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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세자와 뒤주대왕-135화 (135/175)

감자세자와 뒤주대왕 135화

프레스터 존

오스트리아에서 교황령으로 마차여행은 한 달을 약간 넘어가는 기나긴 나날을 소모했다.

가장 빠르고 편리한 직행도로를 타고 움직여도 2주는 족히 걸릴 판인데, 도중에 이곳저곳에 들러가며 사교활동에도 신경을 써야 했던 탓이다.

밀라노, 베네치아, 파르마에 트렌토 등등.

이선과 프리드리히를 태운 마차들의 행렬은 중부 유럽과 이탈리아의 주요한 도시들마다 멈춰서서는 사나흘씩 머물렀다. 그때마다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귀족들을 초대하고는 빈에서와 같이 능수능란한 선동과 날조를 시전했다.

‘오오, 처음 뵙겠습니다 조선의 국왕이시여.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유럽을 호령하는 제국의 귀족다운 격식과 기품이 넘치시는구려.’

‘그러는 국왕 전하야말로 대단하시군요. 이렇게나 유럽식 예법에 완벽하시다니!’

활용할 카드야 다양하게 있었다.

상류층에 퍼진 시누아즈리 문화로 인해 생겨난 아시아에 관한 동경,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본인이 보유한 지위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까지.

프리드리히는 매우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는 도가 텄다. 조선에서 인재를 포섭하겠답시고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고귀한 핏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호감을 얻는 건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병자호란으로 시작되는 조선과 여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와 자신의 포부를 언급하긴 했으나, 이전처럼 귀족들에게 대놓고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동정심을 유발하고 프리드리히에게 ‘과거의 복수를 하려는 젊은 계몽군주’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

물론 이선의 항의를 듣고 전쟁을 포기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성급하지는 않았나 싶었던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대륙 곳곳에 조선에 관한 소식이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못해도 몇 달, 아니 반년은 느긋이 기다려야겠지.

아무리 급하다 할지라도 바짓가랑이를 붙잡아가며 애원하는 건 초보나 저지르는 실수다. 여유가 있는 척 연기를 하면서 갑질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정석. 비록 처음에 판단미스를 저지르긴 했어도 지금부터 처신을 제대로 한다면 괜찮을 것이었다.

그리고 말이다, 원래 사치품이나 취미에는 돈을 물 쓰듯이 써도 불우이웃에게 기부하라고 권하면 망설이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콧대 높은 귀족들이 지갑을 열게 만들려면 그들로 하여금 조선을 도와야 할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다. 자금을 뜯어내기 위한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필요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귀중한 선물이라든가.

‘약소하지만 오늘의 환대에 대한 보답을 준비해 왔네. 부디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군.’

‘이건…… 약초입니까 전하? 비단에 포장된 게 상당히 귀해 보이는군요.’

‘인삼이라는 것일세. 흔히들 진셍이라고도 하더군.’

‘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신비의 풀이 이렇게나 많이?!’

‘조선은 진셍의 최대 산지라서 말이지. 칭과 일본에 유통되는 것도 대부분 아국에서 재배한 거라네.’

환심을 사면서 조선이 가진 가치도 홍보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정력제와 건강식품에 남자들이 환장하는 건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현상일지니.

집에 들어가면 씻고 올 테니 침대에서 기다리라며 눈웃음을 짓는 아내가 두려워서라도 나이가 많을수록 인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담으로, 여정이 지체된 것에는 인맥 쌓기 말고도 한 가지 더 이유가 존재했다. 가는 길마다 황제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환영 인사를 하려고 몰려든 탓이다.

‘프리드리히 폐하 만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님 만세!’

‘손 한 번만 흔들어 주세요 프리드리히 님. 얼굴 한번 뵙고 싶어서 산마리노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꺄악! 황제 폐하께서 날 보셨어! 폐하께서 내게 웃어주셨다고! 이젠 죽어도 좋아…….’

이선은 사랑받는 군주였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푸른피(귀족과 왕족을 뜻하는 은어)들과는 달리 하층민의 삶에 신경을 많이 썼으며, 온화하고 소탈한 성격을 가졌기로 유명했다.

