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세자와 뒤주대왕 117화
식민지, 그리고 교육
“북아메리카라!”
식민지 운영 경험이 일천한 신성로마제국의 사람으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지명이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영란전쟁에 패해 쫓겨난 이후로는 영국/프랑스/스페인 3국만의 각축장이 된 지역이었으니까.
이 욕심 많은 섬나라 놈들이 만에 하나라도 자기네 식민지를 거래 대상으로 삼아 넘겨줄 리는 절대로 없었다. 그렇다면 전쟁의 패배자들에게서 뜯어내겠다는 의미일 텐데.
“얼마나 넘겨줄 생각인가?”
“바이에른 분할안과 마찬가지로 지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한번 보시고 얘기하시지요.”
유럽의 모든 국가를 합친 것보다 커다란 대륙이 네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를 상징하는 초록색, 누벨 프랑스(루이지애나)의 파란색, 13개 식민지의 붉은색.
그리고 동부의 끝자락에, 원래는 스페인의 소유인 플로리다반도가 있었을 자리부터 시작해 위로 뻗어 나간 황색의 영역이 있었다.
남쪽 끝으로는 멕시코만에서 북쪽 끝으로는 오대호에 이르기까지.
현대로 따지면 플로리다와 조지아 서부, 앨라배마, 미시시피, 테네시, 켄터키, 인디애나, 오하이오에 웨스트버지니아의 서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땅덩어리.
이곳이 바로 합스부르크와 호엔촐레른의 소유가 될 새로운 식민지였다.
이름을 붙이자면 ‘새로운 로마(Neue Rom: 누에 롬)’ 정도가 되려나?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중 하나의 이름을 붙이기엔 형평성 문제도 있고, 어쨌든 이선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니까.
“확실히. 거대하기는 하군그래.”
“식민지 건설이 곧 부의 축적 아니겠습니까. 가지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지요.”
적어도 미래엔 확실히 그럴 예정이었다.
아직 탐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지, 온갖 지하자원에 비옥한 농토가 넘쳐 나는 알짜배기 지역들이 몰려 있었으니.
“제안은 이해했네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걸 모르는 이선은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어째서입니까?”
“제국에는 해군이 없네. 자국 해안 방위도 겨우 하는 마당에 무슨 해외 식민지를 운영하겠나?”
월폴이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는다.
“그래서 선제 카를 6세께서 베네치아의 기술을 들여오면서까지 슈테틴과 트리에스테에 조선소를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뻔히 들통날 거짓말은 그만두시지요, 폐하.”
1737년에 계약을 맺고 1739년에 완공된 두 지역의 조선소는 현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보유한 최대의 건함 시설이었다.
노하우가 부족하긴 해도 연간 수척의 프리깃과 그 두 배를 넘는 코르벳을 건조할 역량을 갖췄다.
하필 만들어지자마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진 바람에 인력 부족으로 폐쇄되는 비극을 겪을 뻔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기도 했고, 향후 제국의 미래를 위해선 함대는 필수였다.
그렇기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시체제로 예산을 운용하면서도 꾸준히 건함 계획에 자금을 할당해 왔다.
덕분에 지난 4년간 건조된 함선의 규모는 5/6급 프리깃이 20여 척에 코르벳이 30여 척. 스페인에서 양도받은 5척의 전열함과 10척의 프리깃까지 포함하면 제법 상당한 규모였다.
아, 전열함은 5척이 아니라 8척이었다. 작년에 이탈리아를 공격해 왔던 상륙부대를 막으면서 항구에 정박해 있던 3급 전열함 세 척을 노획했으므로.
간단하게 평가하자면, 네덜란드나 영국 같은 주요 해군 강국에는 미치지 못해도 그 바로 아래는 되는 전력이었다.
자국의 해안 방위와 해적 퇴치는 물론이고 잘만하면 지역 패권도 노려볼 만했다. 멀리 떨어진 식민지 하나 운영 못 하겠다고 엄살 피울 수준은 아니란 말이다.
“주력함의 부족이 걱정이시라면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전후협상에서 프랑스의 배상금을 조금 낮추는 대신 함선을 넘기라는 조항을 붙이면 될 겁니다.”
결국 이선도 이 이상의 반론은 포기해야만 했다.
“알았네, 알았어. 3주, 아니, 한 달은 기다리게. 빈에 연락을 해봐야겠으니.”
“물론입니다. 서두를 건 없지요.”
아무리 이선이 황제였어도 실권은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다.
사소한 문제야 재량껏 처리해도 무방했으나, 바이에른 합병 포기나 식민지 할양은 그 재량의 범위를 한참 넘는 사안. 본국에 보고하고 답장을 받은 대로 행동해야만 한다.
가장 가까운 벨기에 항구에서 빈까지의 거리가 대략 700마일. 전령이 왕복하는 시간에 논의할 시간까지 합하면 한 달이라는 기간은 적당했다.
