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92화 - 고민이 있을 땐 걸어 보자
바다, 사람, 맛있는 음식, 그 밖에 모든 것들이 있는 곳이 여기였다.
동하의 공연은 그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것의 방점을 찍는 것이었다.
소박하지만 임팩트 있는 공연.
오직 소중한 이들을 위한 노래들이 은은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특히 동하의 어머니, 동생은 더욱 감동에 젖었다.
폭설이 내리던 날, 홍대에서의 버스킹은 정말 인상 깊었지.
그때 동하는 아직 미완성의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다시 들어 본 아들, 형의 노래는 이 세상 그 어떤 노래보다도 좋았다.
단순히 목소리가 좋고 발성이 좋은 경지를 넘어섰다.
그의 노래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감정을 들끓게 하는 노래였으니.
“우리 아들, 진짜 대단하네.”
“나중에 콘서트하면 엄마랑 동훈이도 꼭 와.”
“꼭 그래야겠어. 그치, 동훈아?”
동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짜 가수가 뭔지, 재능을 꽃피운 자의 경지란 무엇인지 여실히 느꼈다.
확실히 인터넷에서 보던 동하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는 격이 달랐다.
그는 말없이 바비큐를 정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좋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고민이 드러나 있었다.
형인 동하는 그의 표정을 정확히 읽었다.
그래, 동생은 항상 자신의 뒷바라지만 했었지.
‘이제는 내가 해 줘야 할 차례지.’
27살.
아직 한창 꿈을 꿀 나이였다.
곰 같은 외모에 의젓한 성격이라 누가 본다면 동훈이 형처럼 느껴질 수는 있어도, 동하에게는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이제는 빚을 갚을 차례였다.
‘그래도 좌절하거나 하지는 않았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빛은 어두웠으나 탁하진 않았다.
잠잠한 심해처럼, 가만히 가라앉아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조셀론은 슬며시 동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생에게 뭔가 해 주고 싶은 거야?”
“그렇지. 우리 집 형편이 안 좋았을 때, 동생이 날 많이 도와줬거든. 제대로 뭔가를 해 보지도 않고 일만 했지.”
“……그랬구나.”
조셀론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동하를 대단하다는 듯 바라봤다.
미국은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였다.
독립하게 되면 가족이라도 쉽게 도와주지 않았다.
그것이 심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었으니까.
미국은 그런 문화였으며, 생각보다 사람과 사람에 대한 유대가 적었다.
철저한 개인주의, 철저한 사업 관계.
조셀론 역시 그런 관계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동하가 정말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야시장에 다녀오자. 걸으면서 생각해 보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몰라.”
“그럴까?”
“응, 어머님이랑 동생분이랑 같이.”
동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훈이 역시 머리 좀 식힐 겸 산책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어머니, 지선을 데리러 간다는 말을 남긴 그녀가 훌쩍 떠나 버렸다.
동하는 유난히 자신의 가족까지 챙기는 조셀론을 보며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좋은 사람이야.’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호감이겠지.
하지만, 동하 역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서로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한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벌인다면, 탄탄대로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놓는 격이 될 수도 있으리라.
지금은 그저 서로의 길을 잘 걸어 나가며 응원해 주는 수밖에.
동하 역시 걸음을 옮겼다.
동생에게 물어볼 것이 제법 있었으니까.
* * *
똑똑.
동훈은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정말 잘나게 변한 형, 동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쓸데없는 감정을 털어 버리고는 형을 맞이했다.
형은 왜 찾아온 걸까.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왜?”
“왜라니, 동생한테 고민이 있어 보이길래 찾아왔다.”
“그게 그렇게 티 났나?”
동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훈은 포커페이스로 유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속내를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으니, 뭇 사람들이 바라보는 동훈은 그런 사람이겠지.
하지만 동하는 그의 표정을 잘 읽었다.
이것도 옛날부터 그랬던 것이었는데, 오죽하면 어머니인 지선마저 그에게 동훈의 표정을 물어보곤 할 정도였다.
동훈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방 한쪽에 있는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달칵거리는 캡슐과 기이잉 울리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동훈은 멍하니 커피 머신을 바라봤다.
형은 그런 동생의 모습을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형은 내가 공장 그만두는 거, 어떻게 생각해?”
“환영할 만한 일이지.”
“음……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동하는 짧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간 동훈이 헌신한 시간이 얼마인가.
청춘을 다 바쳐 동하를 보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 어려울 때 도움이 되었던 건, 동훈의 뒷바라지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하고 싶은 걸 쫓고자 했다.
쳇바퀴 굴러가듯 살아왔던 인생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삶으로.
실패가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은 동하라는 든든한 황금빛 동아줄이 있었다.
동훈은 형에게 손을 함부로 벌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 구원해 줄 수 있는 형이 있다는 건 무엇보다 든든했다.