흔하디흔한 사치조차 왕실의 위신유지를 위한 체면치레 외에는 최소한으로 줄여 남은 돈을 국방이나 경제에 투자했다.

이것만으로도 자애롭다며 칭송받기에 충분할진대,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영토마저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바이에른과 프랑스를 동시에 박살 내고 방대한 식민지를 획득해 골골대던 신성 로마 제국을 다시금 유럽의 최강으로 우뚝 세웠다. 도대체 백성들이 어떻게 이런 군주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위험조차 무릅쓰고 마차 바퀴 옆에 달라붙어선 창문을 두드리고 환호성을 지르는 통에 말들이 공포에 질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지칠 기색조차 없어 길을 열기 위해 황제가 직접 지붕 위로 올라가 비켜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것도 여행하는 내내 계속.

“그동안 어지간히 통치를 잘했나 보군. 살짝 부러워지려고 하는데?”

“부끄러우니까, 놀리는 건 적당히 하게…….”

프리드리히의 짓궂은 농담에 이선은 그저 얼굴을 붉힐 따름이었다.

* * *

이러저러하여, 이탈리아 중부의 중소도시 비테르보(Viterbo)를 지날 무렵엔 어느새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이 겨울이지, 영하로 내려가지도 않아 조선 출신들에게야 조금 싸늘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세계 1위의 연교차와 폭염/한파가 공존하는 지옥불반도에 비하면 이탈리아는 천국이었다.

한적한 소도시에서 마지막 휴식을 가진 일행은 여정에 한층 박차를 가해, 이틀 만에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거 유럽대륙 전체를 제패했던 대제국의 수도이자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 현재는 교황령의 중심이자 가톨릭의 본고장으로서 가장 신앙심 깊은 도시가 된 곳에.

“여기일세.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히 내려오게.”

성 베드로 광장의 입구에 발을 디딘 프리드리히는,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성당과 각종 종교시설이 넘쳐난다. 역대 교황과 성인들을 묘사한 140여 개의 조각상이 세워진 열주랑, 하늘 높이 세워진 거대한 오벨리스크, 베드로의 성좌이자 그의 무덤이 위치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제아무리 불신자라 한들 저절로 신앙심이 생겨날 것만 같은 신성한 광경이었다. 당장 수행원들부터가 그러했다.

가톨릭을 위해 바쳐진 도시라는 설명을 사전에 듣고 왔음에도 정신적 충격에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하고 있으니.

‘살다 살다 이렇게 로마를 오게 될 줄이야.’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루터교 국가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가톨릭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며 태어난 종파를 신봉하는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넘어가고, 이젠 이방인으로서 가톨릭의 총본산을 방문한다라.

초보 작가가 써재낀 3류 불쏘시개 소설에서조차 이게 뭔 해괴한 줄거리냐며 질색할 수준의 황당한 이야기다. 이선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면서 걷다 보니 저 멀리에 모여 있는 인파가 보였다. 흰색 바탕에 붉은색 옷감이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예복을 갖춰 입은 종교인들.

저들이 로마를, 나아가 교황령 전체를 다스리는 주인이라는 사실이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교황 성하. 방문 요청을 받아들여 주시니 기쁘기 이를 데 없군요.”

“하느님의 궁전에 어서 오시지요 폐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아, 요새 유명한 조선의…….”

248대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곁눈질하며 보낸 흥미 어린 시선에 이선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예. 서신에 적어 보낸 조선의 국왕입니다. 머나먼 동방에서부터 저를 찾아왔지요.”

“과연! 폐하의 위명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양입니다.”

제법 살가운 말투였다. 요새 교황청 내부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주류라는 소문이 돌던데,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하기야 나폴리와 토스카나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을 대부분 차지하고 세력을 떨치는 패권국과 적대해 봐야 좋을 건 없을 테니.

적당히 대주교 한두 명만 보내도 무방했을 의전을 교황 본인이 직접 주관했을 정도면 대충 알 만했다. 그렇기에 이선이 했던 부탁도 흔쾌히 승낙했을 테고 말이다.

“부디 머무르는 동안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로마에 왔으니 대성당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싶습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국의 황제가 직접 왔거늘, 세상에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여기 이 친구가 안내해 줄 겁니다.”

