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자세자와 뒤주대왕-60화 (60/175)

감자세자와 뒤주대왕 60화

임신, 그리고 초협선

1735년 8월

오스트리아 빈.

“테레지아, 나 왔어요.”

“어서 와요 여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딱히. 각하께 전술을 배우는데 오히려 감사해야죠.”

이선의 생활은 처가댁에 들어가 살게 된 이후로 일정한 패턴에 따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선 황제 일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이후 테레지아와 함께 제왕을 위한 실무 교육을 받는다.

향후 국가를 이끌어가기 위한 각종 지식들을 전수받고 나서는 승마, 테니스 같은 귀족과의 사교 활동에 유용한 운동들을 익힌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저녁.

이후엔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든가, 부부간의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잠들었다.

물론 언제나 똑같이 굴러가는 건 아니고, 도중에 다른 스케줄이 끼어들기도 했다.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트레이닝을 한다든가, 외교관들과 국제 정세에 대하여 논의한다든가.

오늘의 경우, 이선은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고 오는 길이었다.

“식사는 했어요?”

“아직이네요.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려서.”

“그럴 줄 알고 준비해 뒀어요. 같이 먹어요.”

밤이 깊었음을 감안해 위에 부담이 적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고기류를 되도록 피하고 샐러드나 생선구이 같은 요리가 주류.

프리드리히가 밥과 비슷해서 좋아하는 리조토도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돌았다.

“고마워요.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뭘요. 시녀와 요리사들이 수고해 준 걸. 자, 이것부터 드셔보세요.”

테레지아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와 함께 내민 새우를 포크째로 물었다.

발라진 소스의 상큼함과 신맛이 동시에 입안에 감돌았다.

참으로 상냥한 아내가 아닌가. 이선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처음부터 이 마음씨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지만, 갈수록 후회보다는 안도감이 커져가는 나날이었다.

“흑해 쪽은 어떻게 되어간대요?”

“러시아가 계속 쾌진격을 거듭하더군요. 이대로라면 올해가 끝나기 전에 발칸에 도달할 정도로.”

“조만간 아버지가 사절을 보내시겠네요. 오스만도 화친이 급할 테니.”

서로의 얼굴이 가까이 보이는 식탁에 모여 앉아 화목히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영락없는 금실 좋은 부부의 모습이었으나, 그 내용으로 국제 정세와 국가 시책을 논하는 부부는 세상이 이 둘밖에 없으리라.

반주로 이탈리아산 와인을 곁들여 가며 두 남녀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 프리드리히. 저 다음 주에 멀리 나가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백작 부인과 다과회가 있거든요. 아마 밤늦게 돌아오지 않을까…….우읍!”

말을 하다 말고 구역질을 참는 모습에 이선이 당황했다.

“이, 이봐! 거기 누구 없나?! 빨리 와주게!”

“괘, 괜찮아요. 그냥 조금 메스껍달까……. 며칠 전부터 영 속이 안 좋았거든요. 푹 쉬고 약이라도 먹으면 괜찮아지겠죠. 최근에 운동을 게을리해서 그런가 봐요.”

본인은 별 탈 없다면서 손을 내저었지만, 얼굴에는 아직도 파리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정말로 건강이 나쁘다기보다는 무언가 속에 얹힌 게 있는 듯했다.

‘……설마?’

눈에 익었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는 증상이었다.

병치레 한번 겪지 않고 건강하던 여자가 급작스레 구역질을 하고 입맛이 바뀐다면…… 상식적으로 생각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네 번이나 보지 않았던가. 두 번은 정실 혜경궁 홍씨를 통해서, 다른 두 번은 후궁이었던 숙빈 임씨를 통해서.

의학적 지식은 일천했으나, 이 분야에 한해서만큼은 이선은 나름 전문가였다.

“테레지아.”

“네?”

“축하합니다. 임신이에요.”

* * *

“임신이라고? 정말인가?”

소식을 전해 들은 카를 6세와 황후는 깜짝 놀랐다. 결혼한 지도 이제 어언 반년째.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소식이 도착했단 말인가?

“프리드리히 그 녀석이 말했나? 의사들은?”

“이미 검진을 했다고 합니다. 입덧이 나타나고 있으니 약 3개월 정도로 추정되고, 시녀들의 말로는 월경도 두어 달가량 멈췄다고 하더군요.”

“어머, 우리 딸이 벌써…….”

그렇다면 확실했다. 폐경이 오려면 수십 년은 남은 아이가 생리를 멈췄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뱃속에 품었다는 신호.

합스부르크와 호엔촐레른의 결합과 우애를 보장해 줄 후손이 생겼으니 그야말로 대경사였다.

