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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
올림포스는 이미 전복 상태에 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궁을 지키던 실질적인 세력이었던 헤라와 아테나는 이미 라에가르의 찬탈에 동조하여 올림포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라에가르의 행동에 동의했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손으로는 올림포스를 망치고 싶지 않았는지 그녀들은 테살리아 왕궁에 기거하면서 올림포스의 상황에 대해서 외면했다.
오로지 전령의 여신 헤르메스만이 탈라리아를 이용해 날아오르며 올림포스 왕궁의 전선을 한눈에 목격하고 있었다.
압도적이다.
이미 에키드나가 이끄는 괴수 군단과 에리스, 네메시스가 이끄는 망자 군단이 올림포스를 대거 점령하면서 죄악과 오만의 화신과도 같았던 신족들을 학살해 버렸다.
막강한 화력을 동시다발적으로 퍼부으면서 다수의 신족 병사들을 포로로 잡게 되었는데, 그 포로들 중에서도 에리니에스의 무자비한 판결에 유죄를 받은 포로에 한해서는 높디높은 올림포스 산에서 하계로 내던져지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커다란 발리스타에 매달려서 내던져진 신족 병사들은 지면에 닿기도 전에 온몸이 찌부러져 죽어버릴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저승으로 인계되어 영원히 이어질 고통을 받게 되리라. 애초에 에리니에스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연속해서 저지른 흉악범만을 골라내어 처벌하고 있었고, 죄가 없으며 깨끗한 품성의 신족은 모두 살려주는 방향으로 선의를 베풀었다.
“그냥 다 죽여도 되지 않나?”
파멸의 신 모로스가 말했다.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파멸하게 될 운명’.
모로스는 죽음이 결정된 파멸자들을 결코 도망칠 수 없는 파멸로 이끌며, 제우스조차도 파멸에 관련된 영역에 한해서는 제기할 수 없다고 한다.
과거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아킬레우스의 모친인 테티스와 혼인을 할 경우 위대한 자식이 태어나 옥좌를 위협하는 파멸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 예언하였는데, 그 말은 곧 하늘의 옥좌에 오른 제우스조차도 파멸의 운명만큼은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파멸은 제우스도 두려워하는 영역, 따라서 파멸을 상징하는 모로스는 공포적인 존재였다.
에리스가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살려두라고 하셨어. 그러면 얌전히 따르도록 해.”
“쳇, 인간을 저승의 주인으로 모시라는 것부터가 난센스라고.”
모로스는 그것에 대해서는 논하고 싶지 않았는지 신족들을 베어낸 대검을 털어내면서 중얼거렸다.
에리스, 네메시스와 함께 닉스에게서 태어난 모로스는 저승 세계나 이승 세계나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문제라면서 선을 그었다. 다만 라에가르를 지칭해 빈정거리는 듯한 언행을 내뱉자 노려보기 시작하는 에리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어도 불화의 여신인 그녀가 라에가르를 변호할 필요는 없을 텐데. 무언가 심정의 변화라도 있는 건가? 물론 모로스는 그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길 뿐,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다. 에리스와 네메시스가 인간인 라에가르와 붙어먹건 뭘 하건, 그건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올림포스를 쓸어버리는 건 찬성이야. 신계에 파멸을 부른다. 파멸하게 될 운명을 무자비하게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쾌락이니까. 거기다가 올림포스에게 파멸을 전해준다면 그만큼 유쾌한 것도 없지.”
인간을 따르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저승의 왕이 하는 짓거리만큼은 매우 유쾌해서 좋다.
따분한 저승 세계에서 망자들을 고문하고 괴롭히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던 모로스에게 있어 이번 올림포스 정벌은 오랫동안 이어지던 무료함을 깨부수고 머리를 자극시키는 쾌락을 전해주는 지고의 유희였다. 다만 이 전쟁이 운명에 의해 처음부터 열까지 모두 계획된 일이라는 것에 비웃음을 날렸다.
제우스의 멸망은 결국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 일이다.
하늘의 주신, 과거 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제우스는 ‘파멸’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그 결과에 유쾌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은 완료했어. 그러니까 이제 꺼져.”
“알았다고.”
에리스의 말에 모로스가 숨을 죽이며 에키드나가 열어놓은 통로에 몸을 던져 역류되면서 저승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 황금의 왕궁으로 향하면 되는 거야?”
가슴과 음부를 가릴 뿐인 아슬아슬한 갑옷을 걸치고 있던 네메시스가 물었다.
