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자세자와 뒤주대왕-105화 (105/175)

감자세자와 뒤주대왕 105화

정치, 그리고 함정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 1741년 12월.

“러시아의 새로운 임페라토르, 옐리자베타 폐하 만세!”

“러시아 만세! 로마노프여, 영원하라!”

이반 6세의 어머니이자 섭정,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옐리자베타의 권력을 둘러싼 암투는 결국 후자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황실 친위대를 장악하여 이를 기반으로 일으킨 궁내 쿠데타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권력만 있었지 무력은 모자라던 섭정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32세의 젊은 나이로 러시아 제국을 통치하는 여제가 된 옐리자베타는, 대대적인 내부 개혁을 단행했다. 빠르게 궁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을 수중에 넣는데 몰두했다.

이전 시기부터 득세하던 발트해 인근의 독일인 귀족을 숙청, 러시아의 전통적인 귀족들을 중앙으로 등용했다.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독일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정권 교체기의 혼란을 노리고 쳐들어온 스웨덴을 상대로는 무려 20만 대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 핀란드 남동부를 확보하기까지 했다.

재정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다소 무리가 뒤따르긴 했으나, 승전을 거둔 여제라는 명성과 위세를 얻었으니 정치적으로는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폐하, 결혼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나이에 면사포를 쓰라고?”

젊은 시절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자 카를 아우구스트와 약혼이 오가기도 했으나, 상대가 요절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정부(情夫)를 두고 성욕을 채울지언정 제대로 된 남녀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게 옐리자베타 여제다.

미인으로 유명하다고는 해도 세상에 어느 귀족이 서른 살 넘은 여자와 결혼하려 들겠나? 빠르면 십 대 중후반에도 아이를 가지는 시대인데.

표트르 대제부터 시작된 로마노프의 혈통은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여제 본인의 자식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이 답이 없어 보이는 어려운 난제를 두고 고민하던 와중에 눈에 들어온 사람이 카를 페터 울리히였다.

덴마크 올렌보르 왕조의 방계이기도 한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

겉으로는 거창한 직위를 가졌으나 실제론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어린아이.

실권은 선대 시절에 대부분 사라졌고 영토마저 어린 시절에 대부분 빼앗겨 유럽 각지를 유랑하며 살아가는 신세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였으며 선대가 스웨덴 왕실 출신인 최상급 혈통이었기에, 스웨덴에서도 차기 왕실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눈독을 들이던 인물이었다.

“당장 그 아이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오도록 하라! 지금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다던가?”

“그게…….프로이센이라고 합니다. 황제가 보호하고 있다더군요.”

떠돌이 신세라니 쉽게 신병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집이 있었다니. 무엇보다도 위치가 독일이란다.

다른 국가라면 몰라도 신성로마제국에 소속된 영방이라면 옐리자베타 입장에서는 참으로 골치 아프기가 그지없었다.

그냥 이유를 알려주고 송환을 요구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을 모르는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여제의 권력 기반은 주로 반오스트리아파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동군연합 관계.

귀족들이 저자세로 도움을 요청하는 여제의 굴욕스러운 모습을 보고서도 지지를 이어갈 것 같은가?

물론 고압적으로 요구만을 늘어놓아도 된다. 성공할 가능성도 없거니와, 성공한다 쳐도 오스트리아와의 외교 관계가 X창 날 것을 감수해야겠지만.

후계자 하나를 얻기 위해 수십 년에 걸친 오랜 우방을 잃어버리고 유럽 대륙에서의 외교적 영향력을 상실한다라. 저울질하기엔 너무나도 작은 보상과 치명적인 대가였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진퇴양난이었다. 스웨덴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 카를 페터 울리히의 신병을 확보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약점을 붙잡혀 사정사정해야 할 판에 고개를 숙였다가는 정치생명이 끝장난다.

“역시 그 방법이 최선이겠지.”

고심에 고심을 거쳐 옐리자베타가 내놓은 해답은 일종의 물밑 거래였다.

공식적인 사절은 오만하고 거만한 모습을 보여주되, 수면 아래로는 비밀리에 보낸 특사를 통해 자신이 이래야만 했다는 사정 설명과 함께 부탁을 전한다. 귀족들과 오스트리아의 여왕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742년 4월 18일.

러시아가 보낸 공식/비공식 외교관들이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오스트리아에 도착했다.

“……그대의 말은 알겠다. 생각해 보고 답할 테니 물러가 있도록.”

“예. 부디 잘 부탁드리겠나이다.”

옐리자베타의 밀사에게 축객령을 내린 마리아 테레지아는 잠시 턱을 괸 채로 있다가, 종을 흔들어 시종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가서 내 남편을 불러오거라. 포도주도 한 병 내오고.”

