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로마신화성군-168화 (168/193)

168====================

일상

헤르메스는 드디어 테살리아에 라에가르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놀려주기 위해서 왕궁으로 향했다.

날개 달린 샌들인 탈라리아를 신고서 하늘을 비행하던 헤르메스는 올림포스에서 테살리아 왕궁까지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올림포스 주신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비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도둑과 전령을 대표하는 여신이다. 도둑과 전령의 공통점은 빠른 속도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여신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네가 왜 여깄어?!”

어느 남성을 본 헤르메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죽은 인간이 살아서 돌아오는 기적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죽어서 저승에서나 볼 것 같았는데.

헤르메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너무 서둘러서 오느라 목적지를 테살리아가 아닌 저승 세계로 잡은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가장 빠른 속도로 날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장소로 가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테살리아 왕궁이 확실했다.

하계에서 가장 웅장한 규모를 가진 궁전이 바로 테살리아의 왕궁이다. 그리스 양식으로 지어진 왕궁은 오늘도 어김없이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었고, 화려하게 장식된 조각상들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테살리아의 수호신 아테나를 필두로 아르테미스와 헤스티아 등의 여신상들이 눈에 띄었다. 물론 그 여신상들 중에는 헤르메스의 가련한 모습을 조각한 것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여신상밖에 없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테살리아 왕의 호색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페르세우스!”

“헤르메스 님이시군요. 그리스 제일의 도둑년… 아니, 전령의 여신님.”

“누가 도둑년이야!”

라에가르도 그렇고, 이제는 페르세우스까지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지 헤르메스를 도둑년이라 부르고 있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도둑이 숭상하는 여신이 바로 헤르메스였고, 헤르메스는 종종 가호를 내려서 도둑들에게 행운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헤르메스의 가호를 받은 도둑들은 대도(大盜)라고 불리게 된다.

아무튼 헤르메스는 종종 도둑들에게 가호를 내리면서 테살리아의 치안을 어지럽혔고, 라에가르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아무튼 너! 하계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거야?”

“그건 하계의 왕께 묻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헤르메스 님께 들킨 것부터가 저에게 있어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거든요. 게다가 전 설명을 유창하게 할 정도로 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라에가르? 또 그 변태 녀석이 이상한 짓을 꾸몄구나!”

지금까지 라에라르가 저지른 행동들을 일일이 나열해 본다면 저승 세계에 있어야 할 망자를 다시 하계로 불러들인 것은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정도로 라에가르는 엉망진창과도 같은 사건을 저질러왔던 트러블 메이커였다.

태양신 아폴론을 죽인 것으로 모자라, 3대 절대신이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물 먹였다.

라에가르가 지금까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페르세우스에게 말하던 헤르메스는 “포세이돈이 물 먹었대. 이거 엄청나게 재밌는 유머지?”라고 말하였고, 페르세우스는 재미없다며 헤르메스에게 윽박지르기보다는 오히려 같이 웃어주면서 답해 주었다.

“라에가르!”

“뭐야, 도둑년이잖아.”

헤르메스를 보며 라에가르가 대답했다.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두 번이나 도둑년 소리를 들어버린 헤르메스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라에가르에게 발차기를 먹이려 했고, 라에가르는 몸을 조금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헤르메스의 발차기를 피해버렸다. 오히려 그녀가 라에가르에게 다리를 잡혀 올려지며 속옷이 노출당하는 굴욕을 경험했다.

헤르메스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들어 올리자 새하얀 허벅지와 함께 소녀에게는 조금 난감한 야한 속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던 페르세우스는 고개를 돌렸고, 라에가르는 그 속옷을 보며 어린애한테는 조금 조숙하지 않냐고 따졌다.

“소녀의 속옷을 봐놓고 감상이 그게 다야?”

“뭘 바라는 거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헤르메스가 굴욕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내질렀고, 라에가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 모습을 본 페르세우스는 라에가르와 헤르메스가 매우 친한 오누이 같은 사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이 두 남녀는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는 이복 남매지간이다.

헤르메스가 페르세우스를 가리키며 하계로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라고 했다. 그녀의 물음에 라에가르는 저승의 왕 하데스를 유폐시키고 그의 권능을 빼앗았다고 고백했다.

저승의 왕이 가지고 있는 권능을 사용하면 이미 죽어버린 저승 세계의 주민들도 다시 되살릴 수 있다. 애초에 죽음의 신 타나토스부터가 하데스 휘하의 하급 신이었으므로 죽음을 무시하고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 정도는 간단하다.

