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율리키안은 어색하게 매디에게 다치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매디가 익숙하다는 듯 율리키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크록턴 앞으로 가 섰다.
“크록턴, 이쪽은 매디. 알고 있겠지만 내가 청혼한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매디입니다.”
“……반갑습니다. 크록턴 바이닐입니다.”
매디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절하는 방법을 어디서 배웠지? 하는 의문이 율리키안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매디, 여기는 크록턴 바이닐.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 앞으로 두 사람이 자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크록턴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냉소적으로 매디를 바라봤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주제를 안다면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텐데.”
매디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어머. 진짜 친구라면서 진정한 사랑을 너무 무시하시네. 우정이 사랑보다 진하나? 경은 우리 전하랑 키스할 수 있어요? 난 했는데.”
“매디! 무슨 그런 말을 해!”
율리키안이 귓불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펄쩍 뛰었다.
크록턴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매디라고 했나. 확실히 보고 자란 게 없어서 그런가 보네. 하녀한테 귀띔으로 들은 예절 교육으론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게요. 저도 멀쩡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면 칼 몇 번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기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기사가 아무나 되는 거라도 되는 양 말하는군?”
“그거 그냥 검 좀 적당히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매디가 순식간에 크록턴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내 그의 목을 겨눴다.
말리거나 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경악한 율리키안과 크록턴 사이에서 매디의 목소리에만 웃음기가 서렸다.
“간단하네.”
“매디!”
뒤늦게 율리키안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매디는 검을 내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의 끝은 여전히 크록턴의 목 한가운데를 노리고 있었다.
크록턴은 주먹을 꾹 말아 쥔 채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둑질을 업으로 삼았다더니 손이 여간 빠른 게 아니군. 그래서 이젠 대공비 자리까지 도둑질하려고 하나?”
“주인이 없는 자리에 가 앉는 게 도둑질인가요?”
“그만해. 매디,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율리키안이 언성을 높이며 매디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 내려놔.”
“힝. 자기는 나한테만 뭐라고 하네. 저 사람이 저한테 먼저 못된 말 했는데요.”
“검 내려놓고 나랑 얘기 좀 해.”
“어머. 밤새 같이 있어 놓고 뭘 또 둘이서 얘기를 하재. 대공님은 못 말려, 진짜. 매디 허리 빠그러져용.”
“좀! 조용히 하고 따라와! 크록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율리키안은 매디의 손에서 검을 빼내 크록턴에게 돌려준 후 그녀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크록턴은 제 손에 들린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에서 빼내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검이 빠져나가는 감각조차 느낄 새도 없었다.
매디는 단순한 소매치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만약 율리키안이 정말로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면,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면 곤란했다.
크록턴은 검집에 검을 넣으며 긴장하고 있던 몸의 힘을 풀었다.
매디라는 저 여자가 만약 율리키안에게 고용된 호위라면 이야기가 더욱 심각했다.
힘은 아직 확인 못 했지만 저 정도 속도라면 적어도 크록턴이 속한 기사단 안에서는 그녀와 견줄 자가 없는 듯했다.
저 여자 때문에 앞으로 그분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만들 순 없었다.
“차라리 진짜 사랑에 빠지지 그랬나, 이 친구야…….”
크록턴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이야기를 하인에게 남기고 매디와 율리키안이 돌아오기 전 저택을 빠져나갔다.
오랜 벗이지만 그는 오래 살아서는 안 되는 운명이었다. 존재 자체가 황위의 위협이다.
크록턴은 대책을 세우기 위해 급히 말을 달렸다.
* * *
율리키안은 매디를 끌고 후원 구석까지 걸어갔다.
등나무 줄기가 얼기설기 얽혀 내려온 파고라 아래로 들어선 율리키안이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걸어오는 내내 잡혀 있던 손목을 대차게 뿌리친 매디가 시큰둥한 눈빛으로 율리키안을 올려다봤다.
