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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살의 대가
전쟁을 원치 않는 것은 테살리아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대한 곡창 지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만큼 농사일에 수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았다.
테살리아는 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전선에서 운용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을 먹여 살리는 운용비가 크게 들었다. 운용비는 테살리아의 부유한 사정으로 어떻게든 충당할 수 있겠지만 농사일에 필요한 병사들을 장기간 붙잡아두고 있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리스와 테살리아는 ‘누가 먼저 물러서느냐’를 기준으로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었다.
등을 보이는 쪽이 패배한다. 그렇기에 항복을 요구하는 사신조차 보내지 않을 정도로 대립각이 치열했다. 서로 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사실상 전쟁을 원치 않았고, 지지부진한 전황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칼리돈의 동부까지는 진격했지만 곧 디오메데스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에베누스 강을 도하하는 오디세우스 병력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전선 중에 이렇다고 할 승산은…….”
라에가르는 프티아의 왕녀님이 하고 있는 기대와는 달리 후방에 사령부를 두고서 전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테나와 아레스를 전진에 배치시키면서 동시에 펜테실레이아와 여러 무장들에게 전선을 일임하였다.
에게해 건너의 트로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라에가르는 일부러 후방에 진지를 두었다. 혹시나 트로이가 해로를 통해서 테살리아 왕국의 수도 라리사를 침공할 경우 그를 반격하기 위해서였다. 트로이 왕국이 갑작스럽게 침공을 걸어올 리가 없겠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방비는 해두어야 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 신중한 성격의 라에가르는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모든 상황에 대해서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 동맹에만 국한되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라에가르, 곤란한 모양이군.”
은발의 여신이 군막을 걷으며 들어섰다.
백은색의 갑주를 입은 아테나는 그 누구보다 눈부신 미녀였다. 헤파이스토스를 비롯해서 여러 남신들을 매혹시킨 미모는 투박스러운 갑주를 입었음에도 빛났다.
투구를 벗으며 찰랑거리는 은발을 노출시킨 미녀는 라에가르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아레스를 비롯해서 테살리아의 장교들은 열심히 해주고 있다. 길게 이어진 전선이지만 단 한 곳도 뚫리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테살리아가 수세에 몰린 듯하지만, 백중지세를 아슬아슬하게 이루면서 전황이 유지 중이다.”
“언제 그 전쟁을 끝내냐, 그 마침표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모르겠어.”
“후우, 서로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겠지. 테살리아는 연전 무패의 승리를 얻어야 할 것이고, 그리스 동맹은 연이은 패배로 의기소침해진 폴리스의 위상을 끌어올리려 할 테니까.”
“전쟁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병신 같은 짓이야. 하지만 때로는 물러날 수 없을 때도 있는 거지.”
전쟁의 승패는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승패와 상관없이 전쟁을 지속시켜야 할 때도, 당장 중단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쯤이면 아가멤논도 전쟁을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를 두고서 고민하고 있으리라.
아이톨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이 길어지면서 참전한 국가들이 모두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필이면 농번기에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씨와 모종을 심지 못한 농토들을 놀려둔다면 이번 년도의 농사는 크게 망칠 게 분명했다.
“그러면 멈추면 되잖아.”
어느 순간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아르테미스가 말했다.
칠흑처럼 검은 흑발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는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흙먼지가 거세게 일어서는 야만스러운 전장이 몹시도 불쾌한 모양이다.
세속과는 결별하고 오로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아르테미스에게 지금의 상황은 그다지 기쁘진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라에가르와 관련된 전쟁이었기 때문에 참전하였을 뿐, 전쟁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가오오오오오오오오!!
하늘에서 드래곤들이 비행하며 울음소리를 냈다. 정찰용으로 운용되고 있는 드래곤들도 하품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전투가 일어나진 않았고, 그저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을 뿐이었기 때문에 드래곤이 나설 차례는 없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바닥을 나뒹굴며 무료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부하들의 원성도 상당하다.”
