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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성군-149화 (14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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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

라에가르에게 죽임당하고 저승으로 떨어진 아폴론은 이승에서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미 그 육신이 죽어 버렸으니 삶이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겠지만 저승에서도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폴론은 자신이 자랑하는 하프를 하데스와 그의 애첩인 멘테를 위해서 켜야 했다. 자유로운 음유시인을 자칭하는 아폴론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생전에는 태양신의 지위에 올랐던 몸이다. 그런데 저승에 와서는 왕과 애첩을 위해서 식사 자리에까지 불려 나와서 하프 연주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처량한 꼴인가.

태양신을 고작 악공 대접을 해버릴 줄이야!

하데스의 오만함에 치가 떨려왔다.

“디오니소스! 어서 네가 자랑하는 술이나 내와라!”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하데스가 소리쳤다.

그 말에 디오니소스가 당황한 듯 버벅거리면서 포도주가 가득 담긴 술병을 내왔고, 어리숙한 디오니소스의 모습에 님프 멘테가 깔깔 웃었다.

지상의 님프였던 멘테는 하데스가 저승의 궁전으로 데려올 정도로 푹 빠진 연인이었는데, 페르세포네의 왕비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하데스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미 페르세포네는 공식적인 자리에조차 초대받지 못할 정도로 하데스가 꺼려했다.

‘젠장.’

아폴론이 이를 앙다물었다.

저승 세계로 떨어지고 나서 잠시라도 편안했던 적이 없었다. 하데스의 부름이 떨어지면 그 즉시 뛰어와 그의 수발을 들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저승의 왕으로부터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졌다.

인간 죄인처럼 불구덩이에 들어간 적도 있었으며, 얼음 지옥에서 헤매다가 두 발에 동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물론 신의 영혼이었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연약하진 않았지만 저승의 지옥은 태양신조차도 고통을 느꼈다.

영원히 이어지는 고통.

저승 세계에서는 그 어떤 충격과 아픔을 받아도 죽지 않는다. 애초에 이승에서 죽어서 저승으로 왔으니까. 저승 세계에서는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벌레 같은 맛이군! 이 역겨운 양아치 놈이!”

디오니소스가 준비한 포도주를 마시던 하데스가 술잔을 내던졌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술잔은 디오니소스의 이마에 정확히 꽂혔다. 날카로운 장식에 얻어맞았는지 디오니스소의 이마가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술잔에 담긴 아까운 술이 쏟아졌는데, 과연 하데스의 말대로 이승에서 만든 디오니소스의 걸작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떨어졌다.

디오니소스도 억울한 점이 없지 않았다.

애초에 저승에서 만들 수 있는 포도주는 한정되어 있었다. 석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신맛이 너무 강했다. 이승에서 만들었던 극상의 포도주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햇빛을 많이 받은 당도 높은 포도가 필요했는데 이 저승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햇볕이 한 줌도 도달하지 못하는 저승에서 그런 당도 높은 포도를 어디서 구하란 말인가?

하지만 저승의 왕은 그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자신의 애첩에게 질 떨어지는 포도주를 대접한 벌로 하데스의 신호를 들은 케르베로스가 저 멀리서 냉큼 뛰어와 디오니소스의 허벅지를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혀들자 디오니소스가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신조차 죽여버리는 괴물의 독니는 신의 영혼에조차 타격을 입힌다. 허벅지가 물린 디오니소스는 두 주먹으로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가격했지만 저승의 수호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벅지를 가득 물어 그 살덩이를 토해낸 뒤에야 케르베로스가 뒤로 물러났다. 디오니소스는 다리를 절면서 비명을 질렀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하데스와 멘테가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하하!! 제우스의 총애를 믿고 올림포스 주신의 반열에 오른 녀석치고는 꼴사나운 모습이구나!”

너는 그저 아버지를 잘 만나서 출세한 도련님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손에 어머니를 잃고서도 아버지가 좋다면서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꼴이 우습지 아니한가.

하데스는 디오니소스를 조롱하면서 술을 들이켰다. 신의 비명을 안주로 삼으니 질 떨어지는 포도주도 썩 괜찮았다.

자신에게 저승을 주고, 본인은 하늘을 차지한 제우스를 원망하고 있었다. 물론 크로노스를 물리치고서 세 형제들이 정당하게 뽑기를 한 것이었지만, 그 뽑기에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작당하여 자신을 저승으로 쫓아낸 것이라 여겼다.

포세이돈은 제우스와 작당하여 드넓은 생명의 요람인 바다를 점령하였고, 제우스는 그 누구보다 높고 웅장한 하늘을 차지하였다. 한편 하데스는 가장 먼저 태어난 장남이었음에도 저승으로 쫓겨났다.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황량한 지하. 들리는 것은 죄인들의 비명 소리뿐이다.

이런 시답잖은 저승에서 벗어나 크로노스와 레아의 장남으로서 자신이 당연히 가졌어야 했던 하늘을 차지하고 싶었다.

저승은 지긋지긋하다.

나는 하늘과 바다를 원한다. 이승을 정복하여 저승과 마찬가지로 이 하데스의 영역으로 삼겠다.

