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신살의 대가
태양신 아폴론이 죽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리스 전역을 비롯한 그 주변국들은 침묵을 깨고 파동을 일으켰다.
역사상 신이 인간에게 살해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인간 중에서 뛰어난 능력과 재주를 가진 영웅이나 용사가 사악한 신을 역소환시킨 사례는 있었지만, 그를 완전히 소멸시킨 전례가 없었으며 태양신 아폴론은 태양을 빼앗기고 저승으로 떨어졌다.
입이 촉새처럼 가벼운 바람의 신들이 폴리스 각 지역과 트로이에 소식을 전했다.
불행한 동풍을 상징하는 에우로스, 봄의 부드러운 서풍을 상징하는 제피로스, 여름의 남풍과 비를 상징하는 노토스, 겨울의 매서운 북풍을 상징하는 보레아스가 특히 그 부류에 속했다. 입이 가볍고 수다 떨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의 바람은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들의 사견까지 넣어가면서 소문을 과장되게 퍼뜨렸고, 태양신에게서 감히 태양을 빼앗아버린 테살리아의 왕 라에가르에 대한 무용담이 다소 과장되었다. 맨손으로 아폴론을 때려 죽였다든지, 헬리오스의 여식 키르케와 정을 통하고 있는 관계라거나. 소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바람의 신들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누이인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자식들이었고, 자신의 삼촌이라 할 수 있는 헬리오스가 아폴론에게 강탈당했던 태양을 되찾은 것을 축하했다. 바람의 신들은 언제나 테살리아에 유용한 바람으로 그들을 돕겠다고 천명했을 정도로 테살리아의 편을 들었다.
“헬리오스 삼촌이 다시 태양을 되찾았다고?”
“아폴론의 종노릇도 이제 끝났지.”
“우리 키르케가 테살리아의 왕과 잘 이어졌으면 좋겠다만.”
“아이라도 낳으면 좋지.”
신나게 수다를 떨며 축제라도 열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바람의 신들이 너스레를 떨고 있을 때, 태양신 아폴론을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었던 트로이는 초상집처럼 조용했다. 지금까지 아폴론의 가호를 받아왔던 트로이 왕국으로서는 하루아침에 아폴론을 잃고, 태양신의 가호까지 빼앗겨버린 판이었으니까.
트로이 왕실은 분노했다.
테살리아 왕국이 아폴론을 살해하였으며, 그를 수호신으로 삼았던 트로이 왕국의 명예와 긍지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성격이 괄괄한 데이포보스가 소리쳤다.
“이건 전쟁입니다! 아폴론 님의 복수를 해줘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형님, 이미 아폴론은 저승으로 떨어졌습니다. 설령 우리가 복수를 꾀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죽어버린 태양신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태양의 소유권을 가져버린 헬리오스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데이포보스의 의견에 반대를 내걸어버린 것은 헬레노스였다.
아폴론에게서 가호를 받은 헬레노스였지만,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헬리오스를 따르던 신자였다. 과거에는 헬리오스를 따랐다가 아폴론이 그 아름다운 미소년의 얼굴에 현혹되어 헬레노스를 헬리오스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신자로 삼았던 것이다.
아폴론의 동성애 대상으로서 그의 신자 노릇을 하던 헬레노스는 무엇이 국익을 위해서 도움이 될지를 골똘히 고민하더니 이제는 아폴론을 버리고 헬리오스를 따르자고 주장했다.
총명한 트로이 왕자의 주장에 여러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폴론은 그 성격이 괴팍하고 사나워 다루기 힘든 주신이었다. 반면에 헬리오스는 왕자 헬레노스에게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고, 무엇보다 성격이 온화하고 성실해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트로이의 새로운 수호신으로서 그를 받아들인다면, 자신을 칭송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따스한 햇볕으로 트로이를 융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태양은 중요하다. 그리스의 동쪽 소아시아에 위치한 트로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비옥한 곡창 지대를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양의 존재가 더욱 절실하다.
“아폴론이 죽었다라… 이건 묵과할 수 없는 경우다. 내 치세 도중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다니. 이것은 내가 부덕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헥토르가 반박했다.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을 가진 백발의 소녀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옥좌에 앉은 아버지의 앞에 섰다.
“그건 틀려… 아폴론, 은 그저 나대다가… 죽었어. 아바마마 잘못은, 아냐.”
“맞습니다, 아바마마!”
“아폴론이 잘못한 거죠. 솔직히 말해서 자기 혼자 잘난 맛에 깝죽거리다 죽은 것 아닙니까?”
헥토르의 주장에 힘을 더해준 것은 트로이의 왕자 폴리테스와 안티포스였다. 트로이 왕실의 개구쟁이 형제로 유명한 왕자들조차도 이번 사건을 아폴론의 책임으로 몰아버렸다.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었다. 아폴론은 거만하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애꿎게도 전쟁에서 인간의 손에 그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상황이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겠는가? 인간에게 죽은 아폴론에게 있겠지.
애초에 인간에게 그토록 허무하게 죽을 거라는 운명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헬레노스는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예언을 부정하고 불신했다.
태양신으로부터 태양을 빼앗아 버린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태양신 아폴론이 패배한다는 결과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그 판단 끝에 찾아온 것은 예언의 완성이었다.
트로이의 신하들이 술렁거렸다.
“하계의 왕이 그토록 강하다니.”