대낫으로 상체를 지지하면서 엉덩이를 추켜올린 자세를 보이는 네메시스의 모습에 남정네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미녀가 뒷골목 창녀들조차 입지 않을 갑옷을 입고 있으니 아랫도리가 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네메시스는 저승 세계에서도 에리스와 함께 2대 미녀라고 불리고 있었으니, 그 아름다운 용모와 풍만한 몸매에 취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에리스와 네메시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서 타인을 파멸로 이끄는 저승 세계의 여신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대시를 건다면 그 즉시 저승의 유황불에 내던져질 것이지만.
“일은 어떻게 됐지?”
“이제 제우스가 있는 황금 궁전을 공격하면 끝나요.”
“좋아. 이제 하늘의 옥좌에 앉을 주인이 바뀐다.”
저승신들 중에서 가장 연배가 높은 존재는 에리니에스 자매들 중에서 장녀인 티시포네였다.
에리스와 네메시스는 티시포네의 명령이라면 곧바로 귀를 기울이며 경청했다. 애초에 티시포네를 비롯하여 알렉토와 메가이라가 가진 권능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작용하는 저승의 율법상 에리니에스 자매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 * *
그녀들이 승리를 논하고 있던 그 시각.
황금의 궁전에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황금의 섬광이 아찔하게 빛났다. 타오르는 열기에 에리니에스 자매들이 청동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가리면서 방어했고, 에리스와 네메시스 또한 저마다 병장기를 추켜올리며 섬광의 열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황금 궁전에서 쏟아진 섬광에 망자와 괴물들이 새카만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적어도 수백에 달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소멸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
이윽고 황금 궁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명실상부 최강의 신이라 불리는 제우스였고, 그는 통로를 열고서 뒤늦게 합류한 쿠데타의 주인공을 향해서 번개 아스트로페를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제우스가 내던진 번개를 얻어맞은 피해자는 살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징어 타는 악취가 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젓고 있었다.
“더럽게도 아프네.”
마치 독한 산모기에 쏘인 것마냥 손을 휘저으면서 투덜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우스가 전력을 다해서 내던진 뇌광의 참격.
그것을 맨손으로 받아 내고서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라에가르를 보며 에리스와 네메시스가 열광했다.
“멋져! 멋지세요, 주인님! 주인님이라면 당장 이 에리스의 처녀를 드릴게요!”
“강하잖아! 역시 우리들의 주인님!”
아리따운 여신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라에가르는 제우스가 내던진 번개에 의해 저릿한 아픔이 느껴지는 손바닥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라에가르와 제우스.
드디어 양자 간의 우두머리가 만났다.
라에가르의 옆에는 에키드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제우스는 에키드나를 향해서 번개의 창을 내던진 것이었지만, 라에가르가 그것을 손을 뻗어 막아냈다.
“마, 말도 안 돼!”
“제우스 님의 번개를 한낱 인간이 막아내다니! 이건 악몽이다!”
“분명 무슨 속임수가 분명해. 에키드나, 저 괴물이 수작을 부렸을 거야.”
그 광경에 신족 병사들이 입을 쩍 하고 벌렸다. 티탄족을 비롯하여 기간테스까지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아스트로페를 맨손으로 막아내는 라에가르의 방어력은 이미 상상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의 모습을 목격한 에리스와 네메시스는 사춘기 소녀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복숭아 색으로 물들이며 환희하고 있었고, 에키드나조차도 휘파람을 불며 라에가르의 육체에 감탄했다.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반역을 일으키는 짓이지. 인간에게 뒤통수 맞는 경우는 매번 겪어서 잘 알 텐데.”
라에가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과거 프로메테우스에게 귀띔을 받은 인간에게 속은 것을 시작으로 시시포스라는 인간에게 불륜을 들켜서 찝쩍거리던 여자까지 빼앗겼다. 신들의 왕이라는 자가 한낱 인간에게 넘어간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신계를 다스리는 왕조차도 하계의 주인인 인간에게는 속아 넘어가는 머저리들뿐이다.
라에가르가 말할 때마다 제우스를 따르던 신들이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드러냈다.
“하계의 왕으로서 말한다. 너희 신들은 두 번 다시 하계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하계의 삼라만상은 오로지 나의 영역이자 정원이다. 신 따위가 인간의 일에 개입하지 마라.”
라에가르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노려보자 제우스 주변에 서 있던 신들이 벌벌 떨었다.
상대는 제우스의 아스트로페를 맨손으로 막아낸 인간이다. 애초에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스틱스 강의 가호까지 받으면서 불사신이 되었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죽이고 그 핏물을 뒤집어쓰면서 드래곤의 피에 숨은 짙은 에너지까지 손에 넣었다. 헤라의 모유를 마시며 불사의 가호를 높였으며, 아테나와 아르테미스 그리고 헤스티아 등의 여신들과 몸을 겹치면서 그녀들로부터 가호까지 받았다.