“제우스의 자식들이 저승으로 떨어지다니, 그만큼 너희들이 한심하다는 뜻이겠지. 게다가 하나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너희들은 올림포스의 수치다.”

그렇게 말하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게 수치를 주기도 했다. 특히 한낱 님프였던 멘테가 깔깔거리며 웃으니 그것보다 더한 수치도 없을 것이다.

이승에 있을 시절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지위는 고작해야 님프 따위가 감히 비웃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데 저승으로 떨어지고 나니 하데스의 애첩 따위에게 비웃음이나 당하고 있었다. 그것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들을 언제 살려줄 것입니까? 약속하지 않았나!”

아폴론이 소리쳤다.

저승의 왕에게는 저승으로 떨어진 영혼을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 당장이라도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아폴론은 수치스럽더라도 하데스의 모든 명령을 들어주었는데, 정작 하데스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되살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신으로서의 위격을 모두 잃었다고는 하나, 유능한 재주가 많았기 때문에 썩 도움이 되는 자들이었다.

하데스는 연로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생활이 녹록지 않았는데, 아폴론을 시켜 저승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강한 정력제를 만들 수 있었으므로, 멘테와의 잠자리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연회의 흥을 돋우는 재능꾼이었기 때문에 이승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영원히 저승에서 부려 먹어주겠다, 하데스는 제우스에 대한 복수를 할 겸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그들과 맺은 약속을 간단히 파기시켰다.

하데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슨 약속? 애초에 약속이라는 건 대등한 존재들끼리 맺는 것이다. 너희 같은 패배자들에게 한 약속이 진심일 거라고 생각했나? 주제를 모르는군, 제우스의 아들. 네놈들 아버지도 내게 맞서지 못하거늘 그 자식 놈들이 설치는 꼴이라니. 그러니 죽은 것이다.”

그렇게 말한 하데스는 망령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흥을 깨트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연옥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한편 비참하게 연옥으로 끌려가는 아폴론에게 찾아온 여인이 있었으니, 하데스의 정비인 페르세포네였다.

그녀는 하데스에게 억류되어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남편마저 빼앗긴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그녀가 평소 경멸하던 아폴론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꼼짝없이 동생 디오니소스와 함께 연옥으로 끌려가던 아폴론은 무슨 이유로 페르세포네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해졌다.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경멸의 낯빛을 보내던 여신이 직접 발걸음을 움직여서 자신에게 왔다는 건 분명 그에 따른 이유가 있다는 것일 텐데.

우선 병사들을 뒤로 물리며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나를 비웃으러 온 거냐!”

“아뇨. 그 반대죠. 당신이 이 저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가르쳐주러 온 거니까.”

“뭐?”

페르세포네의 놀리는 듯한 말에 격노하여 소리친 아폴론이었지만 그 뒤로 이어진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승을 나갈 수 있는 방법?

저승에 갇힌 망자가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저승의 왕 하데스의 승인이 떨어질 경우에 한해서였다.

하데스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저승에 억류하고 싶어 했으므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위인은 아니었으므로 우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제 곧 라에가르가 올 거예요.”

“하계의 왕? 지난번에는 프시케의 상자를 가져가기 위해서 오더니, 이제는 너를 보쌈이라도 할 셈인가?”

아폴론이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페르세포네는 한숨을 내쉬면서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요”라고 말하고는, 라에가르의 목적이 저승의 왕이 차지하고 있는 저승의 옥좌라고 밝혔다.

그 말에 아폴론은 과거 저승으로 왔던 라에가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반 농담으로 한 말인데 하계의 왕은 진심으로 하데스를 고꾸라뜨리기 위해서 저승으로 오고 있었다. 페르세포네의 말에 아폴론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에가르가 온다.

그 말에 의심하면서도 기대감을 가졌다.

사실상 하데스는 자신을 이승으로 보내줄 생각이 없었으니, 저승의 옥좌를 찬탈하려는 라에가르가 유일한 희망인 셈이다.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승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라에가르가 저승의 옥좌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낱 인간일 뿐인 하계의 왕에게 절묘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맞았던 아폴론은 그를 시기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이 저승을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여기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야 라에가르와 손을 맞춰서 하데스를 물리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오히려 라에가르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 자신이 있었다.

“저 또한 하데스를 원망하는 마음은 같아요. 당신도 그럴 텐데요?”

“당연하지! 반드시 저 영감을 죽여버릴 테다!”

아폴론은 페르세포네의 말에 신뢰를 느꼈다.

님프 멘테가 저승으로 오고 나서부터 페르세포네 또한 찬밥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승에서 납치할 때만 하더라도 페르세포네 없이는 못 산다고 징징거리던 순정남이 이제는 아름다운 님프를 새로운 첩으로 끌어들이더니 마음을 바꿔 먹고는 멘테에게만 매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승의 왕비가 교체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망령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었고, 아폴론도 그걸 들었다.

‘가능할지도. 아니,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

아폴론이 눈을 빛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에가르. 페르세포네. 아폴론.

우선 저승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이렇게 세 명의 인물들이 손을 잡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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