늙수그레한 성직자의 인도를 따라 들어선 곳은 대성당의 중앙부, 교황 제대(Altare Papale)의 바로 앞이었다. 베드로의 무덤 콘페시오(Confessio)가 자리해 있는 가장 성스럽고 고귀한 장소.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공간에서, 촛대에 조심스레 불을 붙인 주교가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아름다운 조각과 벽화로 장식된 돔 아래에 두 군주가 나란히 섰다.

잠시간의 경건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무릎을 꿇고는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였다. 다시 눈을 떴을 무렵,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두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거 유학자가 신을 믿어도 되는 건가?”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는 자네야말로 불가지론자 아니었나?”

불가지론(agnosticism).

신의 존재에 대하여 그 진위나 실존 여부에 대해 명확히 입증하기가 어려우니 현재로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중간적인 입장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증거지상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관점.

유신론과 무신론 그 어느 쪽과도 거리가 있었으나, 굳이 따진다면 프리드리히는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에 가까웠다.

“뭐, 이선 자네랑 비슷한 이유지.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을 하고 나니 신앙심이 절로 생겨나더라고.”

영조 대신에 조금 더 선량한 아버지한테 보내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내심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빙의시켜준 데에는 감사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밑에 계속 있었다면 조만간 맞아 죽었을 테니까. 적어도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여호와의 품에 귀의할 준비는 되었겠지?”

문득, 뒤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클레멘스 13세가 세례성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온 시종들과 함께 서 있었다.

“하…… 역시나. 예상은 했지만, 이러려고 로마까지 오자고 한 거였군.”

“일단 종교가 같아야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겠나.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일세. 혹시 거부할 생각은 아니겠지?”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세례라.

확실히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경험은 아니었다.

아무리 신분이 고귀하고 재산이 넘쳐나도 못 받는 선택받은 몇몇만의 권리이자 은혜다.

종교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명과 세계관을 쌓아 올린 유럽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면야, 신앙심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찾기 어려우리라.

“그럴 리가.”

프리드리히의 대답은 당연히 긍정이었다.

“묻겠다. 그대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그 죄를 회개하며, 버리기로 결심하였는가?”

“그렇습니다.”

“그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죄인을 구원할 이는 오직 예수밖에 없음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황제와 고위성직자들이 증인으로 참석한 이래,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입교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교황이 서약을 위한 네 가지 질문을 던졌으며 프리드리히는 그 전부를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이미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고 구절을 인용할 정도로 내용을 숙지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천주존재(天主存在),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비롯한 교리에 대한 교육은 생략되었다.

축복을 위한 성경낭독과 기도가 이어진 뒤, 마침내 성사의 차례였다. 익선관을 벗고 세례대 위로 머리를 숙인 프리드리히의 고개 위로 교황이 직접 물을 흘려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조선의 왕, 이선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아멘.”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어 씻어내고, 미리 축성된 성유를 정성스레 발라 축복한다.

세례명은 잠시간의 논의 끝에 요한으로 정해졌다. 12사도 중 한 사람과 예수에 앞선 선지자의 이름이라는 상징성이 있으니만큼 흔하고 무난한 선택이었다.

몸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수건으로 닦아낸 프리드리히에게 이선이 다가가 선물을 건넸다.

“이게 뭔가?”

“교인이 되었으면 상징물 하나는 있어야지.”

십자가 목걸이였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몸통에 은으로 된 줄을 엮은 형태.

호화롭고 값지면서도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졸부같이 보이지 않도록 배려하여 주문제작 한 물건이었다.

이선이 직접 목에다가 걸어주려는 것을 프리드리히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젠 성당에서 볼일은 마쳤겠다, 교황에게 성사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는 대성당을 나섰다. 시간이 꽤 지났던 터라 바깥 광장은 어느새 소문을 듣고 몰려온 기자와 호사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란 피부의 동양인 왕의 목에 걸린 것의 정체를 깨달은 이들은 처음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다가, 이내 경탄의 비명과 함께 외쳐댔다.

“프레스터 존이다! 사도왕 요한의 전설이 진실이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다! 오 주여, 당신께서 품으신 큰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나이다!”

이 신앙적인 기적이 이튿날 발행된 신문들의 제1면 기사를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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