둘 겁니다.”
“그래요. 딸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에 심란하기만 하지.”
“……알겠습니다.”
동하는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는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않았지만, 한솔의 어머니를 보다 보면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역시 묵묵히 일로 자신들을 키워 주셨지.
“솔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전화가 끊기고, 동하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핸드폰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칙칙한 삶.
빛이라곤 한 점 없는 인생을 견뎌 가는 자였으니.
그래도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는 남이었고, 동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딸을 위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으면 하여, 한솔의 데뷔곡을 정했다.
이따금, 잊어버린 것들을 찾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솔은 그 감정을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노래하면 되겠지.
‘영감은 떠올랐으니.’
동하는 남은 시간 동안 노트에 떠오른 영감을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얼마 남지 않았다.
5월 중순이라고 했던가?
시험 끝나고 경험 삼아 참가하면 되겠지.
그때쯤이면 한숨 돌리며 잠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그 전까지, 최고의 곡을 완성하기로 했다.
* * *
조셀론은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여러 수영복을 몸에 대 보면서 저녁에 있을 파티를 준비했다.
어떤 옷이 잘 어울릴까?
너무 과한 옷을 입으면 날파리가 엄청 꼬이겠지.
적당히 수수하면서도 매력을 잃지 않는 옷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창 코디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와중, 그녀는 매니저의 톡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 있었다.
“아…… 이 양반들 왜 오는 거래?”
[오늘 디에고랑 스테판 온다는데? 동하 씨 보러 왔나 봐.]
[Fuck! 그 새끼들 엄청 더러운 애들 아니야?]
[맞지.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할 듯.]
하아-.
그래,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려는 동하에게 장애물이 없는 게 이상하지.
미국 연예계에서 더럽기로 소문난 두 사람이었다.
동하가 잘못 친해졌다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들 것이다.
생각보다 술과 여자, 마약과 도박 같은 행위는 중독성이 어마어마했으니.
한 번만 해 봐.
이 말을 승낙하는 순간,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터다.
저들도 이걸 노리고 온 거겠지.
“동하 씨는 내가 지켜.”
절대로 악한 길에 빠져들게 할 순 없었다.
조셀론은 약속한 시각이 다 된 것 같자,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동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 * *
깜빡 잠이 든 것인지, 꿈을 꾸었다.
그곳은 즐거운 연회의 장이었다.
다들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
동하 역시 그들과 함께 어울려 술과 다과, 고기를 먹으며 파티를 즐겼다.
파티는 정말 다양하고 격정적으로 흘러갔다.
귀족들이 참여하는 파티여서일까, 저마다 기품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상대방을 유혹했다.
그러던 그때, 동하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칙칙한 빛이 흐르고 있는,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특제 포도주입니다. 아주 독특한 맛이 나죠.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동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잔을 받았다.
독특한 향이라, 이상한 게 들었을지도.
하지만 그는 그저 향을 음미할 뿐, 잔을 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확실히 독특한 맛이었다.
‘그리고 뭐가 들어 있긴 하네.’
동하는 그 생각을 마치고 다시 연회를 즐겼다.
중간에 어떤 귀부인 하나가 은근히 자신을 떠보는 것 같던데, 동하는 웃는 얼굴로 그녀의 청을 물렸다.
그 이후 몇몇 사람들이 더 그를 떠봤다.
확실히 뭔가 있긴 있는 모양.
하지만, 동하는 별 탈 없이 파티를 마쳤다.
계속해서 기운이 몸을 순환하고 있는 걸 보니, 몸에 이상 작용이 있긴 한 모양.
동하는 평범하게 즐겼고, 평범하게 숙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가 잠을 청한 이후, 그는 다시 현실에서 눈을 떴다.
참 이상한 일이지.
“……이거 뭐야?”
잠에서 깬 동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또 안 좋은 일이 닥쳐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따금 이 꿈이 예지몽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멍한 표정을 풀고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할 때였다.
지아가 사다 준 수영복, 한국에서 래시가드라고 부르는 옷을 주워 입었다.
수영복을 입으니 탄탄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가운 하나를 추가로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지아 역시 가벼운 수영복을 입고 함께 나왔다.