오랜만에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돌아와 책을 읽으며 쉬던 이선이 침실에 도착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불렀어요, 테레지아?”

“어서 와요, 여보. 방금 러시아에서 요구하기를…….”

설명을 듣고서는, 이선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세상만사 참으로 모를 일이네요.”

기억하기로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가엾어서 본인이 소유한 궁전에 방 한 칸을 내줬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아직 살아 있을 적의 일이었지 아마?

딱히 쓸모도 없는 곳인지라 결혼하기 전까지는 머물러도 된다고 자그마한 호의를 베풀어주었는데, 그게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외교 관계를 감안하면 당연히 보내줘야겠지만…… 그러면 우리가 얻는 게 없어서 걱정이에요.”

기브 앤 테이크.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

외교만이 아니라 무역이나 개인 간의 사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당연히 지켜지는 상식이다.

물론 지금의 경우에는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 지속 및 대규모 지원군이라는 보상이 있다고는 하나……. 뭔가 부족했다. 군대가 탐이 나기는 해도 당장 급하지는 않았다.

헝가리의 병사들도 내년이면 편성이 완료될 테고 바이에른을 박살 낸 이상 상대는 프랑스 오직 하나다. 조만간 영국도 조지 2세의 주도로 참전할 낌새가 보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상대 국가의 후계자를 인질로 잡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 아닌가. 분명 무언가를 더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테레지아가 고민을 털어놓자 이선은 한 가지를 제안했다.

“이렇게 하죠.”

“뭐가요?”

“러시아 대사에게는 땅이 굳는 7월 즈음에 보내주겠다고 하세요. 그동안 내가 이쪽으로 회유해 볼 테니까.”

동맹국의 후계자가 아국에 우호적인 성향이 되도록 구워삶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자주 쓰이는 방법 아닌가?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던 것을 이선이 도와줬으니 카를 페터 울리히도 분명 어느 정도는 호의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호의가 최대한 오랫동안 이어지도록 은혜를 듬뿍 베풀면 되는 일이다.

“그거 좋은 방법이네요! 부탁할게요. 믿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럼 난 읽던 책을 계속-”

“어머, 어딜 가는 거예요? 벌써 시간도 자정을 넘었는데. 오늘 밤에도 힘 좀 써야죠, 여보?”

“하하하하…….”

분명 잘만 하면 국가의 향후 수십 년간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훌륭한 전략이었다. 다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폐하께선 그만 한 가지를 간과하고야 말았으니.

“오랜만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바이에른에서 이겼다는 소식에 얼마나 감격에 벅찼는지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승전이었습니다, 폐하!”

“어, 어어. 그래. 반갑구나.”

카를 페터 울리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선 빠돌이였다.

* * *

“대체 언제 배후로 돌아왔단 말인가? 한양에 있어야 할 놈들이!”

홍계희는 경악했다. 원수와 부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대체 어떻게?

“대원수, 당황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명령을! 병력을 재배치해야 합니다!”

“그, 그래. 마차와 우마차들은 한강 인근으로 물리게. 1군과 3군을 앞으로 보내고! 아니, 2군이었나? 아무튼 간에!”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야 나중에, 승리를 거두고 나서 알아내도 늦지 않다.

저들은 깃발만 걸어둔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수만은 되어 보이는 인파가 창의군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저 흰옷에 피아 구분을 위한 붉은 조끼만 껴입은 병사가 많았으나, 소수나마 몸에 꼭 맞는 바지와 검은 코트를 입은 놈들이 보였다.

분명 흑룡영이겠지. 틀림없이 미끼부대 따위가 아닌 정예병들이다.

분명 남아 있는 병력을 모조리 긁어왔을 게 분명하다. 저들만 쓰러뜨리면 이 내란은 창의군의 승리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예?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병사의 통솔에 집중하거라.”

적진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을 상황을 예상하면서 프리드리히는 조소했다.

정말이지, 너무 쉬워서 안타깝기까지 했다. 부대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갈팡질팡 뒤섞이는 꼴이라니.

자고로 지휘부가 경험이 없고 당황해서 마구잡이로 명령을 내리면 저런 참상이 벌어지는 법이다.

권력 잃기 싫다고 모여서 반란 터뜨린 놈들이니 당연하기야 하다만.

‘그건 그렇고, 정말로 이게 먹혀들 줄이야.’

평야보다 산이 두 배는 지옥 같은 조선반도의 지형을 보고 떠올린 작전이었다.

실전 경험이 모자라고 수적 우위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창의군은 정찰을 게을리하니, 산 하나만 사이에 두어도 은폐가 쉽지 않을까? 함정에 질리다 못해 산맥을 타고 오는 놈들에게 멀리까지 수색하면서 신경을 쓸 여력도 없을 테고.