결혼 동맹이 1대로 끝나지 않고 동군연합을 통해 세력을 강화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경축드립니다, 폐하!”

“제국의 앞날이 밝겠습니다!”

“다들 고맙네. 이제 후사 걱정은 덜게 되었어.”

신료들의 환호 속에 즉석에서 황녀의 회임을 축하하는 연회가 결정되었다.

프로이센에 초청장을 보내고, 제국의 각 영방들도 초대하여 성대하게 열어야 마땅하리라.

마침 카를 6세와 빌헬름 1세가 다음 달에 함께 사냥을 나갈 예정이었던지라 시기도 적절했다.

한편, 이제 할아버지라 불리게 될 카를 6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임신 소식이 유럽의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향후 정책을 어떻게 이끌면 좋을까.

손자가 태어난다니 아버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그것과 외교적 실리는 별개였다.

‘프리드리히는 전쟁에 보내지 말아야겠군. 빌헬름 그놈이 화내겠지만, 아내가 임신했으면 남편이 옆에 있어줘야지.’

3개월째라면 내년 3~4월에 아이가 태어난다는 소리다. 출정하면 못해도 1~2년은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아비가 자식의 출생을 보지 못하면 쓰나.

‘파견도 서둘러야겠고 말이지.’

그간 파죽지세의 성공을 거듭해 온 러시아군은 여름이 되자 주춤하기 시작했다. 라스푸티차는 해결되었지만 대신 수인성 전염병과 고질적인 수송 능력 부족이 발목을 붙잡은 탓.

얼마나 심각한지 한 달에도 천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왔다.

튀르크 군대는 이 약점을 이용해 러시아군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전황이 계산대로 풀리지 않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게 참전을 요구하며 압박해 왔다. 명분도 저들에게 있고 상황도 적절하니 거절할 핑계도 마땅찮다.

‘우선 강화 협상을 중재하겠다고 사절을 보낸다. 거절하면 그대로 준비한 군대를 쓰면 될 테고.’

이윽고 1735년 8월 중순, 오스트리아의 협상안이 이스탄불의 궁정에 전달되었다.

* * *

수운(水運).

물을 통한 수송 수단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물류의 주력을 담당해 왔다.

고대에는 통나무배로, 중세에는 목선으로, 현대에는 강철의 컨테이너선이 물건을 이곳저곳으로 운송한다.

해안가에 대도시가 많은 것도 수운의 덕택이었다.

물품을 싣고 내리기 위한 항구, 일하는 수천 명의 노동자, 각지로 수송하기 위한 유통 시스템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시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수운은 곧 나라의 대동맥이자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스페인 제국이 한때 남아메리카 포토시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은과 광대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당대의 최강국이 되었음에도 수십 년 만에 몰락하여 영국과 프랑스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된 이유에는, 수운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

경제를 담당하던 유대인의 추방이나 내부 분열 등의 문제도 컸지만 수운이 열악한 탓에 자체적인 경제력의 발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상품을 생산해도 유통하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산업이 발전하겠는가?

그렇다면 조선은 어떤가 하면, 스페인과 정확히 반대였다.

한강, 임진강, 대동강,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 수도 없는 강과 하천이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전국 어디에서든 산이 보이고, 조금만 걸으면 하천이 보인다.

조선은 이 천혜의 환경을 활용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육로 환경이 심히 미진하여 세금을 세곡선으로 옮기는 등, 수운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

보부상? 그게 말이나 되나? 등에 멘 지게 하나로 먹고사는 소매꾼들이 어찌 물류의 핵심이 된단 말인가?

경강상인이나 송상, 만상도 넓게 보면 보부상에 속했다. 수레와 배를 쓴다지만 순수 인력에 의한 운송이 대부분이었으니.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서라면 납득할 수 있다. 산간벽지까지 배를 끌고 가지는 못하니 도수 운반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평지에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50명의 인력이 주어졌다고 가정하자. 이들로 하여금 지게로 물건을 운반하게 하면 작은 마을을 보름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배를 쓰게 하면 반년을 배불리 먹인다.

그렇다면 위정자로서 어느 쪽을 써야겠나?

육로 수송은 그만큼 효율성과 운반능력이 떨어진다. 철도가 개발되기 이전까지 거의 모든 면에 있어서 수운에 비해 불리했다.

프리드리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에서 널리 쓰이던 수송수단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특수한 기술이나 재료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발상의 전환만 있으면 대량생산도 간단한 방식이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전하! 곡식을 오십 섬이나 올렸는데도 가라앉질 않습니다!”