“동하 씨. 얼른 가죠.”
“네. 준비됐죠?”
“그럼요. 아주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동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셀론이 보낸 메시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 스테판이랑 디에고라는 사람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네요. 저는 그들과 큰 갈등은 만들지 않을 거고, 뒤에서 처리해 주세요.”
“넵. 맡겨 두십쇼. 제가 또 이런 건 잘하거든요.”
두 사람은 따로 내려가기로 했다.
서로 일행인 걸 들키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으니.
그렇게,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인맥 쌓기에 돌입했다.
* * *
풀 파티.
호텔에서 진행되는 작은 행사였다.
호텔 측에서 초청한 셀럽, 혹은 연예인들만 참여할 수 있는 파티.
벌써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디에고와 스테판은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서 소식을 듣고 왔는지, 근처에 있는 예쁘고 잘생긴 이들을 전부 모아 둔 느낌이랄까.
생각보다 오늘 모인 이들의 상태가 괜찮음을 느낀 스테판.
그는 디에고의 어깨를 툭 친 후에 말했다.
“조금 놀다가 진행하자고. 내가 먼저 선수 낚고 있을게.”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술이나 퍼마시지 말라고.”
“나만 믿어.”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은 후, 그렇게 수영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분위기를 달궈 주었다.
벌써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근처 여자들에게 치근대는 스테판.
디에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아는 사람을 발견했다.
술과 다과, 이것저것 서비스를 책임지는 매니저였다.
샹원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으니, 바로 작업에 들어갈 생각.
그는 은밀하게 매니저와 접촉을 시도했다.
“저기, 혹시 스티브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샹원과 아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가 부탁한 것이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잠시 이쪽으로 오시죠.”
샹원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조금 더 공손해지는 태도.
디에고는 미소를 지으며 스티브 매니저를 따라갔다.
일이 아주 잘 풀릴 거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 * *
그 시각, 조셀론은 파티장 입구에서 동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멀리서 가운을 걸친 동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치렁한 앞머리를 뒤로 묶어, 이마가 훤하게 드러난 얼굴.
안 그래도 잘생겼던 얼굴이 더욱 훤칠해졌다.
그녀는 동하의 몸이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펑퍼짐한 옷 위주로 코디를 했었기에 알아보지 못했던 그의 몸뚱이.
꽉 잡힌 근육과 완벽한 비율은 다른 서구권 사람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프레임을 자랑했다.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자, 조셀론 역시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이젠 제법 친해진 두 사람.
웃으며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동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왜요? 저 오늘 예쁘죠?”
“아, 네. 제가 기억하는 누군가랑 닮은 것 같아서요.”
“네? 누가 저랑 닮아요. 그런 사람이면 안 유명할 수가 없을 텐데요.”
“하하…… 어쩌면 꿈에서 봤을지도?”
그게 뭐예요.
조셀론은 가볍게 웃으며 파티장 문을 열어젖혔다.
둥둥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요즘 유행하는 곡을 실시간으로 믹싱하는 실력이 아주 일품인 사람이었다.
동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조셀론과 동하가 온 것을 발견한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은 지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외천과 마찬가지인 사람이었으니.
“와, 박동하다!”
“조셀론도 있는데?”
셀럽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보내오는 눈초리가 따가웠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동하는 웃으며 조셀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두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이들은 많았다.
멀리서 여자들을 끼고 놀던 스테판도 마찬가지.
그는 동하의 실루엣을 바라보고는 미소 지었다.
사람 좋은 웃음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검은 속내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하나를 망가뜨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그것은 바로 돈이었으니.
‘오늘 일만 성공하면 두당 십만 달러를 주지.’
그냥 몇 마디 주고받고 사람 하나만 잘 구슬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일에 십만 달러라니.
완전히 거저먹는 장사 아닌가.
꽁돈이나 다름없는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놈이 모든 여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때마침 저 멀리서 디에고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옆에는 깔끔한 복장의 매니저까지 있었다.
‘됐구나.’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을 헤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동하 씨! 완전 팬입니다!”
그것이 작은 사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