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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1)화 (1/135)

1화

“내가 이걸 왜 입어야 돼?!”

율리키안은 치렁치렁 긴 가발과 드레스를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불운했다고는 하나 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대공 율리키안 쿤 론데네스에게 여장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매디는 시큰둥한 얼굴로 율리키안을 훑어봤다.

그녀는 입고 있던 얇은 셔츠와 바지 위에 하녀들이 입는 메이드복을 마구잡이로 걸치며 대답했다.

“아, 그럼 입지 말고 가는 길에 ‘나 잡아가쇼’ 하시든가!”

“이런 변장까지 해야 돼?”

“몇 번 말해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니까. 일단 대공 전하는 수도를 벗어나는 것부터가 문제야. 그 화려한 은발을 어쩔 거야.”

“……하.”

대공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고 가발을 뒤집어썼다.

나풀대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까지 입고 나니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매디가 곧장 다가와 메이드복 안쪽에 입은 바지 밑단을 뒤집어 빗을 꺼내 들었다.

“만물상이라도 되나? 너한테선 온갖 것들이 다 나오는군.”

“궁금하면 옷 벗겨 보세요.”

“넌 대체……! 하, 됐다, 됐어.”

납득이 안 가는 헛소리에 율리키안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

매디의 주둥아리는 가끔 저렇게 끝 간 데 없이 날뛰곤 했다.

‘……괜히 결혼했나.’

율리키안의 속도 모르고 매디는 재빠르게 긴 가발을 빗겨 주고 머리카락을 얇게 땋아 반으로 묶었다.

“우와. 정말 귀한 집 아가씨 같아요.”

그녀의 말에 희망을 얻고 거울을 본 율리키안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미쳤어? 누가 봐도 여장한 건장한 성인 남자잖아!”

“겉으로 보이는 거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으로 보세요. 저기 거울 속 아름다운 아가씨가 보이지 않으신가요?”

율리키안은 이마를 짚고 휘청거렸다.

“이 또라이 같은 게…….”

“쉿.”

방 바깥 복도에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디는 얼른 방 안의 불을 꺼 버렸다.

발소리가 멀어진 후 매디는 재빠르게 움직여 바닥에 널브러진 짐 가방에서 어두운 색 숄을 집어 들었다.

저렴한 여관이라 창으로 달빛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매디는 어둠에 익숙한 듯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었다.

율리키안의 광활한 어깨를 숄로 덮은 매디는 스카프로 그의 목을 묶어 목젖도 가렸다.

매디는 율리키안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한테는 금쪽같은 조카 목숨이 걸려 있고, 나한텐 피 같은 10억이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그만 칭얼대고 당장 따라나서요. 갈 길 머니까.”

“……정말 찾을 수 있는 거야?”

매디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자기. 나 매디야.”

어쩐지 믿음직스러웠다.

그때 창밖 멀리서 미세하게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진동이 느껴졌다.

율리키안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커다란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매디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매디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댄 후 조심스럽게 가방을 챙겼다.

그들은 재빨리 여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에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20대 중반의 은발 남성과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여자를 목격한 적이 있나?”

목 바로 아래에 들어온 예리한 칼날에 여관 주인은 바들바들 떨며 답했다.

“모, 모릅니다! 정말로 본 적 없어요!”

“특이하거나 낯선 손님이 찾아온 적도 없나?”

“여관이야 당연히 늘 낯선 손님들이 오지요. ……아. 그러고 보니 꼭 도망 나온 것 같은 귀족 아가씨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가씨? 갈색 머리였나?”

“아니요? 나갈 때 보니까 금발이던데.”

추격대들은 쓸모없는 정보를 들었다며 다른 경로를 뒤져 보자고 했지만 리더 ‘람다’의 생각은 달랐다.

“변장을 한 거야.”

람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여관을 빠져나오자마자 제가 타고 온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커다란 말은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하고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젠장, 젠장!”

람다가 주먹을 움켜쥐자 가죽 장갑에서 빠드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분해서 벌게진 얼굴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람다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매디, 조금만 기다려.”

람다는 뒤처져 이제야 도착한 추격대 부하의 목을 베고 그의 말을 뺏어 올라탔다.

“기차역으로 간다! 따라와!”

그의 과격한 행동과 독선에도 부하들은 반항 한번 하지 못했다.

추격대의 말발굽 소리가 다시 땅을 울렸다.

그 시각, 매디와 율리키안은 추격대를 따돌리고 마차 두 번을 갈아탄 뒤, 기차에 올라탄 이후였다.

이번엔 멀끔한 신사로 변신한 매디는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는 다리를 꼬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여유롭게 신문까지 펼쳐 읽었다.

율리키안은 여전히 금발에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타고난 덩치를 가리려 등을 굽혀 봤지만 3등석이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걸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율리키안은 제 낮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매디에게 바짝 붙어 이를 악문 채 복화술을 하듯 물었다.

“……넌 남장을 하는데 난 왜 계속 이 꼴이야?”

“우리 여보는 머리 색이 눈에 띄잖아요.”

“그 망할 여보 소리……!”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일 뻔한 율리키안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매디는 말없이 신문 1면을 펼쳐 율리키안에게 보여 줬다.

신분 차를 뛰어넘은 론데네스 대공의 결혼식

율리키안 쿤 론데네스 대공은 몇 달 전 빈민가 출신의 여자와 핑크빛 열애를 밝힌 바 있다.

……(중략)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론데네스 대공은 결국 빈민촌 여자와 호화스러운 야외 결혼식을 치렀다.

어제부로 대공비가 된 ‘매디’는 결혼식에서 피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됐다.

(사진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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