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자세자와 뒤주대왕-145화 (145/175)

< 마무리 >

'인생만사 참 새옹지마란 말이야. 비텔스바흐가 사고를 친 덕분에 나만 편해졌지.'

독일하면 맥주요, 맥주하면 독일이다.

제 아무리 선량한 독일인이라 할지라도 자기네 나랏님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맥주를 욕하면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고 휘두를 준비를 한다.

그렇게나 유서깊은 주조전통을 가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조선으로 오라는 제안에 응하게 되었을까.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 174~50년대 사이에 벌어진 유럽 정세의 변화를 살펴봐야 했다. 특히나 신성 로마 제국 내의 권력이동과 경제적 주체의 변화에 대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군연합과 영국의 승리로 끝난 이래. 패자들에게는 여러 유무형적인 방식을 통해 제재가 가해졌다.

배상금이나 군비제한, 영토 할양 등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조치는 물론이고 수출 제한, 원자재 수입 제한 등등과 같이 은밀한 방식이 함께 활용되었다.

전자는 국가에 단기적으로 치명타를 안겨주려는 목적. 반대로 후자는 국가를 장기적으로 침체의 수렁에 빠트리기 위한 용도였다.

아예 전후 피해복구조차 제대로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휘청이게 만드려는 것이다. 어느쪽이 더 악랄하고 잔혹한 조치냐고 묻는다면야, 대답은 당연히 후자였다.

"이봐! 자네 지금 어디로 가려는 겐가?"

"예? 저, 저는 그저 지난달처럼 레겐스부르크에 모피를 팔려고......"

"이 친구 이거 안되겠구만. 황후 폐하께서 내린 포고령도 못 봤나? 바이에른과의 거래는 금지되었단 말이야! 물건을 팔아도 안되고 사와서도 안돼!"

18세기는 중상주의의 시대. 뭐든 많이 팔아치워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야말로 국부의 증대를 위한 이상적인 방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당연히 프랑스나 바이에른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유럽의 여러 제국(諸國)과 무역관계를 맺으며 경제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어느날.

하루아침에 장삿길이 막혀버린다면?

그 피해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만큼 막대했다.

국가의 혈관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소상인들이 손실을 견디지 못해 죽어나간다. 소매업자를 잃어버린 도매업자, 즉 중견에서 대형 상단들도 곧이어 무너져버린다.

경제의 흐름이 순식간에 경직되고, 심장이 멈춘 사람처럼 곳곳이 괴사해버리기 시작했다.

"저, 전하! 식량이 들어오질 않습니다. 성으로 식량을 옮겨줄 상단들이 죄다 망해버렸습니다!"

"군대가 파업을 일으키려 합니다. 월급도 밀렸는데 밥도 안주니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탈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합스부르크 이 개자식들이! 우리를 아예 멸망시켜버리려는 속셈이냐! 아무리 전쟁에서 졌다지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프랑스와 스페인은 그래도 견딜 만 했다.

둘다 유서깊은 해양강국이니만큼 식민지가 많았으니까.

값싸게 원자재를 사오고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팔아치우면 아주 원활하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경제가 돌아갔다. 제 아무리 강도높은 제재를 가해봤자 다소 귀찮은 족쇄가 생긴 정도에 불과했다.

허나 바이에른은?

그저 나름의 세력을 갖춘 제후국A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는 커녕 항구조차 없었으며, 비텔스바흐의 혈연으로 묶인 여타 영지를 모두 합쳐도 프랑스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크기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절의 프로이센 왕국보다도 전혀 나을 것이 없었다.

아, 사실 이것도 옛말이 되어버리긴 했다. 전후 영토가 북/중/남 바이에른으로 3분할 당한데다 적잖은 영지를 몰수, 선제후 자리도 두개나 박탈당했으니까. 이젠 프랑스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된다.

4만의 상비군도 겨우 유지하던 약소국에게 있어 무역 봉쇄는 즉사의 독약과도 같았다. 카를 알브레히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에겐 눈앞에 당면한 난관을 헤쳐나갈 능력이 없었다.

그는 무능력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오스트리아의 압력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었다.

"제노바에게 도움을 요청해봐라. 아니면 사르데냐라도! 어디든 좋고 무엇을 내줘도 좋으니 무역 허가를 받아내!"

