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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중반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리스 남부 에게해와 지중해에 걸쳐 있는 크레타 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으며 지중해에 위치한 섬들 중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크레타 섬은 포세이돈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과거 크레타를 다스리던 미노스 왕에게 포세이돈이 저주를 걸어 ‘미노타우로스’를 탄생시킨 일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사이가 원만했다. 불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미노타우로스는 이미 죽어버렸고, 미노스 왕과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은 왕비 파시파에도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사면 모두를 바다를 접하고 있는 크레타 섬.
섬 위에 세워진 크노소스 궁전은 포세이돈이 좋아하는 거처 중 하나였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궁전.
고대 미노스 문명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는 크노소스 궁전은 올림포스의 신계에 지어진 궁전에 못지않았다. 하계에 지어진 건축물들 중에서는 가장 화려할지도 모른다.
“라에가르! 그 망할 인간을 당장 씹어 먹어야겠다!”
포세이돈이 소리쳤다.
애지중지 육성하였던 정예병들은 아레스의 드래곤들에게 모두 불타 죽어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자식들 중에서 가장 총애했던 트리톤까지도 몰골이 심하게 망가졌다. 드래곤의 뜨거운 불길에 화상을 입어 버리면서 흉측한 몰골이 되어버렸고, 손과 발이 불에 녹아 가죽과 살점이 흐르면서 하나로 붙어버렸다. 마치 나병 환자처럼 보일 정도로 그 몰골이 기괴했다.
‘바다의 귀공자’라고 불리었던 트리톤은 이제 없다.
얼굴이 흉측하게 망가진 트리톤은 다시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무너져 내렸고, 다시는 육지 위에 올라오지 않겠다며 선언했다. 육지에서 지옥을 경험한 탓일까. 패기 넘치던 바다의 소공자는 공포를 느끼고는 심해에 숨어서 육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바다의 신이시여, 테살리아에 맞설 국가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크레타의 왕이 물었다.
미노스 왕이 장인(匠人) 다이달로스의 꾐에 빠져서 잔혹하게 살해된 이후, 그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패기가 없고 세상을 독차지하겠다는 야망 또한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포세이돈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성정이 유약하고 겁이 많다. 포세이돈이 윽박지른다면 군사를 지원하겠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으리라.
그것을 알기에 포세이돈도 침음을 삼키고만 있었다.
“내가 직접… 신격을 모두 발휘해서 죽여버릴 수만 있다면……!”
포세이돈이 만약 전력을 개방한다면 그리스 중북부에 있는 테살리아 전역을 바닷물에 잠기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테살리아를 아틀란티스처럼 만들어 버린다. 바닷물에 잠기도록 하여, 테살리아인들을 모두 수장시켜서 죽여버린다.
테살리아 왕국의 모든 영광과 명예, 그리고 막대한 부를 바닷물에 처넣어 버린다면 가장 훌륭한 복수가 되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원수 라에가르는 물고기 밥으로 내던져 버린다면 지금 들끓고 있는 속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암… 포세이돈, 질리지도 않네… 과격하고 멍청하고 제멋대로인 성격머리는 아직도 안 죽었어.”
하품을 늘어놓으며 크노소스 궁전에 새로운 여신이 등장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포세이돈이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늘씬한 몸매를 가진 미녀는 귀찮다는 듯이 하품을 늘어놓고 있었다. 바다의 주신에게 보이는 행동으로는 최악의 불경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허용되었다. 감히 포세이돈에게 불경을 보이는 것이 허용된다.
왜냐하면.
“…데메테르.”
“그래그래, 포세이돈.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어.”
“흥! 이런 섬에 대지의 여신이 무슨 행차이신가?”
“대지의 풍요는 어느 곳이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까. 왜? 그냥 가줄까?”
데메테르가 힐끗 포세이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새침스러운 발언에 크레타의 왕이 왜소한 어깨를 움츠렸다.
만약 데메테르가 변덕을 부려서 풍요의 가호를 주지 않는다면 염분이 높은 토양에서 그나마 소규모로 농작하고 있는 농토가 황폐해지고 만다. 식량난으로 항상 허덕이는 크레타로서는 낭패를 볼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테살리아를 적대시하고 있는 포세이돈이 똬리를 틀면서 테살리아로부터 받는 식량 원조까지도 눈치를 보는 마당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크레타로서는 포세이돈이 아니라 테살리아의 편을 드는 쪽이 현명했다. 식량난을 그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크레타의 해산물을 수출하는 대신에 테살리아로부터 식량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최대의 곡창 지대를 가진 테살리아였기에 식량난이라는 골칫병을 가진 크레타로서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장난은 집어치우도록 하지, 대지의 여신.”
