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111화 – 제안할 것이 있는데요, 나쁘진 않을 겁니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증명의 압박을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실력을 키움과 동시에 정확한 안목을 길러야 하니까.
아는 것만 많아지고 정작 자신은 하나도 못 한다면, 그것만큼 창피한 일이 있을까.
물론 평가, 그 자체에 실력이 중요하진 않아도 직접 해봄으로써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
그렇기에 동하는 심사위원이라는 자리가 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까.
잠시 고민한 그는 평소 생각했던 것을 말하기로 했다.
“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해답이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 자신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벽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많이 봐 왔거든요.”
“오…….”
옆에서 진영이 작게 감탄했다.
동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심사위원으로서 자신의 포부를 끝까지 밝혀야 할 때였으니.
그는 지금도 열심히, 땀 흘리면서 연습하고 있는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에는 명백하게 길이 보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항상 칭찬받고, 항상 실력이 부쩍 오르며, 항상 데뷔에 대한 가능성을 논하는 이들.
그들은 막힘이 없고 미래에 대한 확신 또한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대다수라는 건 동하가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서른 살까지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
동하는 그런 이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싶었다.
“제가 속해있는 곳에서도 그런 이들이 종종 보이거든요. 제가 워낙 바빠서 일일이 가르쳐줄 수는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그런 방법을 배우는 것도 좋겠다 싶네요.”
“그런 안목과 실력이 있으니, 충분할 겁니다.”
피디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하의 인터뷰를 종료했다.
확실히, 마인드 자체가 다르달까.
놀라운 점은, 언뜻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말을 했음에도 신뢰가 간다는 것.
그건 동하가 여태 쌓아온 커리어와 인성, 보여준 모습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음악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한솔을 단 몇 개월 만에 엄청난 실력자로 키워냈다.
이것은 안목과 실력, 둘 다 갖춰진 것이라 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민해서 나오는지, 실제로 보는 이들이라면 절실하게 느껴졌다.
진영과 에코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코 씨는 어떤 심사위원이 되고 싶으신가요?”
“저도 뭐…… 동하 심사위원과 비슷합니다. 재능 있는 이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것. 앞으로 음악 시장에 큰 기여를 할 정도의 가수를 찾는 거죠.”
“그렇군요. 역시 심사위원들은 다 비슷한 걸까요?”
“평가하는 입장이라면,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요?”
흐흐, 에코는 작게 웃었다.
그 역시 동하의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확실히, 누군가를 이끌어 줘야 하는 멘토와 홀로 잘 나가면 되는 ‘솔로 가수’는 결이 달랐다.
혼자 아무리 잘해도 누군가를 이끌어 주지 못한다면, 심사위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니까.
‘원래는 레이블에 데려갈 만한 인재나 찾으려 했는데,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는걸.’
동하의 말을 듣자마자 한 생각이었다.
그냥저냥 임했다가는 악마의 편집이니 뭐니 해서 엄청난 이미지 손실이 이어질 것이라 판단했다.
그건 직감이었다.
여태 그를 이끈 원동력이기도 했다.
“저도 뭐……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인성 좋고 가능성 있는 친구들을 이끌어 주는 게 목표죠. 언제나 그랬듯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피디.
그 뒤로도 인터뷰가 이어졌다.
특히 함께할 심사위원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지에 대한 단독 인터뷰가 하이라이트였다.
“동하 심사위원…… 처음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거의 신화를 쓰고 있는 분이거든요. 장난 아닐 것 같아요.”
진영은 그렇게 말했고, 다음 에코 차례였다.
그는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동하 형…… 아니 심사위원. 정말 대단하죠. 저도 처음 동영상 올리실 때부터 봤거든요. 이 사람은 진짜 어떻게든 되겠다 싶었는데, 지금 보세요.”
“그럼, 같이 일하게 되어서 좋은가요?”
에코는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솔직히 같이 작업 한 번 하자고 하고 싶었던 거, 엄청 참고 있습니다. 하하.”
둘의 인터뷰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동하 차례.
동하는 편안하게 앉아서 두 사람에 대한 감상을 꺼냈다.
“두 분 다 대단한 선배님이잖아요?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짧게 반짝였다고 해도, 관록과 혜안이 없으면 롱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두 분은 확실히…….”
“그래서 많이 보고 배우려고 합니다.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동하 역시 두 사람에게서 빛나는 빛을 바라보고는 눈이 멀 뻔했다.
그야말로 자부심과 미래를 향한 확신으로 가득 찬 이들이었다.
이들이 어째서 이렇게 강력한 빛을 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옆에서 함께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오늘 인터뷰는 이것으로 끝이고요, 사흘 후에 녹화 들어갈 겁니다.”
“네. 그럼, 그때 또 뵙겠습니다.”
오늘 할 일은 끝났다.
사흘 후에 본선에 진출하기 위한 심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는 이 세 사람이 직접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일을 시작할 테지.
동하는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퇴장하기 전, 메인 피디를 불렀다.
“피디님. 제안할 것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오, 뭔가요?”