바깥을 힐끗 바라보고 있던 아테나가 중얼거렸다.
농번기를 맞이하였음에도 철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병사들로부터 그 불만이 토로되고 있었다. 테살리아의 장교들은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병농일치 사회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왕에 대한 충성도 아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농토에 대한 관심이었다.
농사가 중요하다.
설령 대지와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가 가호를 내려준다고 하더라도 씨와 모종을 뿌리지 않고서는 그 수확물을 거둘 수가 없다.
“데메테르에게 일이나 시킬까.”
라에가르의 중얼거림에 아테나가 대답했다.
“데메테르 님께서 나서실 거라고 생각하나? 그분은… 일을 싫어하신다.”
“게으름뱅이를 단순화해서 말하는군.”
아테나와 아르테미스는 태양신 아폴론을 죽인 것을 빌미로 올림포스 신계에서 무슨 형벌이라도 내려지진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전쟁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무슨 해코지가 가해지진 않을까 그것이 걱정되었다. 아무리 제우스가 뒤에서 후견인이 되어준다고 하더라도 이번 신살 사건으로 올림포스에서 옥신각신하고 있는 여론 논쟁이 더욱 극심화될 것이다.
아폴론이 죽었고,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는 폐인이 되어버렸다.
비어버린 올림포스의 옥좌. 두 개의 옥좌가 비어버렸다.
그중 하나는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가 다시 돌려받는다고 해도, 남은 한 자리에는 그 주인이 명백하게 정해지진 않았다. 올림포스 12주신이 되고 싶은 하급 신들은 야망을 숨기지 않으며 그것을 차지하려고 아등바등거렸다.
그를 위해서 테살리아의 왕 라에가르를 노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태양신을 살해한 만행을 부린 하계의 왕을 처단한다. 그것만큼이나 단숨에 명성을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하급 신들은 명성을 순식간에 올려서 올림포스 12주신이 되고자 했다. 올림포스 12주신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명예였고, 신들의 왕이라 불리는 제우스를 지척에서 보필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전쟁을 끝내라. 올림포스에서 무슨 소란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태양신을 죽인 게 그렇게나 큰일인가?”
“당연하지 않나!”
아테나가 거센 어조로 소리쳤다.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 가장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였다.
태양신을 죽였다.
그것은 새로운 변혁을 일으킬 중대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신도 인간의 손에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소문이 확산되면서 인간들도 그것을 깨닫게 되었고, 신을 섬기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신앙심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신도 불멸이 아닌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신앙심을 접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것의 모든 시작은 라에가르가 끊었다.
좋든 싫든. 그는 세계 변혁의 중심에 선 상태였고, 그의 행보에 따라서 그리스 신화계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아테나가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하계의 왕이 이토록이나 어마어마한 존재였을 줄이야.
어릴 적부터 라에가르를 가르쳐온 아테나였지만 자신의 연인 겸 제자인 라에가르를 돌보면서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들이 올 거다.”
“맞아. 이제 그들이 올 거야. 주의해.”
아테나와 아르테미스가 ‘그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이란 인간의 모든 죄를 관장하고 담당하는 형벌 집행인 에리니에스를 일컫는 말이다. 에리니에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딸들인데, 모두 세 자매였다. 티시포네, 알렉토, 메가이라.
온갖 죄를 처벌하지만 특히 근친 살해에 복수를 가하며,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벌을 준다. 횃불을 든 처녀로 묘사되는데, 순결을 지키면서 언제나 중립의 입장에서 죄인을 처벌한다.
아폴론을 죽인 것에는 신 살해의 혐의와 함께 근친 살해까지 겹친다. 라에가르와 아폴론은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는 이복 형제였기 때문이리라.
형벌 집행인들이 지하 세계에서 급파된다. 세 자매들은 라에가르를 재판정에 세울 것이고, 하계의 왕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그 죗값을 논하면서 괴롭힐 것이다.
아테나와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동맹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에리니에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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