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로마신화성군-109화 (109/193)

109====================

포악의 흔적

두뇌에까지 직접적으로 타격이 몰아쳤다. 아폴론은 바닥을 나뒹굴며 얼굴을 움켜잡았다. 뼈가 부러지고, 그 앞니까지 부러졌다.

키르케가 그 모습을 보더니 푸흡흡흡, 하고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얼굴이 피떡이 되어서는 치아까지 부러진 모습은 저급한 연극이나 하는 평민 광대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마치 광대로 분장을 한 것처럼 더러운 외모였다.

잘생긴 외모? 뛰어난 재주?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겉가죽일 뿐이다. 태양신 아폴론은 자신의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재주로 자신의 더러운 속내를 감추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추악한 얼굴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역겹다고밖에 말할 길이 없는 외모였다. 피떡이 된 아폴론이 얼굴을 쥐면서 서서히 일어섰다.

“으아아아악! 내 얼굴, 내 얼굴이이이이!!”

태양의 광채를 빼앗기고서.

한낱 마녀에게 태양을 빼앗기고, 이번에는 하계의 왕에게 피떡이 되어버렸다.

태양보다도 높은 지위에 서 있던 태양신이 드디어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지금까지 아폴론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여성들이 본다면 통쾌할 법한 일이었다.

아폴론의 노리개가 되어 죽은 그리스의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녀들의 울분을, 통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아폴론은 죽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

“이놈!”

아폴론이 두 손으로 검을 쥐고서 라에가르에게 달려들었다.

라에가르는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아킬레우스의 앞에 서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걸었다. 지금은 아폴론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설령 태양의 가호를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아폴론은 아폴론이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광기의 집념으로 가득한 신은 위험하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몸이나 추스르고 있어. 태양신은 내가 죽인다. 이 자리에서 고고한 태양을 더러운 시궁창으로 고꾸라뜨리겠다.”

“…아… 어…….”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은 말고.”

“…네!”

아킬레우스의 대답을 등을 통해서 들으며, 라에가르는 달려드는 아폴론을 향해서 전진했다. 검과 창을 교차시키면서 태양신의 검격을 막아냈다.

그 중압감이 묵직하다. 태양의 광채를 모두 빼앗기고서, 태양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신격을 발동시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도 물러나지 않는다.

분명 아폴론을 붙잡아두고 있는 것은 증오의 일환이다. 지금까지 타인에게서 빼앗기만 하였을 뿐, 그 무엇도 자신의 소유권을 빼앗겨본 적이 없는 주신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 것일 테지.

“젠장! 이 드래곤은 왜 말을 안 들어 처먹어?!”

디오니소스가 붉은 비늘의 드래곤을 걷어차며 외쳤다.

하필이면 형 아폴론이 밀리고 있는 이 급박한 순간에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말은 안 들어 먹고 있었다. 라에가르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를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면서 디오니소스의 정신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폴론!”

“이 개자식―!! 하계의 왕!”

창이 교차했다.

검을 신속하게 움직였다.

은색의 섬광과 함께 병장기가 격돌하였고, 라에가르가 쥐고 있던 검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검을 포기하고 곧바로 창을 쥐었다.

장창이 빠르게 풍차처럼 회전하며 아폴론을 공격했다. 눈을 현혹시키는 검과 창의 움직임에 몸이 경직되었다. 움직임이 둔화되고 있었다.

태양신은 언제나 싸움에 임할 때, 태양의 힘을 빌려왔다.

그것은 비겁한 방법이었다. 일대일로 싸우는 일기토 싸움에서조차 태양의 신격을 빌리다니.

아폴론은 자신의 명예를 깎아내는 불명예를 원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싸움에서 결단코 패배하지 않도록 꼼수를 부려왔다.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마다 태양의 힘을 빌려서 살아남았고, 승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건 사투를 모른다. 언제나 위험해질 때마다 태양에게 의지하였을 뿐이었고, 태양신이라는 지위 또한 아버지 제우스로부터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잘 만난 덕분에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거짓된 신을 향해서.

인간에게 유용하지 못한 태양을 꿰뚫으며.

아폴론의 가슴팍에 기다란 장창이 박혀들었다.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장창이 예리하게도 아폴론의 육체를 꿰뚫으며 관통까지 해버렸다. 날카로운 창날이 아폴론의 몸을 타고서 삐져나오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창날의 끝에는 아폴론의 것으로 파악되는 장기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창을 비틀었다.