“이래서야 하계의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 사실로 이루어지겠소.”
“이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죠.”
델포이 신전을 담당하고 있던 아폴론을 섬겼기 때문일까. 트로이인들은 예언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다. 과거에는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파리스를 멀리 추방시키지 않았던가. 지금에서야 파리스 왕자를 받아들였지만, 불운한 미래로 암울한 트로이의 정세를 두고서 이러저러한 말로 술렁이고 있었다.
대체로 트로이인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을 가진 프리아모스 왕이 그러하듯, 바다 건너편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여론이 강했다. 그리스와 테살리아가 싸우든지 말든지, 그에 개입할 이유는 없다고 외쳤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던 트로이인들의 심정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설령 트로이의 막내아들 트로일로스가 라에가르 왕의 손에 전사했지만 그것은 자업자득과 같은 일이었고, 또한 그의 친부 아폴론도 자업자득인 격으로 하계의 왕에게 죽었다.
둘 다 테살리아를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죽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트로이 왕국으로서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뿐, 복수를 주장하진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복수를 외치기에는 테살리아가 너무도 강했던 탓이다.
프리아모스 왕이 말했다.
“애꿎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을 수는 없다. 내가 내 자식들을 전쟁에 보내는 것을 꺼려하듯이, 백성들 또한 그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왕인 나도 내 자식들을 전쟁에 보내는 것을 이토록 망설이는데 백성들은 오죽하겠는가? 전쟁은 안 된다. 복수심이니 원한이니, 그런 부정적인 감정으로 전쟁을 해서는!”
일국의 왕이라고 하기에는 마음과 정에 치우쳐진 발언이다.
프리아모스 왕의 의견을 두고서 신하들 사이에서는 “패기가 없다”, “왕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라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불만을 쏟아냈지만, 그것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설령 프리아모스 왕이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가족의 정에 매달리는 인간이라 해도, 유약한 왕의 옆에는 언제나 왕세녀 헥토르가 버티고 있었다. 백발, 홍안의 미소녀는 고개를 조아리면서 왕의 말에 경청했다.
지금 테살리아를 공격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테살리아는 현재 그리스 동맹과의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본토의 해안선에 수비 병력을 배치시켰다고는 하나, 트로이의 정예 병력들이 선단을 이용하여 상륙을 개시한다면 곤혹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테살리아는 그리스 동맹의 본대를 앞에 두고서 병력을 가볍게 돌리지 못할 것이며, 출전만 한다면 트로이 병력은 항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나아가 적의 수도 라리사를 불태우
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치명적인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최강대국 테살리아를 공격하겠다는 패기가 왕에게는 부족했다.
헥토르는 기회를 놓치면 발생하는 전략적인 손실과 전술적인 측면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발설하진 않았다. 왕세녀인 그녀부터가 말주변이 없었던 것도 있었고, 왕이자 아버지인 프리아모스의 의견을 존중했기에 평화주의자인 그의 말을 따르고자 했다.
“헥토르의 생각은 어떻죠?”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헤카베 왕비가 물었다.
그 말에 헥토르는 미약하게 어깨를 떨더니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지금, 전쟁을 수행… 적기, 라고 판단하지만… 여러모로, 힘듭니다…….”
헥토르는 말수가 적고 말재주가 부족했기 때문에 오해의 의미가 다분한 말로 의견을 주장했다.
분명 왕세녀의 말이 끝나면 신하들이 벌떡 일어나 항의를 쏟아낼 것이다. 도무지 근거가 없는 말로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파악한 헬레노스는 누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배턴을 이어받았다.
“자, 잠깐! 누이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헉, 헉… 어찌나 급했는지 거친 숨을 토해내며 헬레노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왕세녀인 누이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도 급박하게 손을 들어버린 탓에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머리를 최대한 빠르게 굴리던 헬레노스는 모든 이들이 합당하다고 여길 법한 이야기부터 꺼내들었다. 언제나 헬레노스는 말주변이 부족한 누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종종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곤 했다.
“어차피 테살리아의 왕에게는 합당한 신벌이 내려질 겁니다! 태양신 아폴론을 죽였으니까요. 지금까지 신을 저승으로 밀어넣은 사례는 없었습니다. 설령 주신 제우스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보복을 피할 수는 없겠죠!”
그 말에 트로이의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신을 살해했다는 그 업보는 하계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양신을 죽여 버리다니. 아폴론도 제우스의 아들이었으므로, 분명 그 살해 행각은 골육상쟁이라고 할 만하다.
제우스의 아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어느 한쪽이 죽었다. 그리스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가족끼리의 정을 강조하는 트로이로서는 꽤나 자극적인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바람이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아네모이 4형제가 테살리아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에 에게해의 해풍이 우리를 도와줄지가 미지수입니다. 적어도 그들을 아군으로 받아들여야 에게해를 나아가서 테살리아를 공격하든지, 아니면 그리스 동맹을 공격하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아스트라이오스와 에오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네모이 4형제들은 하계의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기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지만, 헬레노스는 궤변에 가까운 주장으로 그들이 테살리아의 편에 섰다고 말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아네모이 4형제는 테살리아의 왕 라에가르의 연인으로 소문난 키르케와 사촌지간이었고, 분명 가족의 혈연을 잇고 있었으니 테살리아의 편이 될 것이라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가족이니 분명 돕겠지. 가족애에 대해서 큰 비중을 두는 트로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