“꺄하하하하핫!! 재밌는 농담이었어, 라에가르도 제법 하잖아? 하데스 큰아버지를 이겼다니. 참, 농담도 잘한다.”

“진짜다.”

“진짜야? 하데스 큰아버지를 유폐시켰다고?”

“어. 팔을 잘라서 똥도 시원하게 못 닦게 만들었지. 스스로 딸도 못 쳐. 대리로 딸잡이를 해준다면 모를까.”

라에가르가 피식 웃으며 “하계의 왕이 선사하는 최고의 유머!”라고 말하면서 과장된 몸짓을 펼쳤지만, 그를 보고 있던 헤르메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아직 성장기인 소녀에게 저토록 저질스러운 농담을 할 수 있다니. 하계의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에는 인성이라는 중요한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페르세우스는 라에가르나 헤르메스가 둘 다 거기서 거기인 남매들이라 여겼다. 둘 다 재미없는 농담을 해서 분위기를 간단하게 뒤엎어 버린다.

“하데스 큰아버지를 유폐시켜? 그리고 팔을 잘라? 완전 친족 연속 상해범이잖아! 포세이돈에 하데스, 다음에는 설마 아버지라도 해치울 셈이야?!”

어떻게 알았지.

라에가르와 페르세우스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맞는데.”

“하아? 아버지의 옥좌를 노리겠다고! 나갔어,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헤르메스가 들썩거리며 라에가르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물론 아픈 쪽은 라에가르가 아니라 헤르메스 쪽이다. 여신이라고는 해도 전투 쪽으로는 젬병이라 일반 여성과 비교하면 그다지 근력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헤르메스는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는 손을 흔들며 라에가르에게 소리쳤다.

“아버지에게 맞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 너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라에가르를 걱정하는 것은 헤르메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처럼 지냈던 남매 사이가 아닌가.

헤르메스는 라에가르를 연하의 남동생으로 여기며 언제나 그에게 고난이 닥칠 때마다 걱정하고 고심에 빠졌다. 지금까지는 라에가르가 포세이돈을 비롯하여 아폴론 등을 격파하면서 성공했지만, 올림포스의 제우스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 말은 곧 라에가르가 패배하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누나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헤르메스는 모든 사정을 라에가르에게서 듣고는 경악에 빠졌고, 그리스 영웅들이 부활한 목적을 포함하여 괴물들의 여왕 에키드나까지 테살리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모두 육안으로 직접 목격하고서야 라에가르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미 죽었을 영웅들이 하계에 실존한다.

아탈란테를 포함하여 이아손과 메데이아, 페르세우스 등이 그 증거였다.

“에키드나까지 동원할 줄이야. 예전부터도 알고 있었지만 진짜 미친 사람이라니까.”

만류하는 것도 지쳤는지 헤르메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올림포스를 침공한다. 그 말을 전해 듣고서 얼마나 경악하였던가?

헤르메스는 그 계획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신들 중에서는 막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소녀였음에도 환청이 들리는 것이라 여겼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설마 올림포스를 공격하여 제우스를 몰아내고 하늘의 옥좌를 강탈하겠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받아들여.”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헤르메스가 으쓱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 사실을 올림포스에 알릴 거야!”

만약 헤르메스가 이 사실을 올림포스에 전한다면 침공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는 일부러 짓궂은 말을 한 것이리라.

헤르메스는 모든 신들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신속 비행이 가능한 탈라리아를 가지고 있었다. 라에가르가 전력을 발휘하더라도 공간과 공간을 좁혀서 비행하는 수준으로 재빠른 헤르메스는 막을 수 없겠지.

일부러 라에가르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친 장난이다. 물론 라에가르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협박이었지만.

“저승의 지하 감옥에 갇혀서 평생 팔 없는 노인네 간병이나 하고 싶냐.”

“윽!”

눈앞의 남자라면 남매 사이인 자신조차도 감옥에 가둘지도 모른다고 여긴 헤르메스가 침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헤르메스가 밀고하지 않을 거라는 건 라에가르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화로를 보살피고 있던 헤스티아가 말했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둑해진 밤이 되었고, 밤의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는 화롯불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불쏘시개를 사용하여 화로의 불이 계속해서 타오르도록 돕고 있었다.