"이미 오래전에 밀사를 파견했습니다 전하. 진작에 답변을 받아 귀환했어야 정상일만큼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묵묵부답이라는 건......."

"아예 통째로 오스트리아에 팔아넘겼다는 건가........젠장, 젠자아앙!!! 하느님께선 어찌 우리를 버리신단 말이냐!!"

오스트리아 제국이 아닌 다른 곳과 거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영향력이었다.

제국의 영토는 바이에른의 동남북부를 완전히 에워싸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상품을 사고팔려면 국경을 넘어야만 하는데, 접경지역에는 경비대와 군대가 촘촘히 배치되어 살벌한 경계 태세를 형성한 상태. 쥐새끼 한마리라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너무나 뚜렷했다.

그렇다고 서부의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에게 눈을 돌려봐도, 이들 역시 진작에 비텔스바흐를 손절친지 오래였다.

인구 2백만도 안되는 소국과의 의리를 지키겠답시고 천하의 합스부르크에게 원한을 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차피 이익에 따라서 협력하는 관계에 불과했을 뿐, 딱히 서로 신용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언젠가 배신할거라면 먼저 뒤통수를 치는게 나았다.

"뮌헨의 세금수입이 전년도 대비 10% 감소했습니다. 잉골슈타트는 20%를 넘었고요. 참람한 보고입니다만, 내년부턴 감소세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대로라면 수도를 관리할 예산조차 모자라게 될 지경입니다. 다른 주요 도시와 성들이야 진작에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절약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상황판단능력이 뛰어난 귀족들 덕분에 바이에른은 결국 국가붕괴테크에 돌입해버리고야 말았다.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졌다. 그래도 내수경제는 아직 무사했지만, 고작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나?

고급진 장신구와 모피코트를 생산해본들 팔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국내의 귀족들은 소수요, 재산이 한정되어 있기에 소비능력에 한계가 있다.

백성들은 최소한의 의식주 이외에는 소비를 억제하기에 국가 경제에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한다.

과거의 성세는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이 사라졌다. 부와 풍요는 증발해버렸고 금은보화가 가득하던 국고는 텅텅 비어버렸다. 군대는 유지비를 감당못해 수도를 방위할 소수부대 이외엔 죄다 해산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매도 비싼 화약을 구입해올 자금과 수입 루트가 마땅치 않아 병사들에게 냉병기를 다시 들려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현대의 북한과도 같은 처참함이었다. 적어도 식량 자급자족은 가능하다는 점에 있어선 그나마 나았지만.

"이대로는 못살겠소. 난 떠나야겠어."

"어디로 말인가? 취직할 데는 있고?"

"오스트리아로 갑니다! 나도 명색이 대졸자니까 어디 말단 관료라도 시켜주겠지!"

빈곤과 고립을 견디지 못한 바이에른인들은 고향을 등졌다. 도저히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굶어뒈질 바에야 차별을 받더라도 타향살이 하는게 나아보였으니까.

교수, 학자, 대장장이, 숙련공 같이 어딜가도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갖춘 자들일수록 선택은 빨랐다.

"어디 출신이라고 했었지? 바이에른?"

"예, 예. 혹시 마음에 안드신다면....."

"그게 뭐 어쨌다고?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출신이 무슨 상관이야. 내일부터 여기 출근하게."

의외로 오스트리아는 이탈주민들의 정착을 막지 않았다. 되려 보조금을 지급하고 거주지를 알선해주며 장려하기까지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원한은 비텔스바흐 가문에 대한 것이었지, 애꿎은 백성들까지 괴롭힐 생각은 없었던 까닭이다.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도망쳐나올수록 아국에는 보탬이 되고 바이에른에게는 손해일진대, 방관하고 있으면 그게 곧 정치적 공세요 국제전략이었다.

성공담이 알려지자 남아있던 사람들도 잇달아 결심을 내리고는 나라를 버렸다. 땅파먹고 살기에 남아있어도 차이가 없는 농민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직종이 해당되었다.

적응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심리적 장벽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인구가 매년 수백에서 수천명 사이.