대강 밝혀진 요소들만 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이다. 자세히 나열한다면 끝이 없겠지만, 적어도 제우스의 번개 따위로는 라에가르의 육체를 침범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라에가르에게는 하데스로부터 강탈한 투구가 있었다. 하데스의 빛나는 투구였던 퀴네에까지 머리에 눌러쓰자 그의 몸에 저승의 힘들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데스의 힘까지도 손에 넣었다. 제우스에게도 지지 않는다. 설령 신들의 왕이 그 떨거지들과 함께 동시에 연계를 펼치더라도 이기지 못하겠지.
“한낱 인간 주제에 덤비느냐!”
경쟁의 신 젤로스가 창을 치켜들며 라에가르에게 달려들었다.
폭력의 여신 비아와 남매지간인 그는 제우스가 티탄족과 싸울 때 어머니, 남매들과 함께 제우스의 편을 들었기에 제우스의 근위병 노릇을 하고 있었다.
중갑옷을 걸친 남성이 호기롭게 달려들었으나, 그의 여동생인 비아가 에키드나에게 간단히 패배하였던 것처럼 라에가르의 주먹이 젤로스의 배를 뚫어버렸다.
꾸드드드득!!
신의 육체가 인간의 주먹에 의해 관통되는 모습은 매우 비현실적이었다. 신족들이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 병사도 보였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풀썩 쓰러졌다.
제우스는 침음을 흘렸고, 그를 따르던 신들도 감히 라에가르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 용맹하던 젤로스가 저리도 간단하게 죽었는데, 자신들로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리라.
피칠갑이 된 손을 털어내던 라에가르가 싸늘하게 죽은 젤로스의 시체를 지르밟았다.
“더럽게도 약하네. 이게 무슨 신이람.”
인간이 말했다.
티탄족 출신인 지혜의 신 팔라스와 스틱스 여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네 남매들은 제우스의 첨병을 도맡을 정도로 용맹하고 무예에 능하였는데, 벌써 두 명이나 쓰러졌다.
게다가 라에가르의 전력은 계속해서 증강되고 있었다.
에키드나가 이끄는 대괴수들은 저마다 신족을 포식하고서 배를 채웠지만 아직도 강대한 식욕을 멈출 수는 없었는지 또 다른 고깃덩이를 먹고 싶다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에키드나의 어린 딸인 아가테마저도 피로 물든 손톱을 털어내고 있었다.
“히잉! 피 냄새가 안 지워지면 어떡하지?”
순진무구한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녀는 에키드나의 딸이었다. 당연히 모친을 닮아서 신족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올림포스로부터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지만, 몸속을 흐르고 있는 피가 올림포스를 거부하고 있었다. 살의를 불태우며 신족 병사의 목덜미에 박힌 손톱을 뽑아냈다.
피칠갑이 된 아가테가 방긋 웃으며 라에가르에게 다가왔다.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라에가르가 손을 내밀며 아가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흥흥흥!”
한편 그리스 영웅들은 황금 궁전의 인근에 위치한 주신들의 궁전을 습격하여 점령전을 서두르고 있었다.
약탈은 벌이지 않는다. 어차피 신계의 옥좌를 라에가르가 차지하게 된다면 그 모든 것들을 하계의 왕이 가지게 될 것인데 약탈을 해봐야 의미가 없다.
그리스 영웅들은 대부분 재물에 큰 욕심이 없었다. 부와 재물을 모두 누리다가 죽은 인간들이다. 두 번째 인생에서까지 금은보화를 탐내고 싶진 않았다.
“올림포스는 하계의 왕이 차지한다!”
“우리 헬레네를 위해서라도 우리 오라비들이 힘내야지!”
헬레네의 오라비들인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검을 휘두르며 신족 병사를 베어냈고, 테세우스와 페르세우스가 진격하여 신들의 궁전에 하계의 깃발을 꽂아버렸다.
그를 보며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영웅들과 함께 비전투 계열의 신들을 체포하면서 모두 포로로 잡았다. 특히 여색을 밝히는 라에가르에게 바쳐질 눈부신 용모를 가진 미녀들은 제1 순위 대상이었고, 그 때문에 여신들의 신병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궁전을 함락시키고 신들을 포로로 잡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영웅들과는 달리 오로지 살의를 위해서 움직이는 영웅도 있었다.
사냥꾼의 날렵한 발걸음으로 궁전의 담벼락을 넘나들던 여성 영웅은 바로 아탈란테였다.
날카로운 화살을 활에 걸어놓고서 움직였고, 날렵한 맹수와도 같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신족 병사들은 저마다 화살 밥이 되어 쓰러졌다. 그 누구도 아름다운 짐승의 질주는 막지 못했다.
‘아프로디테!’
아탈란테는 자신의 인생을 파멸시킨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에게 그 누구보다 잔혹한 벌을 내리기 위해서 발을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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