원래는 다음 주면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강제로 여유가 생겼겠다, 이선은 귀족들과의 인적 교류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적당히 격식 있는 모임에 얼굴을 비추고 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면 그만이었으니.
높으신 분은 무도회나 사교회를 매일같이 드나들며 인맥을 쌓는 게 필수이던 시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이름값은 여느 백작, 공작 따위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초청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에서 초청장이 날아오니 그저 고르기만 하면 됐다.
“누추한 곳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아, 스테어 백작! 오랜만이오. 그런데 뒤에는?”
“리처드 웰즐리라고 합니다! 평소 폐하의 무용을 듣고 흠모하여-”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유럽 서쪽 끝의 섬에도 서서히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호프부르크 궁정에서 마침내 답장이 돌아왔다. 18세기의 문서치고는 놀랄 만큼 미사여구가 없는 편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영국이 제의한 조건에 동의함. 대신 영국의 건함 기술 도입을 약속받을 것. 이외의 협상 조건은 추후 추가로 협의할 예정.]
신기하게도 글씨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서체는 분명 테레지아의 것이나, 그녀답지 않게 획이 번지고 곳곳에 점이 묻어 있었다.
쓰면서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흔적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사실상 영국의 배신이나 다름없는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으니.
승자의 마땅한 권리를 부정당하고 동맹국에게 부조리를 강요당하는데 화가 안 날 리가.
그럼에도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취하려 드는 건 과연 미래의 명군다운 자질이리라.
“카우니츠. 국왕 폐하에게 연락하게나. 협상을 다시 시작하자고 말이야.”
“곧바로 사람을 보내지요.”
당연한 반응이라고나 할까,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온 조건에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재회한 월폴은 이선에게 난색을 표했다.
“이건 곤란합니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건함 기술을 넘겨달라는 건…….”
“그럼 처음부터 바이에른을 우리에게 넘겨줬어야지. 안 그런가?”
무역으로 먹고사는 섬나라에서 함선이란 존재근거이자 기반 그 자체인 전략자원이었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하지만, 그렇게 귀중했으면 빌미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나?
이건 육참골단의 거래다. 합스부르크의 확장을 멈춘다는 뼈를 취한 이상, 상대를 달래기 위해선 넉넉하게 살점을 내줘야 했다. 아니, 똑같이 뼈를 내주어야 할 수도 있다.
설령 거부하려 든다면야…….
“정 싫으면 이쪽에서도 방법은 많다네.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지 않거나,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탕감시켜 주는 대가로 기술을 얻으면 되지. 애초에 아쉬운 건 연합왕국이지 우리 제국이 아니야.”
거래할 상대는 유럽에 차고 넘쳤다. 가격 올려치기도 독점 시장이어야 가능한 수작인 법.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귀국의 기술자들을 데려와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이제 만족하시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나? 그쪽이 우리에게로 파견해야지. 대충 가르치고 돌려보낼지 누가 알고?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말게.”
결국 전 수상은 황제의 압박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졌습니다. 폐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잘 생각했네. 앞으로는 이렇게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말도록 하지. 연합왕국과 오스트리아는 동맹국 아닌가?”
과연 이 소동을 겪고도 계속 굳건한 동맹 관계가 유지될지는 미지수겠지만.
* * *
1757년 9월 3일.
창경궁 문정전.
“전하, 서당을 개선하시겠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여태껏 개혁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시작은 프리드리히의 선언부터였다.
“말 그대로요, 좌상. 작금의 조선에서 아동들의 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소이까?“
“서당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배우고 나면 서원에 들어가 제대로 경전을 익히옵니다.”
여기서 더 배우길 원하는 유생은 성균관이나 규장각에 들어가고, 아니면 과거를 보아 그대로 관리가 된다. 거의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전통 깊은 조선의 학습 시스템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서당이 대개 양반들의 자제나 사족들이 다니는 곳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대상은 점차 확대되었다.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평민들이나 향반 출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이 늘어났고 교육의 질에도 격차가 생겨나게 된다.
가령 예를 들자면, 명문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은 좋은 훈장이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질 좋은 수업을 제공했다. 반면 신분이 낮은 아이들에게는 편지 읽기나 벽보 읽기가 겨우 가능할 정도로 목표를 낮추는 식이다.
프리드리히가 보기엔 세계적으로 동급인 국가를 찾기 힘든, 상당히 훌륭한 체계였다.
고작 문맹을 면하는 정도라고는 해도 국민 대부분에게 교육을 제공하는 나라가 18세기에 얼마나 되겠나. 기껏해야 모국이었던 프로이센?
좋은 게 있으면 활용해야 한다. 프리드리히는 서당 교육을 뜯어고칠 작정이었다.
합리적으로, 보다 실용성 있게.
“성현들의 말씀을 많은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오. 허나 조사해 보건대, 일부 개선할 점이 보이는 듯하외다. 바로 훈장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라는 거요.”
