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자세자와 뒤주대왕-55화 (55/175)

감자세자와 뒤주대왕 55화

회담, 그리고 화폐

1735년 2월.

오스트리아 빈.

“……좋소. 승낙하리다.”

“황제 폐하의 용단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국왕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던 오스트리아는 결국 영국의 줄기찬 주장에 굴복했다. 겨우 안전을 확보했던 로트링겐 일대는 결국 더 이상 어느 나라의 영지도 아닌 중립지대로 지정되고야 말았다.

내부에서의 반발 여론이 극심하였으나, 카를 6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판단이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당장 동맹을 파멸로 몰고 가는 행위는 결코 현명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으므로.

빚더미에 앉았어도 비옥한 토지와 막대한 인구를 가진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벌이기에는 오스트리아도 재정 상태가 심각했다. 하물며 영국마저 저들의 편에 선다면 펼쳐질 미래는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덕분에 겨울이 끝나기 전에 열린 협상 체결을 위한 회담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당장에라도 쌍욕을 내지르며 싸우기 일보 직전인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대사와 행복하게 미소 짓는 영국의 대사에 의해서.

“하하하, 다들 좋은 날인데 표정 폅시다. 전부 유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퍽이나.’

‘저 박쥐 같은 것들은 눈치도 없나?’

그놈의 평화 타령을 진심으로 여기는 자가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애송이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빌어먹을 이상주의자거나.

평화가 찾아오려 하면 자신들 손으로 불화를 일으켜 유럽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들이 뭐 어째?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첫 번째, 오늘 이후로 로트링겐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대가로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에게서 파르마를 양도받는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이의 없음.”

여하튼 불만과는 별개로 조약안은 제대로 완성되었다.

부유한 지방인 파르마는 장기적으로 제국의 재정 사정에 적잖은 보탬이 될 게 분명했다.

또한 이탈리아반도와 독일 지방을 연결하는 지역에 자리 잡았기에 국내의 물류 안전도 확보된다.

아무리 자그마한 땅이라지만 자국의 영토에 적의 월경지가 생기는 상황은 막아야 하는 법.

이미 시칠리아를 스페인에게 남겨준 오스트리아는 충분히 은혜를 베푼 셈이었기에 순순히 동의가 이뤄졌다.

“두 번째, 로렌 공국의 지배자는 프랑수아 에티엔, 즉 프랑수아 3세와 그의 가문으로 유지한다. 동의하십니까?”

“마찬가지로 동의합니다.”

“역시 이의 없습니다.”

이는 겉으로는 전통적인 지배자를 그대로 두어 프랑스에게 유리해지는 결론이었으나,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잠재적으로 강화시키는 조치였다.

당장 프랑수아 3세 본인부터가 빈으로 유학을 왔었고, 전쟁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친 오스트리아파. 심지어 그의 동생인 카를 알렉산더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과 연애 중이었다.

향후 형성될 인척 관계를 활용하면 직간접적으로 로렌공국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리라.

‘불쌍한 것들. 왕이 병신이니 죄다 어설퍼졌어.’

‘덕분에 우리만 득을 보는군. 골수까지 뽑아 먹어주마!’

일반적인 경우라면 간파당할 위험이 높은 도박수였다.

프랑수아 에티엔이 빈에 유학을 왔었던 사실이야 사교계를 통해 퍼졌고, 프랑스의 강력한 정보력이라면 동생의 연애 관계에 대해서도 조금은 눈치를 챘을 터.

그러나 권력 교체기에 있는 나라에는 보유한 정보 자산을 최대한 활용할 역량이 없었다.

1715년에 즉위하여 오랜 섭정 기간을 마친 루이 15세는 극히 최근에야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젊은 왕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는 그럴듯한 치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권력을 안정화시키길 원했다.

단기적인 손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당장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한 발짝 후퇴하더라도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여 두 발짝 나아간다면 그게 더 이득이다.

최대한 빠르게 나라의 위신을 세울 결과를 가져올 것.

이렇게 압박을 받는 외교관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지극히 제한되었다. 상대가 원하는 바를 최대한 들어주면서 꼭 필요한 것만 지키는 수밖에.

정황증거와 첩보로 정세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이를 활용해 최대한의 외교적 이득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국사조칙을 승인한다. 또한 프랑스는 제국의 혼사에 대하여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동의하십니까?”