“뭐, 좋아.”
흔히 포세이돈과 데메테르는 바다와 육지라는 관계 때문에 인간들에 의해서 부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서로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냉랭해지는 사이였다. 지극히 관계가 나쁘다고 할까.
바다의 사나이 포세이돈이 번번이 육지의 귀중함을 무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포세이돈은 커다란 파도를 일으켜서 육지를 침범한 적이 잦았고, 데메테르가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다와 육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이면서도 치명적으로 그 관계가 나쁘다. 바다가 영향력을 확장할수록 육지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육지가 그 면적을 넓혀 나갈 때마다 바다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남매들끼리 오붓한 대화는 기대하지도 않아. 네 면상을 보는 것도 귀찮고… 이제 슬슬 봄이거든. 바빠질 시간… 뭐, 딸내미를 볼 수 있으니 기분은 좋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째서 데메테르, 네년과 그 여신들은 하나같이 테살리아를 편드는 것인가! 고작해야 하계의 인간 따위에게 다리를 벌리다니. 천박한 년들 같으니라고.”
그 말에는 데메테르도 가만히 넘어가진 않았다.
게으름으로 가득하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아닌 기아와 황폐를 상징하는 파괴의 여신으로 돌아서 버렸다.
대지는 인류에게 풍요를 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뭄과 기아를 내림으로써 인류를 벌한다. 인류를 벌하는 형벌과 징벌을 내릴 수 있도록 주신 제우스에게서 그 신격을 받았다. 아니, 제우스 이전의 고대신 가이아로부터 받은 권능이다.
할머니 가이아로부터 받은 파괴의 권능.
그것을 발현하자 데메테르 주변의 석화들이 돌가루로 풍화되었고, 새파랗게 자란 풀밭이 누렇게 죽어버렸다.
“여기서 싸워 볼까, 앙?! 빌어먹을 애새끼. 남동생 주제에 닥치고 찌그러져 있으라고. 비린내 풀풀 나는 자식이. 네놈 아들내미처럼 반병신을 만들어주마.”
“내 아들을 모욕하지 마라!”
포세이돈도 대로하여 삼지창 트라이던트를 추켜올렸다.
그리스 최대의 섬 크레타.
크레타를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해일이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한 점도 되지 않는 육지를 삼켜버릴 듯이 일렁거린다.
그리고 그 대지의 중심에 선 것은 데메테르. 할머니 가이아와 마력 회로를 연결. 크레타 섬이 아닌 그 밑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에너지원을 불러일으킨다.
기아가 몰아친다.
크레타 섬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그곳에 살고 있는 수만 명에 달하는 인간의 목숨을 인질로 잡아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흐려진 하늘.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떨구어지는 벼락.
…제우스.
데메테르와 포세이돈이 진심을 다해서 그 신격을 개방해 버리자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서 신의 번개 아스트로페를 꺼내들면서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테살리아를 사이에 두고서. 같은 부모를 두고 있는 남매들끼리 부딪치려 하고 있었다.
남매 싸움. 하지만 그 스케일은 너무도 크다. 그리스 전역을 파괴시키기에는 충분하다. 그러한 힘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쳇.”
데메테르가 먼저 물러섰다.
포세이돈에게서 등을 돌려버렸고, 포세이돈 또한 흥미가 떨어졌는지 높게 추켜올린 삼지창을 거두었다.
두 명의 신들이 전쟁을 포기했다. 신들의 왕이라 불리는 제우스가 그 싸움을 목격해 버렸다. 아스트로페에 바싹 구워지고 싶지 않다면 물러서는 편이 좋겠지. 게다가 스틱스 강의 맹세 때문에 싸우기에도 번거로웠고.
만약 스틱스 강의 맹세가 없었더라면.
데메테르와 포세이돈이 힘을 합쳐서 싸움을 가로막는 제우스를 공격했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가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우스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아, 물고기 자식.”
“내가 할 소리다. 더러운 암여우 같으니라고.”
데메테르와 포세이돈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적의를 드러냈다.
올림포스에 있을 때부터 앙숙이다. 그리고 그 앙숙들에게 어느 계기가 주어졌으니 부딪치는 것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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