살점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안쪽의 장기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폴론의 입가에서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핏물이 그치질 않았다. 울컥, 하고 피분수가 그려졌다.

라에가르는 태양신이 쏟아내는 핏물을 그대로 맞이하면서 피칠갑이 되어버렸다. 태양신의 피분수로 몸을 적셨다.

“…꺼져라. 거짓된 태양.”

“커헉…!! 네놈, 하계의 왕…! 네놈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태양은… 내가 죽인다.”

라에가르는 아폴론에게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거짓된 태양신에 박힌 장창을 반쯤 뽑아냈다. 재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가 깊게 찢어졌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반쯤 뽑아낸 장창을 다시 꽂아 박았다. 창을 비틀었다.

몸을 뚫어놓은 구멍이 점점 확장되었기 때문에 창이 헐거워질 정도였다. 아폴론의 육체에서는 그 안쪽에 머물고 있던 핏물을 모두 토해내 버릴 정도의 피분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몸을 관통하는 창이 박힌 아폴론이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리라.

창에 의지하여 몸이 기울어졌다. 그와 동시에 라에가르가 바닥에 떨구었던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아폴론의 목을 쳐 날려버렸다.

* * *

파트로클로스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상처를 추스르고서 지켜보고 있는 라에가르와 아폴론의 싸움은 분명 대단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장면보다는 놀랍지 않았다.

“히, 힘내주세요… 용사님.”

천하의 아킬레우스가.

괄괄한 성격을 가진 프티아의 왕녀님께서.

두 손을 간절하게 모으고서 기도를 하며, 한 남자의 무사 승리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고, 언제나 거친 욕설을 내뱉던 입은 순진무구한 소녀와도 같이 달콤한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소녀가 아닌가. 피투성이가 된 몸이었으나, 그녀의 시선은 아폴론과 싸우고 있는 남성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하염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흑발, 적안의 소녀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았다. 게다가 지금은 불사신의 가호가 깨져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지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그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보호해 주는 남성의 등장에 현혹되는 것도 당연했다.

“어이, 왕녀님. 이제 그만 내빼자고. 부상도 심한데.”

파트로클로스의 말에 아킬레우스가 분노에 젖은 눈빛을 보내며 소리쳤다.

“뭐?! 그러다가 용사님께서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나는 너 때문에 부상을 이미 입어버렸…….”

“용사님을 위해서라면 너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해!”

“이 미친 여자가!”

기껏 보호해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리는 프티아의 공주님을 보며 파트로클로스가 뒷목을 잡아버렸다.

이래서 사랑에 빠진 소녀는 무섭다더니. 뒤늦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아버린 소녀는 무섭다. 맹목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편을 들어버릴 줄이야. 10여 년 동안 뒷바라지를 해준 부장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맹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는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똥강아지 왕녀님이 푹 빠져버린 남성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차라리 이대로 혼처조차 없는 이 왕녀님을 데리고서 멀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테살리아의 왕! 여기서 죽어라!”

“네놈이나 죽어, 빌어먹을 태양신 새끼!”

하계의 왕과 태양신이 교전을 반복해 나갔다.

검과 창이라는 두 자루의 병장기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태양신을 압박하기 시작하는 라에가르. 그를 지켜보고 있던 파트로클로스는 저 용맹한 영웅이 바로 ‘하계의 왕’이라는 운명에 선택받은 테살리아의 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왕이 직접 전장에 뛰어들 줄이야. 그것도 적진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듣자 하니 이번 전쟁의 배후라고 할 수 있는 태양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투입된 것이리라.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요인을 제거한다.

그 해악은 바로 태양신 아폴론을 말하는 것이었고, 하계의 왕은 거짓된 태양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직접 참전한 것이었다.

대단하다.

한낱 인간이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대담했으며, 그것이 긍지와 명예가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리스의 무인으로서 테살리아의 왕에게 경의를 품었다.

인간을 위해서 싸운다. 그리스, 아니 하계를 위해서 싸운다.

자신의 조국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찰 터인데도, 하계의 왕은 그에 어울리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하계를 지키고자 하였다. 명예로운 일이다. 긍지 높은 군주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자, 이제 심판의 시간입니다! 아폴론 님, 태양은 잠시 가져갈게요!”

허공에서 한 소녀가 나타나 태양을 강탈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아킬레우스는 창천 위에 떠 있던 밝은 태양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태양을 강탈한다. 그것은 아폴론이 가진 힘의 근원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