“……예. 동의합니다.”

“물론이오!”

마지막까지 망설이기는 했지만, 두 왕국의 대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트리아가 로렌과 시칠리아에서 충분히 양보해 준 마당에 강짜를 놔봤자 손해이기도 했고.

유럽 유수의 강국, 스페인과 프랑스가 국사조칙에 동의함으로써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미련이 남았는지 프랑스의 대사는 한 가지 부속 조항을 덧붙였다. 독립된 강대국의 지배자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혼사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이에 제국의 대사는 이렇게 응수했다.

인구 400만.

강대국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기준을 제시하여 차후 프랑스가 말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상황을 방지했다.

400만이면 결코 많은 인구는 아니었다. 당장 영국만 해도 1천400만을 넘어갔으니. 하지만 진상을 안다면 저들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정말인가? 수고했네! 정말 잘해주었어!”

“이젠 내 아들이 황제가 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를 6세와 빌헬름 1세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국혼에 필요한 준비물은 대부분 갖추어졌다.

전쟁이 종결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라 한다면, 왕가의 결혼만 한 이벤트도 어디 없으리라.

* * *

한편, 수면 아래에서의 은밀한 회담 역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참가국의 숫자는 크게 줄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단 2개국.

그러나 논의되는 사안의 무게는 유럽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위험했다.

“미사여구는 집어치우고 묻겠습니다. 영국, X같지 않습니까?”

“이를 말이오? 당신네들도 엿 같지만 저 박쥐 놈들에 비하면 천사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

시누이가 자기 혼자 고고한 척하는 놈이라면 더더욱.

이 전쟁은 피차 불만족스럽게 끝난 전쟁이었다.

공세가 막혔다지만 오스트리아는 얼마든지 프랑스의 재침공을 방어해 낼 자신이 있었고, 프랑스는 압도적인 대군으로 로트링겐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확고히 할 작정이었다.

빌어먹을 영국놈들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확실하게 결판이 났을 텐데, 돈과 병력만 날리고 얻은 게 없다.

그랬던 주제에 회담장에선 거들먹거리기 바빴으니, 그 빌어먹을 면상을 어떻게든 구겨주고 싶다는 욕망이 절로 차올랐다.

“동병상련인 처지에 서로 협력하지요.”

“무슨 말인지?”

“상호 간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자는 겁니다. 굳이 서로 힘 뺄 것 없이, 향후 영국에 대해서…….”

오스트리아 대사는 현란한 말솜씨로 프랑스 대사에게 방책을 제시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사의 경계심이 풀어지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 * *

“으으음……. 이건 좀 곤란한데.”

“전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프리드리히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심했다. 일이 예상대로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획 이상으로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다. 일 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두 달 만에 성공하기 직전이야. 시간이 아슬아슬하겠는데…….’

능력 있고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훌륭한 측근들.

그래서 믿고 맡겼더니, 목표 이상으로 달성해 버렸다.

벌써 조정 내 파벌의 분리와 세력다툼의 구조가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서로 견제하고 말싸움만 하느라 건설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고 국정은 엉망진창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좋은 게 아닌가 싶겠지만, 이 경우에는 도리어 독이었다.

‘하는 수 없다. 앞당겨야지. 홍봉한과 채제공이 반발을 제대로 제어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불만은 단기간에 터져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연산군조차도 폭정을 몇 년은 하고 쫓겨났는데, 몇 개월 정도로 반란이 발생할 확률은 낮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차라리 잘되었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수습이 안 되면 이용하기라도 해야 하는 법.

프리드리히는 서재 깊숙이 숨겨둔 종이 다발을 꺼냈다.

15년간의 계획을 정리해 둔 원대한 미래 구상.

변경할 점을 먹으로 지우고 작게 새로 써넣었다.

장기적으로, 미래에 여유를 두고 시행하려 했던 정책들을 지금으로 끌어왔다.

반발이 심할 사안들을 미리 처리하면 나중의 통치가 편해진다.

‘그래도 인재 문제는 한숨 덜었으니 다행이려나.’