적어보일지라도 대다수가 전문직이기에 심각한 국가적인 손실과도 같았다. 이를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국가 차원에서 항의를 해보았으나, 뭐.

가볍게 무시당했을 따름이다.

"이건 도의적으로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저들을 귀국시키십시오!"

"글쎄, 자발적으로 구원을 찾아온 가엾은 어린양들을 저희가 어찌 내치겠습니까? 불만이면 전쟁에서 이기셨어야지요."

"........"

이렇게 끝났다면 비텔스바흐만 불행하고 나머지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가 되었을 터이나, 유감스럽게도 적응에 실패한 자들도 존재했다.

바로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이들이었다.

"사람들이 우리 맥주를 안 마신다!"

"이대로 가다간 수백년 전통의 우리 양조기술이 쫄딱 망하게 생겼다!"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수대에 걸쳐 평생을 양조업에 종사해오며 잔뼈가 굵은 장인들이니.

재료도 정성스레 엄선한 곡물을 사용해 자신들의 능력으로 가능한 최상의 술을 빚어냈다고 당당히 자부했다.

그러나 이들의 맥주는 오스트리아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수백년 동안 마셔온 자국의 전통 맥주를 놔두고 구태여 수입산을 소비할 동기가 없는 것이다.

궁금증에 몇번 마셔볼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흥미 본위에 그치기에, 장기적으로 사업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수요를 창출하기가 어려웠다.

"자네들, 혹시 조선으로 올 생각은 없나?"

"예? 거기가 어딥니까?"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억울한 사유로 시장에서 배척당한 양조 장인들에게 주목해 회유를 시도했다. 자고로 사람이란 급한 상황이 닥쳐오면 물불을 안가리고 발악하는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근무하는 조건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거라 여겼다. 다행히 예상은 적중했고, 수십명의 인재들을 수중에 얻게 되었다.

* * * * * *

'밀맥주는 역시 베를린에서 만든게 제맛인데.......여기 술 만드는 놈들은 워낙 고집이 드세서 원. 이선한테 받은 추천장을 들이대도 끝까지 거부하고 말이야.'

프리드리히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안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본인이야 정신적으론 프로이센 사람이니만큼 슈타인비어(Steinbier)같은 바이에른 맥주보다는 신맛이 강한 베를리너 바이세(Berliner Weisse)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외 타지역 장인들은 영입에 실패한지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양조장을 버리고 머나먼 동방으로 떠나자는 제안에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일단 선택지가 있어야 고르든지 할게 아닌가. 독일식 맥주 제조법을 들여올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어디보자. 대충 얻을 것은 다 얻었고, 받을 것도 전부 받아챙겼고."

아쉬움을 속으로 삭이고는, 프리드리히는 군주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프로이센에 머무른지도 어언 한달이 넘게 지났다.

그동안 조선이 제국으로부터 얻어낸 이익은 실로 막대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에 모자를 수준이었다.

라인스베르크 연구소 및 주요 대학들과 육해군 사관학교의 유학 허가 및 군사고문단 파견을 약속받았다.

각종 서적과 종자, 뛰어난 인재를 수집했음은 물론이요, 인쇄기 같은 기계의 실물과 설계도도 여럿 확보했다.

개중 일부는 기부품으로 받았으나, 구매한 경우엔 조선에서부터 가져온 자금으로 값을 치렀다.

귀금속은 어딜가나 비싸게 취급되었기에 화폐가 달라도 거래는 수월하게 이뤄졌다. 혹은 인삼을 팔아서 현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조선공의 위탁교육도 받아들여줬다면 좋았을텐데. 안타깝지만 과욕은 금물이려나."

낙후된 건함능력을 키우기 위해 숙련된 조선공을 유럽에서 키우고 싶었으나, 기술 유출을 우려해서인지 거절되었다.

조선소에서 일하다보면 전열함 같은 전략병기 관련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지 모르니 허락하는게 오히려 이상하긴 했다.

대신 전문가들을 보내 프리깃이나 코르벳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니, 그걸로 만족해야 하리라. 정 전열함이 필요하다면 나중에 수입해도 괜찮을테고.

"고향에서 볼 일은 전부 끝났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자신에게만 들릴 소리로 중얼거리며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돌려 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얼어붙은 동토의 제국, 러시아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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