놀랍게도 정말로 그러했다. 현대에는 안양시로 구분되는 지역에 사흘 전부터 전군을 배치시켜 두었으나 들키지 않았다.

고작해야 30리 떨어진 곳에 적진이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니, 유럽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어제저녁까지는 혹시나 몰라 조마조마했지만, 어쨌든 성공했으므로 이어서 하달할 명령이야 정해져 있었다.

일찍이 재워둔 병사들을 꼭두새벽부터 깨워서 강남 방향으로 진군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창의군에 대한 양면포위구도다.

“수군에 연락을 보내도록. 계속 원위치를 유지하며 기다릴 것. 신호를 보내면 사전에 알려준 대로 행동하라고 말이다.”

“명령 받들겠나이다.”

지금은 그저 한강 도하를 막는 방패 역할에 불과하나, 머잖아 다가올 순간에 돌변해 적의 뒤통수를 노릴 비수가 되어줄 것이다.

전달할 서신을 전령에게 넘겨준 프리드리히는 다시금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느긋이 정신 차리고 전투준비하게 기다려 줄 이유는 없으니 말이지.’

중세 시대의 결투라면 모를까, 이건 전쟁이다. 그것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양측 도합 20여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내전.

양측의 정치적-그리고 물리적-인 생명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 정정당당이고 예의고 나발이고 없다.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서 물고 뜯어야 할 판에 무슨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창의군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시를 내렸다.

“대열을 유지하면서 진군하라. 흑룡영은 좌익의 선두를 맡도록 한다.”

프리드리히는 근왕군을 크게 1만 단위의 부대 8개로 나누어 편성했다.

채제공의 근왕군이 5개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자원한 농민들로 3개다.

지휘관으론 군관 출신의 선비들이나 규장각에서 병법을 공부하고 자원한 유생들을 임명했다.

이들 각각을 ‘영’으로 칭하고, 아래에는 ‘부’라는 하위 부대를 3개씩 두었다.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명칭을 붙여야 무장들도 알아듣기가 편할 테니까.

유럽으로 치면 대략 군단-연대 정도의 관계겠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군.’

반 시진 전부터 배치를 마쳐둔 군세는 일사불란하게 진격했다.

보통의 걸음걸이보다 약간 빠르게, 양손에는 제각기 무기를 움켜쥐고는 역도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의 뒤로 쿵쾅거리며 북이 울려 퍼졌다.

프리드리히가 배치한 군악대다.

규칙적인 리듬으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소리는 병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전하,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착용해 주소서.”

“음? 아, 깜박하고 있었구나.”

종군한 내시 하나가 천막에 놔두고 왔던 붉은색의 의복을 가져왔다. 얼핏 보면 그저 천옷 같아도 속에 철판으로 된 갑찰을 여럿 덧붙여 만든 전형적인 상하 분리식 두정갑이었다.

유려한 장식과 옥으로 장식된 견철은 오직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만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증표와도 같았다.

허나 보통 두정갑과는 외형이 다소 달랐는데, 흉부와 등 부위에 앞뒤로 큼지막한 금속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미관상으로는 흉하였으나 두툼한 것이 조총을 맞아도 견뎌낼 듯했다.

본래 두정갑은 허리를 조여서 입는 헐렁한 갑옷이건만 이건 금속판이 서로 구부러져 연결된 탓에 묶지 않아도 절로 형태가 갖춰졌다.

‘생각보다 그리 무겁진 않군.’

이는 사실 프리드리히가 고안해 낸 판금갑옷과 두정갑의 혼종이었다. 팔다리와 기타 부위에 대해선 두정갑의 형식을 유지했으나, 흉갑과 배면에는 내부의 찰갑을 떼어내고 서양의 방식을 채용한 시제품.

유럽의 상인들에게서 우호의 선물이랍시고 받은 퀴레시어 아머를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다가 떠올려 시험 삼아 제작해 보았다.

보기에는 영 아니어도 방어력 하나는 확실했다. 적어도 지금의 조선에서 총탄을 완벽히 막아낼 수 있는 갑주는 이게 유일하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친정(親征)을 선포하자 게거품을 물던 신하들과 혜경궁 홍씨를 설득하지도 못했겠지.

조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어도 이런 문화적 차이는 가끔씩 프리드리히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였는가?”

위아래로 갑옷을 차려입고 김천복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 진군을 멈추도록 하라. 그리고 불을 붙이도록.”

입에서 입으로, 가끔은 고함 소리를 동반하여 명령 사항이 전달된다. 8만의 군세가 모두 발걸음을 멈추기 위해서는 몇 분에 달하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추가로 일다경 가까이 시간이 흘러, 창의군이 겨우 정신을 차리려 하던 찰나.

“셋, 둘, 하나.”

--콰앙!

창의군이 서 있던 땅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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