헤스티아가 말하길 그녀가 매번 관장하고 있는 화로의 불은 과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처음으로 전해준 태초의 불이라고 한다. 인류사를 발현시킨 최초의 불이자 모든 문명의 시작점을 알린 근원이기도 했다. 절대로 꺼져선 안 될 화롯불이자 인류사가 지속되는 한은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하였다.

태초의 불을 다스리는 그녀가 하계의 왕인 라에가르와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를 상징하는 왕과 불꽃이 만났다.

헤스티아는 라에가르에게 설령 신계의 왕이 되더라도 이 태초의 불만큼은 중요하게 여겨달라고 부탁했다. 이 불이 꺼지는 순간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테니까. 화로의 여신은 과거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온갖 재앙을 해방시키며 아수라장이 된 세계 속에서도 사력을 다하여 불꽃을 지켜냈다.

헤스티아에게 있어 두 번째로 소중한 것. 라에가르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 바로 태초의 불꽃이었고, 지금은 테살리아 왕궁의 화로에서 발화되는 화롯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에게 해의 바닷물을 끌어당겨서 꺼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돼요?”

헤르메스가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앙큼한 도둑고양이 아니랄까 봐 농담을 자주 하는 것이 헤르메스의 버릇이다. 괜히 그 별명이 도둑년이 아니다.

방실거리며 웃음을 짓는 헤르메스를 보며 헤스티아가 온화한 미소로 응답했다. 물론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본 라에가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마그마로 들끓는 에트나 화산에 머리부터 처박히고 싶으면 시도해 봐도 좋아요. 물론 시도만 해도 화산에 처박아버릴 거예요. 후후후후.”

“아, 죄송합니다. 제가 도둑년이라 말이 심했네요.”

헤스티아의 진심을 경험해 버린 헤르메스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사죄했다.

그를 지켜보던 라에가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여자를 보는 눈길로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대체 도발 범위가 어디에까지 미치는 걸까. 지난번 연회에서는 헤라를 빡치게 만들더니, 이제는 헤스티아에게 도발을 거는 건가.

올림포스를 침공하기 직전에 헤르메스를 내던져서 올림포스 주신들에게 도발 상태를 걸게 만든 다음 기습전을 펼치면 쉽게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표면적으로는 농담 삼아서 한 말이었지만 헤르메스가 주로 다루는 기술이 눈을 현혹시키는 환술의 일종이었으니 교란 작전으로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라에가르가 헤르메스에게 교란 역할을 부탁하였고, 그를 들은 헤르메스는 당연히 거부했다

“싫어! 절대로 싫어!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되면 친딸이라고 해도 벼락을 던져버릴 거고, 나는 벼락 맞은 참새 꼴이 되어버릴 거야! 나는 천재라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성격이라서!”

헤르메스가 뒤로 물러서며 눈물 젖은 눈빛으로 라에가르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진짜다. 짐승적인 사고를 가진 하계의 왕이라면 자신의 누이라고 해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라에가르와 얽힌 일화만 떠올려도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과거 라에가르는 장난 식으로 헤르메스에게서 지팡이 카두케우스와 샌들 탈라리아를 똥통에 던진 적이 있었다.

올림포스가 자랑하는 희대의 보물들을 냄새나는 인간의 똥으로 가득한 똥 무더기에 내던져버린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화가 치밀었다. 헤르메스는 항상 하계와 신계를 오고 가면서 일하는 전령이라 똥통에 던진 당일에 바로 샌들과 지팡이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악취 나는 물건을 항상 들고 다녀야 했다.

당시 라에가르의 장난에 사흘 밤낮으로 울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진짜 시키는 거야? 너 예전에 내 지팡이와 샌들을 똥통에 던졌지!”

“너도 내가 아끼는 갑옷과 병장기를 몰래 팔아넘겨서 그걸로 간식 처먹는 데 썼잖냐! 그냥 돈 달라고 하면 줄 것을.”

“그게 재밌잖아!”

“이게 진짜! 이번에는 네년을 똥통에 처넣어줄까!”

어느 매니악한 독자들은 스캇물이라고 좋아하겠군.

헤스티아가 힐끔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헤르메스의 등줄기를 타고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부부 협박단에게 잘못 걸린 기분이다. 만약 헤스티아가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헤르메스는 뼈도 못 추리고 잿더미 신세가 되어버린다.

헤스티아는 온화하고 자상한 이미지를 보여 주었지만 진심으로 화를 내면 헤라도 못 말릴 정도였다. 당연히 헤르메스로서는 남몰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