“근처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말하세요.”
“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 친구라고 했잖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선 몰라도 크록턴 앞에서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게 굴 순 없어?”
매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친구 집 오는데 검을 차고 오나?”
“그는 기사야. 쓸데없는 걸로 오해하지 마.”
“기사단에 있는 기사가 새벽 훈련도 받지 않고 여길 찾아온다고요? 단복도 안 입었는데 칼은 차고? 말이 되는 소릴 해. 순진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율리키안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크록턴 바이닐은 어린 시절부터 거의 평생을 함께한 친구였다.
모든 이가 제게 칼을 겨누는 이 세상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매도하다니.
율리키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날 선 말이 튀어 나갔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너처럼 남을 속이면서 살진 않아.”
아차 싶었다.
이렇게 일부러 상처를 주는 듯한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좋든 싫든 치부를 공개했으니 3년은 같이 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매디는 그다지 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눈만 아주 약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야. 아파라.”
매디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씩 올라갔다.
“돈 제때 주면 거짓말 안 하지. 특별 수당 아직도 안 줬잖아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이젠 말을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이 여자에겐 그저 모든 게 돈일 뿐이었다.
율리키안은 입을 꾹 다문 채 코트에 달려 있던 금장식을 뚝 떼어 냈다.
말없이 내밀자 매디가 그것을 받아 들어 본인의 가슴팍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여전히 태연했다.
“당신 말이 맞아. 난 거짓말투성이에요.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진실이겠네. 그죠?”
율리키안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매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특별 수당 받았으니까 이제 친구 믿을게요. 얘기 끝났으면 돌아가요.”
매디가 먼저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파고라의 그늘에서 벗어난 매디는 성큼성큼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
“……매디.”
율리키안의 부름에 매디가 멈춰 섰다.
그녀는 왈츠라도 추듯 빙그르르 뒤돌았다.
마침 아침 해가 그녀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사랑에 빠진 척했던, 빈민촌 한가운데에서처럼 매디는 환하게 웃었다.
햇빛 아래에 선 매디는 해맑고, 산뜻하고, 명랑했다.
율리키안과는 달리.
“왜 불러요?”
세상 아무런 걱정도 불안도 없어 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던 다른 남자의 존재가 떠올랐다.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율리키안의 입에서 또다시 속마음과 다른 모난 말이 튀어 나갔다.
“……네 사생활이나 정리해. 여러 말 나오게 하지 말고.”
“음, 글쎄. 내 사생활 정리도 계약서에 있었나요? 평소처럼 쓰레기처럼 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네가 대공비로 3년 살아야 될 거 아니야. 정부를 두든 말든 상관없는데 남한테 들키지 말라고. ……정리해.”
매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율리키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가 매디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나랑 한 계약. 들키면 다 끝장인 거 몰라?”
어젯밤에 집무실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눴던 이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싸늘한 눈으로 비소를 터뜨렸다.
“끝장나는 건 너지, 내가 아니에요. 난 여태 살던 것처럼 도망가면 그뿐이니까. 너 지키느라 내가 지금 얼굴 팔려 가면서 여기 있잖아.”
“……웃기지 마. 내가 아니라 돈이겠지. 넌 돈밖에 모르니까.”
“하하, 아이고, 또 정곡 찌르네. 아파라.”
독설을 들은 사람답지 않게 매디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여전히 날이 서 있는 율리키안의 눈매에도 매디는 기죽지 않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 예비 여보가 돈 더 주면 싹 다 정리하는 걸로. 나 원래 돈 많이 주면 뭐든 하잖아, 안 그래요?”
“……잠깐만. 싹 다? 한 놈이 아니란 거야? 그, 오렌지빛 도는 갈색 머리 남자 말고 또 있어?”
“아, 걔?”
“‘아, 걔?’ 되게 잘 아는 사이인가 보네.”
“으이구. 자기는 바보야.”
