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세자와 뒤주대왕 75화
황손, 그리고 역사
“아아아아악!! 프, 프리드리히! 제발 와줘요! 너무 고통스럽단 말이에요!”
“제길, 지금이라도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가 들어가서 뭘 한단 말인가. 부디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게.”
“압니다! 하지만 아내가 저리 고통스러워하는데 제가 어찌 참으란 말입니까!”
늦은 초저녁에 시작된 산통은 호프부르크 궁정의 모든 사람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단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던 황제와 황후가 화들짝 놀라 달려오고, 주치의들이 몰려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최근 며칠 사이, 황녀의 배가 언제라도 출산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기에 대응은 빨랐다.
산파와 시녀들이 모이고 따뜻한 물과 깨끗한 천이 공수되어 도착하니 침실은 어느새 분만실로 변모해 있었다.
“전하, 제발 진정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불안해하시면서 뭘 하시겠다고요!”
“다 잘될 테니 걱정 놓으십시오……. 몇 시간만 기다리면 아이가 나올 테니 폐하 말대로 차분히 있는 게 돕는 겁니다!”
그런 혼란 가운데, 이선은 입술을 악물고는 연신 초조해했다. 호탕하고 쾌활한 성격의 그로서는 상당히 드문 모습이었다.
덕분에 시종들은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이선의 기색을 살펴야만 했다.
말 위에서 한 손으로 적병을 휘두르는 거한이 날뛰었다간 자신들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저 머리통만 한 주먹에 잘못 맞기라도 하는 순간 병원이 아니라 그대로 저세상 신세다.
“말했지 않나, 알고 있다고! 그래도 진정이 안 되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자네들도 아들딸 태어날 때 차 마시고 수다나 떨면서 기다렸나?”
“아, 아닙니다!”
누가 모르겠나. 방해만 된다는 걸.
하지만 아버지의, 남편의 마음이란 그리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과거 다섯 명의 자식을 슬하에 두었었음에도 새로운 아기를 맞이하는 심정은 언제나 새롭고 두려웠다.
혹여나 산모가 죽지는 않을까, 유산하지는 않을까, 기형아이지는 않을까, 태반이 산도를 막지는 않을까.
오만 가지 걱정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소한 일로도 사람은 쉽사리 죽어 나가는 험난한 세상이기에 더더욱.
이성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데, 마음은 당장 들어가서 테레지아의 손을 잡아주라고 하고 있었다.
“……제길. 의사들에게 얘기해 주게. 반드시 무사히 출산하도록 최선을 다하되, 여의치 않다면 산모를 우선시하라고 말이야.”
“그리 전하겠습니다.”
엘리자베트 황후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이선은 개의치 않았다. 카를 6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을 버려야만 한다면 추후의 기회를 우선시해야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무사하면 자식은 언제든지 새로 낳을 수 있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동군연합이 계속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살아야만 했다.
--털썩!
“주여, 부디 저희 부부를 어여삐 여겨주십사, 당신의 자비를 이곳에 베풀어주시옵소서. 해산의 진통과 위험으로부터 저의 아내를 보호해 주시옵고, 태어날 아기를 감싸주시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결국 불안을 견디지 못한 이선은 복도에 무릎을 꿇고는, 평소 걸고 다니던 십자가를 쥔 채로 기도를 올렸다. 아직 출산을 위한 기도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지라 정해진 문장을 따라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간절함과 소망을 담아 신심 어린 기도문을 즉석에서 주님께 바칠 뿐.
20년간 유학자로 살아와 가톨릭교도로서의 인생은 그 절반도 안 된다지만, 신실함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1분 1초가 평생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만 가고, 해가 저물어 밤하늘에 달이 늦게 떠올랐다가 다시 저물어 새벽으로 향하던 시각.
모두의 얼굴에 피로가 서서히 나타나려 하던 순간에.
마침내 오랜 고통의 결실이 세상에 빛을 드러냈다.
“응애! 응애애애!”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의사가 안도한 기색으로 문을 열고 나와 말했다.
“폐하, 전하!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테레지아는 무사한가?!”
“산모도 아이도 모두 무사합니다!”
“아……!”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도로 주저앉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살아남았고, 두 나라의 미래를 보장해 줄 황손이 태어났다는 안도감에.
마치 세상이 한번 멸망했다 다시 생겨난 것만 같은 충격과 기쁨이 동시에 몰아닥쳤다.
“자네 괜찮은가?”
“……예.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카를 6세의 도움을 받아 일어난 이선은 침실에 들어갔다.