현대처럼 사범대나 교원 임용 시험이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교육자가 되기 위한 자격 제한 따위도 있을 리 만무하니 고을마다 교육의 질이 중구난방이었다.
어디는 은퇴한 관료 출신 거유(巨儒)가 가르치고, 어디는 초시에나 겨우 합격한 선비 호소인이 가르치고. 자연스레 밑에서 배운 학동들의 학식에도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물론 이 문제점을 조정에서도 모르지는 않아, ‘면훈장’이라는 제도를 운영했다. 마을마다 뛰어난 훈장 하나를 지정해 인근 서당을 통제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통제력이 흐트러졌고, 구체적인 기준을 내세워 관리하는 게 아니다 보니 효과는 사실상 있으나 마나였다.
“지당하신 지적이오나, 이를 개선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나이다.”
“왜 없겠소? 생각해 보았는데, 시험을 실시하면 되는 것 아니겠소?”
“시험이라니, 어인 말씀이십니까?”
“지방관들에게 포고령을 내려 훈장들을 불러 모아 실력을 가늠케 하는 거요. 출제할 사람이야 여기에도 넘치도록 있으니 적당히 선별하면 그만일 것이외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프리드리히는 과거 시험의 방식을 응용하기로 했다.
“난이도는 어려울 필요가 없을 거요. 유자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경전의 구절을 물어보거나, 즉석에서 시를 지어 작문 능력을 보이게 하면 되겠지. 통과한 자들에게는 실력을 입증했다는 의미로 증서를 내릴 생각이오.”
나라에서 가르칠 사람을 전문적으로 길러내기란 무리다. 인력도, 시간도, 비용도 모두 모자라니까.
방전법으로 세수가 늘긴 했어도 조정에 들어오려면 올해의 추수가 끝나야 한다.
대신 최저한의 능력 기준을 세우고 강제하기란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조선에는 이를 실행할 의지를 가진 군주도, 지방까지 명령을 전달해 줄 행정력도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과연. 그 증서를 가진 사람만이 서당을 열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불통(不通)한 자들에게는 처벌을 내리심이 어떻겠나이까? 제 실력도 일천한 주제에 스승을 자청하고 남들을 가르치려 들었으니, 마땅히 죄에 해당하옵니다.”
교육백년지대계(敎育百年之大計).
교육은 국가와 사회발전의 근본이기에, 마땅히 백 년 앞을 내다보고 크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가르치고 교화하는 것을 중시하는 유학을 국시로 삼은 나라답게 반대는 없었다. 도리어 다들 눈빛을 빛내며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굳이 벌할 필요까지 있겠소? 금세 주변에 소문이 퍼질 텐데. 백성들을 속였다고 고을에서 쫓겨남은 물론 다른 어디를 가도 정착하지 못할 테니, 그것으로 충분하오.”
멀리 도망쳐 서당을 열려 해도 그 지역 학부모들이 증서를 보여달라고 요구할 테니, 사실상 교육계에서 완전히 쫓겨나는 셈이다.
어학 능력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부류에게는 그야말로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혹여나 있을 문서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증서는 공명첩의 형태로 발행할 예정이었다. 이름을 적는 칸만 비워둔 것을 여럿 준비해 각지에 배포하는 식으로.
진품임을 증명하는 도장을 옥새로 찍어두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아니고서야 베낄 엄두를 내지 못할 터다.
임금의 명령을 마음대로 조작한 역적 그 자체가 되는 건데,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나?
“또한, 서당을 지금처럼 하나의 부류로 묶지 않고 구분하고 싶소이다. 이름은 같아도 다루는 학문의 난이도가 하늘과 땅 차이인 곳이 많을진대, 이를 전부 같은 교육기관으로 보기엔 너무 억지스럽지 않소.”
“가르침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구별하시겠다는 하명이신지요?”
“옳게 보셨구려.”
이번엔 의도가 단순했던 탓인지 곧바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단순히 글자만을 가르치는 서당을 하급학당으로, 사서삼경을 비롯해 경전까지 가르치는 서당을 상급학당으로 나누고자 하오.”
현대로 치면 초등학교와 초중 통합학교가 같은 기초교육시설로 취급받는 상황인 건데, 말이 안 되지 않나. 지금은 그저 편의상의 명명에 불과해도 미래를 고려하면 나름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교육기관 간의 위계질서를 철저히 나누어놓아야 학력을 구분하고, 추후 새로운 학문을 교육과정에 도입하는 데도 편리해질 테니.
“허나 서원과 향교가 상급기관으로서 존재하니, 상(上)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외다. 다만 위로 나아갈수록 익히는 학문이 많고 다양해지니, 이를 소중대로 표현하는 게 알맞겠소.“
“그렇사옵니다.”
“여기에 아이들을 배우게 하고 바로잡는다는 뜻을 담아 앞으로는 서당을 학교로 명명하고자 하니, 하급학당은 소학교로, 상급학당은 중학교라 칭하리다.”
훗날 동양국가들의 교육체계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조선식 학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