매디가 율리키안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고 윙크를 한 뒤 빠르게 걸어갔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그리고 내가 왜 바보야?!”
매디는 저택 후원 입구 그늘 아래까지 달려가 선 뒤 검지를 세워 입술을 가리켰다.
조용히 하란 뜻이었다.
매디의 손가락이 그대로 옆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저 멀리서 후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들이 보였다.
율리키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쥔 채 올라오는 감정을 겨우 갈무리했다.
“자기는 정말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야! 난 몰라!”
매디는 약이라도 올리듯 말을 덧붙이고 평소보다 배는 느린 뜀박질로 저택으로 들어갔다.
몇 초간 심호흡을 하며 혼자 화를 삭인 율리키안이 뒤늦게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크록턴도 이미 가 버렸고, 매디도 마차 없이 말을 몰아 대공저 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를 집사에게 전해 들었다.
“……그럴 줄 알았어! 말 탈 수 있었잖아!”
또 거짓말.
이런 미친 여자 같으니라고.
그제야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매디를 만나고 청혼까지 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 * *
녹스의 집으로 들이닥친 매디는 찬장을 열었다가 술이 안 보이자 자고 있던 녹스의 엉덩이를 발로 차 깨웠다.
“야. 술 어디 숨겼어?”
“아, 깜짝이야! 왜 남의 집의 문을 따고 들어와요?! 몇 시야, 지금? 아이 씨. 방금 해 떴잖아!”
소리를 꽥꽥 지르는 녹스의 등짝을 발로 퍽퍽 차며 매디는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술 어디 있냐고?”
“마셔도 안 취하면서 왜 마시는 거야, 진짜! 아이 씨. 아. 아직 3일 되지도 않았는데 괜히 와 가지고.”
녹스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 방구석의 상자 안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왔다.
잔도 없이 내밀자 매디는 익숙한 듯 이로 뚜껑을 따고 구석에 뱉어 버렸다.
녹스가 아끼던 술이 또다시 매디의 목구멍으로 쏟아지듯 들어갔다.
녹스는 침대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싸맸다.
“누님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나 이해가 안 되네.”
독주를 물처럼 한껏 들이마시고서야 매디가 속이 개운하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더니 환하게 웃었다.
“야, 나 그거 했다!”
“뭐요.”
“사랑싸움!”
“으. 아, 진짜 듣기 싫어. 나가요.”
“진짜야! 와, 대박 진짜 같았어. 네가 내 남자 친구인 줄 알고 대공이 질투하는 것처럼 막 쏘아붙이더라. 나 그런 거 처음 봤어! 진짜 이상하더라, 기분!”
“아. 결혼할 사이라면서! 그러니까 질투를 하지, 뭘 질투하는 것처럼이야! 아침부터 짜증 나게 왜 이래, 남의 집에서!”
“아. 맞아. 어, 질투. 그러네. 왜 질투를 하지? ……걔가 친구가 없어서 그래. 네가 이해해라.”
“지는 친구 있는 것처럼 말하네. 악!”
녹스의 오금을 발로 찬 매디가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녹스가 아끼고 사랑하던 위스키가 이젠 반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그래서 나 그냥 동생인 거 말했어요?”
“아니.”
“어?! 왜 말을 안 해, 이 미친 여자야!”
“너랑 피가 안 섞였잖아! 욕하지 마. 개새끼야!”
“아! 오해하셨을 거 아니에요! 아! 아, 매디 진짜 싫어! 아, 누님 진짜 최악이에요! 아! 짜증 나, 진짜!”
녹스는 발을 쾅쾅 구르며 머리를 침대에 처박았다.
매디가 천진난만하게도 “와, 나 질투하는 사람 그렇게 가까이서 처음 봤어!”라고 떠드는 꼴을 보아하니 복장이 뒤집어졌다.
대공은 아마 녹스를 내연남으로 오해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