규장각의 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토론하고 교류하며 학습하는 문화가 조선에도 있었기에 이를 응용해 학구열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제대로 된 교사가 없으니 학습을 마치려면 꽤 걸리겠지만, 15년 계획이니 차차 자연스레 해결되겠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 수백 명이 생기면 더 이상 국정을 이끌기 위해 원맨쇼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자잘한 일들을 아래에서 적절히 처리해 주니 보다 중요한 문제에 투자할 시간도 늘어난다.

‘흑룡영도 알아서 잘하고 있지.’

초기의 100명을 가르친 이후로 프리드리히가 직접 지휘봉을 잡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쯤 훈련장에 들러 성실히 하는지 확인하고 치하해 주는 정도. 아, 연배나 이전의 계급 등을 고려해 지휘 체계도 편성했다.

원래부터 금군에 속하던 고급 인적자원들에 풍족한 지원이 더해져 나날이 정예병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일반적인 조선군이 상대라면 적어도 두 배의 병력 차까지는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다. 추후에 서양에서 수류탄 제조 공정을 들여오면 전원을 척탄병으로 육성해도 괜찮겠지.

‘흑룡공장 역시 원활히 돌아가고 있다.’

소총을 만들기 위해 창설했던 공장은 급속도로 확장을 거듭해 광석 채굴부터 완제품 생산까지 자체적으로 가능한 규모에 이르렀다. 프리드리히 본인의 무력 기반인 만큼 화끈하게 지원해 준 덕택이다.

초기의 생산 속도가 소총 월 380자루가량이었는데, 지금은 1천 자루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만한 규모의 생산시설은 저 광대한 청나라에서 찾아봐도 많지 않으리라. 인근의 철, 석탄 광산들을 편입하고 제련 시설을 설치하여 사실상 못 만드는 병기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무리 그래도 대포는 무리긴 하지만.

불가능은 아니나 시간과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생산을 금지했다.

“좋아, 완성이다. 게 있느냐?”

“부르셨사옵니까?”

“당상관들은 편전에 모여 있는가?”

“예. 조회를 기다리고 있나이다.”

상선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대용으로 곡식 가득한 율무차를 한잔 들이켜고는 문정전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날이 찹니다. 고뿔을 조심하소서.”

“괜찮다. 이런 추위에 미령(靡寧)(임금의 병환)이 생길 만큼 몸이 허약하지 않으니.”

어렴풋이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의 공기는 맑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 심신이 정화된다는 느낌이 든다.

바람의 서늘함과 방금 마신 율무차의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며 프리드리히는 걸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고민하느라 조금 어질어질한 머리를 가볍게 털어주고, 흐트러진 익선관을 정리하니 어느새 편전 앞이었다.

“선전색 빛나리!”

“다들 고개를 드시오. 그렇게 숙이고 있으면 이야기가 들리나.”

자신을 향하는 수십의 시선.

부담감을 자연스레 흘려넘기며 어좌에 앉은 프리드리히는 화두를 던졌다.

“경들은 상평통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하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제각기 답했다.

“선대왕 숙종 전하의 치적이옵니다.”

“무거운 쌀더미 대신 엽전 몇 닢만 지니고 있으면 되니 편리한 물품이 아닐 수 없나이다.”

“선대왕들께서 실행해 오신 오랜 통화정책의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면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모두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상평통보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소.”

주화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시선에 걱정이 섞인다. 설마 주상께서 화폐 유통 금지 같은 정책이라도 실시하려는 건가? 그랬다간 조선의 경제가 엉망이 될 텐데?

우려를 불식하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프리드리히가 말을 잇는다.

“상평통보 자체는 문제가 아니오. 이를 다루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어인 말씀이십니까?”

“화폐는 철저히 조정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오. 쌀 한 섬에 다섯 냥이라 정하였으면 그에 맞추어서 주화를 발행해야지, 그저 제 재산 늘리겠다고 마구잡이로 통화를 발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외다.”

“과연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내가 받는 보고에 따르면 지방관들이 사사로이 화폐를 주조하는 등의 범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하오. 또한 위조화폐를 만드는 패거리가 적발되는 일도 적지 않소. 나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근절하고자 하오.”

잠시 숨을 고르더니, 프리드리히가 외쳤다.

“앞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지역은 다섯 곳으로 한정하겠소. 그 외 지방의 주조소는 모조리 폐쇄할 것이며, 주조 도구를 숨기거나 은폐하려 하는 자는 모조리 엄벌에 처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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