동하는 그런 동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희생해 왔던 시간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 공시생 시절이 없었다면, 이렇게 간절하게 노래를 불렀을까?”
“…….”
“그래서 그래. 솔직히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두고 싶은데, 그러면 또 삶이 망가질까 봐 그런 것도 있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동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동하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너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좋지. 요 앞에 야시장 있는데, 산책 겸 가자. 머리도 식히고.”
“좋아.”
동하는 준비하고 내려오라며 방 밖으로 나섰다.
우애가 좋은 형제인가?
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는 형이 희망인 줄 알았고, 그렇게 행동했다.
동생이 너무 해 준 것이 많아 갚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둘이 합쳐지니, 남들이 보기엔 우애 깊은 형제처럼 보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들일 뿐이었는데도.
가족 사랑이 별거 있나.
동훈은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 * *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은 밤에 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동하와 조셀론, 그리고 가족들은 매니저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여기서만큼은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던 그들은 간단히 선글라스만 끼고 해변 야시장으로 나섰다.
야시장은 관광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과, 기념품, 옷가지 등등.
간단히 들어가 먹을 수 있는 가판대도 있었고 술과 안주를 파는 곳도 있었다.
“와, 사람 엄청 많네?”
“그렇죠? 밤만 되면 여기 모이는 사람들이 꽤 되거든요.”
지선은 야시장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한국 시장과는 또 다른 분위기.
북적대며 빨리빨리 움직이는 곳이 한국이라면, 이곳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느긋하게 관광하는 것이 정말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었다.
네 사람은 정말 즐겁게 야시장 탐방을 시작했다.
가게에도 들르고 먹거리도 사 왔다.
귀국한 뒤 지인들에게 줄 기념품도 잔뜩 샀다.
이따금 동하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는 가게 직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들고 네 사람을 몰래 따라다니던 사람.
이따금 동하가 뒤를 쳐다봤으나 그는 잽싸게 숨어 걸리지 않았다.
“조셀론이랑 박동하가 같이 다니는구나, 이것도 나름 특종인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메라를 들었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박동하.
그가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타타타타타-!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셔터를 누른 그가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의 사진 속에는 동하를 비롯한 가족들의 사진이 모두 찍혀 있었다.
동하는 자신의 사진을 찍고 도망간 파파라치를 눈으로 좇았다.
쫓아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가십거리야말로 사람들이 연예인을 더욱 관심 갖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꿈속 자신 역시 일부러 그런 소문들을 놔두었지.
‘문제는 가족들인데…….’
동하는 잠시 고민하더니 가족들에게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걸음을 옮기는 동하.
조셀론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파파라치가 있는 모양이에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러진 않을 거예요. 잘 타이르거나 사진만 지우고 오겠죠. 흔한 일이라…….”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조셀론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뒤, 동하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동하가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것 같진 않았다.
그의 몸은 웬만한 운동선수보다 탄탄해 보였으니까.
그녀는 안심하고 마저 관람하기로 했다.
* * *
동하는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하는 짧게 한마디만 했다.
“가족이 나오면 안 됩니다. 사인해 드릴까요?”
“……아, 그게…….”
“가족 사생활은 지켜야죠. 그렇죠?”
“네, 알겠습니다.”
파파라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런 때, 불같이 화가 난 스타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윽박지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촬영을 해 왔다.
하지만, 동하는 달랐다.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는 자.
그래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 명함 좀 주실래요?”
“그, 그건 왜…….”
“혹시 모르죠. 제가 당신이 필요할 때 부를지.”
“……여기 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앤돌 맥퍼슨.
연예계 기자였다.
연예계에서도 스타들의 일상을 취재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라고 밝혔다.
동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를 하는 것으로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 살아가는 가족들에게까지 미치면 안 될 터다.
앤돌은 수첩 하나를 꺼내, 동하에게 물었다.
즉석에서 인터뷰를 하려는 모양.
“박동하 씨, 궁금한 것이 있는데, 조셀론과는 무슨 사이입니까?”
“절친한 친구 사이죠. 그녀가 미국에서 절 많이 챙겨 주고 있습니다.”
“연인이라거나, 그런 사이는 아닌 겁니까?”
“네. 연인은 아닙니다. 그냥 친한 친구예요.”
앤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을 취재하면서, 그는 나름대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눈이 생겼다.
지금 동하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사실인 듯싶었다.
“친한 사이라……. 두 분의 인연은 한국에서부터 이어졌었죠.”
“네. 그때 개인적인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는 잘 연락하고 지냅니다.”
“무례하지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속사 측으로 저작권료가 지급될 겁니다.”
동하는 앤돌의 명함을 챙기며 앞으로 자주 보자고 말했다.
왠지, 앞으로 자주 엮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동하는 다시 일행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전 세계에 동하와 조셀론의 이야기가 기사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