콧대 높은 피디였지만, 동하가 하는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상부의 압박이 있었다.
사실, 그게 없어도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야 했겠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 어마어마한 파워가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쨌든, 방송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최대한 맞춰주자 생각하며 들어보기로 했다.
“이번에 제가 2집 싱글을 발표할 거거든요.”
“오…… 네. 근데, 벌써 2집으로 넘어가시나요?”
동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외로 준비가 빨리 돼서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피디도 경험이 있고 관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것들은 모두 파악이 가능했다.
2집 앨범, 그리고 제안…… 이건 설마?
“네, 맞아요. 결승이 끝난 뒤에 축하 무대, 제 2집 발표 무대로 하고 싶은데, 어때요?”
“환영, 무조건 환영입니다. 홍보도 팍팍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잘 준비해서 플랜 전달하겠습니다. 괜찮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적당히 홍보만 한다면, 시청률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무려 월드 스타급 가수의 싱글 앨범 무대였다.
그것도 최초 공개.
이건 하늘에서 내려준 기회였다.
아니, 동하 님께서 시청률을 보장해 주겠다는 계시였다.
거절하면 두고두고 국장님한테 까이겠지.
아니, 어쩌면 그대로 좌천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진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습니다. 동하 씨.”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예! 물론이죠!”
“아, 그리고 생방송까지는 엠바고로 넣어주세요.”
피디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청률은 생방송 때부터 시작되는 것.
그때까지는 제작사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팬을 만들고, 참가자의 스토리를 잘 보여줘야겠지.
어차피 스토리는 알아서 나온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갈등과 감동을 살리지 못한다면, 제작사가 갈려도 무죄였으니.
동하는 확신에 찬 피디를 보고는 썩 안심했다.
무슨 짓을 해서든 프로그램을 끌어 올리고, 2집 싱글 앨범 무대를 성공 시키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들어가시고,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아마도 피디는 바로 편집을 돌리고, 광고 영상을 올리겠지.
동하 자신은 꽤 그럴듯한 카드였으니.
인터뷰실을 나서자, 진영과 에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 끝났어?”
“네, 덕분에 잘 마무리 했습니다.”
“흐흐, 겸손도 하셔라. 우리 그럼, 만난 김에 친목도 다질 겸, 저녁이나 먹을까?”
“좋아요. 근데 형님은 술 안 드시지 않아요?”
에코의 물음에 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사고의 원흉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술은 웬만하면 안 마시는 쪽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술 말고도 즐거운 것이 많은 법.
“술 말고도 즐거운 건 많지. 내가 예약 해뒀거든? 그리로 가자.”
“좋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친목을 위해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 * *
“끄으으으-! 이제 슬슬 올려도 되겠지?”
야심한 밤.
언제나처럼 글을 쓰고 있던 영지는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롤로그만 올렸을 뿐인데, 확실히 반응이 다른 작품.
제목은 <멸망한 제국의 검성이 되었다>였다.
아주 심플하고 정석적인 제목.
하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한 것들이었다.
정석적인 판타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힘든 스토리를 지녔다.
동하의 설정은 너무도 디테일 해서, 영지가 딱히 건들 필요가 없었다.
“지금 톡 하면…… 안 읽겠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동하와 연락을 시도했다.
퇴고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비축분을 쌓으면서도 항상 퇴고하고 또 퇴고했다.
그러면서도 감탄했다.
퇴고는 오탈자나 비문의 문제였지, 설정의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캐릭터가 움직이는 당위성, 대사, 행동, 그리고 그로 엮이는 사건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으니까.
그래서 생각보다 원고를 확보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하 님. 일단 10편은 확보했습니다. 연재해도 될까요?]
답장은 생각보다 바로 왔다.
[네. 자유롭게 연재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바로 올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영지는 톡을 마치고 다시 웹사이트를 확인했다.
지난날, 처참했던 성적이 여기 있었다.
동시에 두 개를 연재하는 일은 꽤나 힘들겠지만, 그래도 해야지.
받은 돈이 얼마고, 받아낼 돈이 얼만데.
“몸 한 번 갈아 넣지 뭐.”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또 글을 쓰려하고 있을 때, 톡 하나가 더 날아왔다.
영지는 톡의 주인공이 동하인 것을 깨닫고 얼른 확인했다.
[몸 관리는 꾸준히 하시면서 작업해야 합니다. 한 번에 몰아서 쓰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막 더 쓰려고 했는데…… ㅎㅎ]
답장은 없었다.
영지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창 에너지가 솟구칠 때 몰아 쓰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단숨에 차단당했다.
그래도 뭐, 갑의 요구이니 철저하게 따를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번 작품활동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바꿔 나가야겠지.
영지는 대충 5화까지의 원고를 올린 후에 침대에 누웠다.
그의 손에는 동하가 준 설정 집이 들려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대단하단 말이지.”
어떻게 하면 이런 세계관을 짤 수 있을까.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이토록 정교한 세계관이라니.
보고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출근할 일도 없으니, 밤새도록 이거나 읽으며 공부하기로 했다.
그 사이, 서서히 기적은 실현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