테레지아는 땀에 온몸이 절어선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었다.
쌕쌕거리는 미약한 숨소리와 함께 가슴이 조금씩 들썩이는 걸 보면 아마도 지쳐 기절했으리라. 이럴 땐 그냥 자게 내버려 두는 편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이선은 경험을 통해 알았다.
“내 아들은 어디 있나?”
아기는 산파가 들고 있었다.
이선은 그녀에게서 포대기에 싸인 자식을 넘겨받았다.
제법 묵직했다. 한 9파운드(4.05㎏)가 조금 못 되려나? 엄청난 우량아였다. 그러니 테레지아가 실신해 버렸으리라.
“프리드리히, 이름은 생각해 두었겠지?”
“물론입니다.”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합의해 두었다.
남자아이면 이선의 뜻대로, 여자아이면 테레지아의 뜻대로 하기로.
공교롭게도 그가 생각해 두었던 이름은 본래 역사에서 테레지아의 7번째 아이가 가졌던 이름과 동일했다.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안 요제프. 어떻습니까?”
* * *
며칠 뒤.
제국의 미래를 이을 황손의 출산에 기뻐하기도 잠시, 카를 6세는 앞으로의 정세에 대한 고민에 돌입했다.
자신이 잇지 못했던 합스부르크의 남자 직계를 기특한 사위와 딸이 되살려냈다. 이제 그는 죽기 전에 이를 안정시킬 확고한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지. 전쟁은 끝났고, 후계도 확실하다.”
전쟁 때문에 미뤄왔던 선거를 치르기엔 지금만 한 적기도 드물었다.
대승을 거두어 민심도 황가를 향했고, 종교계의 여론도 호의적이다.
“이제 남은 건 성직 선제후들의 설득인데…… 역시 정공법으로 나서야겠어.”
트리어 대주교와 마인츠 대주교를 직접 구슬리는 건 포기했다. 아무리 뇌물을 쏟아부어도 계속 뜯어먹을 생각밖에 안 하니.
카를 6세는 그보다 윗선, 즉 로마에 있을 종교 지도자의 힘을 빌려볼 심산이었다.
카드는 충분했다. 발칸의 상당한 지역을 기독교의 품으로 되돌렸고, 이탈리아 전역이 오스트리아의 손에 있거나 머잖아 들어올 예정이다.
명분과 물리력 어느 쪽으로든지 교황을 압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낸다? 남작을 직접 보내기는 그렇고.”
곰곰이 생각하던 카를 6세는 어느 젊은이를 떠올렸다. 토스카나 대공국의 확보에 지대한 공을 세운 젊은 제국 자문회의 의원을.
이름이…… 카우니츠라고 했었나?
* * *
“이게 의주에서 보내온 서적들인가?”
“예. 앞으로도 발견하는 대로 구입하여 보내겠다고 하옵니다.”
“포상금으로 매입가의 두 배를 보내주거라.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 달라고 전달하고.”
프리드리히는 이금상이 보내온 책들을 한 권 한 권 살폈다.
프린키피아, 알마게스트, 그 외 각종 언어학, 인문학 및 과학 서적 등등.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여 두 손으로도 세지 못할 정도였다.
한자로 번역해 놓고도 이해하기 어려울까 봐 원어를 익힐 수 있도록 외국어별 교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생들을 가르칠 새로운 교재가 생겼다는 사실은 기뻤지마는, 그보다 프리드리히의 관심을 끈 부분이 있었다.
책 표지 뒷면 한구석에 자그맣게 쓰여진 출판 날짜였다.
“1752년, 1752년 2월이라…….”
자신이 있던 시기보다 22년이나 뒤인데다, 인쇄되자마자 책문에 배포되었을 리가 없다. 분명 저 먼 유럽에서 배를 타고 넘어와 광저우에 팔리고, 여러 상인의 손을 거쳐 요동 지역에 넘어왔으리라.
“과연 몇 년이 걸렸을까.”
유럽에서 중국까지 항해하는 데 최소한 8개월, 넉넉잡아서 1년은 생각해야 한다.
인쇄되어 창고에 보관되고, 책을 주문한 상인들이 구입해 가는 기간도 감안하여 한두 달은 추가해 줘야겠지.
그리고 중국은 물류가 발달하지 않았다. 또한 책은 다른 사치품들에 비해 흥미를 끌기 어려웠다.
말인즉슨, 금방금방 팔려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유명한 광저우의 13행이 구매를 했다 해도 그것이 다른 상인들의 손에 넘어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게 분명하다.