“연구를 거듭하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다. 당장은 이걸로 만족해야겠지만.”

Narrow boat.

그대로 번역하자면 ‘긴 보트’가 되는 이 배는 하천이나 좁은 운하 등 특수한 지형에서 운용하도록 맞춰 제작된 소형선이었다.

폭은 6척 반(2.2m)으로 조운선의 사분지 일에 불과하나, 길이는 판옥선보다 기다란 바늘같이 생긴 배.

그러나 수송 능력은 가히 경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크기 기준으로 한 척의 화물 적재량은 약 15톤가량.

서너 척만 있으면 대형 조운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심지어 필요한 운용 인원도 적었다. 돛, 노, 키를 전부 없애고 우마로 견인해서 좁은 수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 가축 관리인 한두 명에 선장 한 명이면 충분했다.

“협저선을 만들기 어렵지는 않았나?”

“전하께서 조선장(造船匠) 여럿을 붙여주신 덕분에 어떻게 되었습니다.”

시행착오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함선은 평저선. 용골을 사용해 밑이 뾰족한 협저선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했다.

흑룡공장의 가공 설비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인근에 작은 조선소를 세우고 각지의 수군영에서 장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나마 협저선의 형태인 왜선을 다뤄보았을 부산포의 뱃사공도 몇 명 데려왔고.

몇 척을 가라앉히고 부숴먹으면서 연구를 거친 결과, 한 달 반 만에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바로 지금 프리드리히의 눈앞에 떠다니는 배였다.

“설계도는 어떻게 되었지? 가져와 보거라.”

“옛! 여기 있사옵니다.”

프리드리히의 지시에 조선소장이 몇 장의 두루마리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상세한 규격과 조립 순서가 기록된 선체도(船體圖)가 담겨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Narrow boat, 이제 ‘초협선’이라 칭해질 배를 제작하라 명령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이것이었다. 상세한 도면.

이제껏 조선에 없던 물건을 보급하려면 무엇보다도 이해하기가 쉬워야 했다.

조선(造船)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만 있다면 누가 도면을 읽더라도 이해할 수 있고, 제작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 되었다. 적당한 측면 그림과 대략적인 수치만 써놓고 나머지를 조선장의 재량에 맡겨놓는 식으로 했다간 자원과 시간만 날린다.

최종 결과물을 보아하니, 몇 번씩 중간보고를 받고 직접 빨간 붓을 들어 검수한 보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무려 주상전하에게 직접적으로 까이고 혼나야 했던 장인들이야 죽을 맛이었겠지만.

“괜찮구나. 이건 내가 가져가겠다. 그간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포상으로 소 3마리와 쌀 다섯 섬을 내릴 테니 오늘내일은 마음껏 마시고 놀도록 하라.”

“주상전하 천세!”

포상 휴가에 환호성 지르는 장인들을 뒤로하고 프리드리히는 몸을 돌렸다.

이제 이것을 도화서로 가져가서 베끼게 할 작정이었다. 한 서른 개쯤 만들어서 상단들에 뿌려주면 알아서 유용히 써먹으리라.

장사에 도가 튼 자들이니 금세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필요하다면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서 운하도 파겠지.’

유럽에서는 민간 자본이나 협동조합 등이 자체적으로 출자해 운하를 건설하고는 했다.

그곳을 지나는 초협선을 상대로 통행료 장사도 하면서.

조선같이 하천이 많은 나라에선 그럴 필요성이 비교적 적겠지만, 상업이 더욱 발전한다면 수요가 생길지도 몰랐다.

‘어쩌면 압록강에서 낙동강까지 4대 강을 모조리 잇는 운하를 건설할지도…… 아니, 이건 너무 나갔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프리드리히는 말에 올라탔다.

볼일은 다 봤으니 한성으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누군가 달려왔다.

“경계하라! 사격 자세로!”

“아니, 잠시 기다려 보거라.”

이에 흑룡영의 호위병들이 경계하여 총을 겨누려 하자 프리드리히가 제지했다.

자신을 해치려 한다기에는 복장이 너무 추레했다. 군데군데 해지고 더러워진 흰옷에 상투도 풀어 헤친 차림. 어디 비수를 숨길 데도 없어 보이는데 암살자는 아니겠지.

숨을 헐떡이며 호위병들 앞에 멈춰 선 남자가 프리드리히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움과 경외감, 공포 등이 어지러이 섞인 시선.

엎어지듯 바닥에 쓰러지더니, 갈라지는 목소리로 간청해 왔다.

“전하! 소인은 여기서 노역하는 박영철이라고 하옵니다. 제발 살려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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