남부에서 활동하는 상인 A가 입수했다가 다시 북부에서 활동하는 상인 B에게 넘어가, 이윽고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상인 C에게 판매된다. 상인C는 이를 책문으로 가져와 의주 만상 이금상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중국 내부에서의 유통 과정만 따져도 2~3년은 족히 소모되었으리라.
“내가 빙의된 지도 1년을 넘어간다. 지금이 여름이니…… 56년이라고 봐야 하나?”
단편적인 실마리를 통해 도출된, 그러나 상당히 정확한 추측이었다.
“염병할. 자식이 장성해서 손자를 낳고도 남을 시간이잖아!”
프리드리히는 쌍욕을 내뱉었다.
빙의될 당시 프로이센과 조선의 계절이 달랐기에 시간을 넘어왔으리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아무리 그래도 26년이라니.
한 세대를 넘게 뛰어넘어 버렸잖은가.
“이래선 프로이센에 돌아가도 얼굴도 못 알아보겠어.”
오랜만에 가족 걱정이 들었다. 빌헬미네 누나는 결혼했을까, 하인리히 녀석은 제 성향대로 군인이 되었을까.
그간 살아남는 데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던 사랑하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아버지의 손에 죽지는 않았을까 하는 공포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개항을 서둘러야겠다. 권력도 확보해 놔야겠지.”
배가 필요했다. 드넓은 대양을 가로질러 유럽까지 갈 수 있는 배가. 그리고 이를 운용할 실력 좋은 선원들도.
프랑스의 개구리 놈들은 자존심 높은 주제에 영 어설프니 차라리 영국이 낫겠지. 욕심으로 가득 찬 놈들이지만 능력은 확실하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에라도 유럽으로 향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반대할 게 뻔하니.
조선은 왕이 없으면 국정이 통째로 마비되어 버린다.
아무도 왕의 의사에 거스르지 못하는 절대권력을, 자신이 없어도 국정이 굴러가는 행정 체계를 완성해 두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건 또 뭐지?”
이번엔 뒤표지 한가운데에 떡하니 박힌 문양에 눈길이 갔다. 노란색 바탕에 후광이 비치는 검은 깃털의 쌍두독수리.
유럽 천하에 오직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
문제는 이게 왜 여기에 있냐는 것이다.
왜 제국에서 만든 상품이 청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일까.
“제국이 내가 없던 사이에 바다로도 진출했나?”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처럼, 신성로마제국의 해외무역을 담당하던 오스텐더 회사는 거의 폐지되기 직전이었다고 프리드리히는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폐쇄된 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빙의한 지 1년 뒤의 일이니 맞는 말이었다.
서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북으로는 프로이센을, 동으로는 오스만을 잠재적 적국으로 둔 신성로마제국이다. 수십 조각으로 나뉜 누더기 같은 나라의 국력으로 모두를 상대하면서 바다로 나아간다라?
글쎄, 카롤루스 대제와 사부아 공자 외젠이 수십 명씩 있어도 어려울 텐데.
대체 20년간 유럽의 정세에 무슨 대격변이 일어났을지, 프리드리히는 참으로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의 육신의 본래 주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알면 아마 뒤집어지고도 남겠지만.
“뭐,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여봐라!”
“전하, 부르셨습니까?”
프리드리히가 외치자 상선이 방문을 열었다.
“한문과 언문을 모두 아는 궁녀와 내시들을 불러 모으거라. 될 수 있으면 사역원의 역관들도.”
“마흔 명 정도면 되겠나이까?”
“못해도 그 세 배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서적들을 전해주도록 해라. 권별로 열다섯 부씩, 전부 언문으로 번역하여 필사하라고 전하도록.”
“어명 받들겠사옵니다.”
추후에 규장각에 들어올 신입생들에 대비하여 이전보다 부수를 늘렸다.
이번엔 라틴어 직역이 아니라 한자를 중역하는 것이니 작업 속도도 빨라지리라.
“그럼 교재는 해결되었고, 지필묵이 어디 있더라?”
서재 한구석에서 종이를 꺼낸 프리드리히는 먹을 갈아, 연적의 물을 따라 붓에 적셨다. 아직은 서툰 붓글씨로 단 두 개의 글자를 조심스레 적어냈다.
時來(시래).
때가 왔다.
두 장의 종이에 똑같은 글을 쓰고 접어 봉투에 넣었다.
호위병들을 불러 한 장씩 맡기고 이를 홍봉한과 채제공의 집에 보내라 지시했다.
오랜 기다림의 나날이 마침내 결실을 맺을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조정을 난장판으로 만들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