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매디가 샬로메에게 뺨을 맞기 10분 전.
율리키안은 도둑 키스를 한 매디를 쫓아 후원으로 나갔다가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어딜 간 거야…….”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평소보다 훨씬 달뜬 숨을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남들 앞에서 하는 스킨십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첩자가 찾아왔을 때 서로를 끌어안으며 뜨겁게 키스한 적도 있으니까.
그런데 다짜고짜 다가와서, 그것도 저를 그렇게 넘어뜨리고서 입을 맞춰 올 줄은 몰랐다.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 앞에서 그런 우스운 꼴을 보이다니.
물론 여자 하나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숙맥처럼 보일수록 왕재(王才)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마음이 수런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율리키안은 휑한 후원에서 누가 들을 리도 없는 말을 뱉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말은 하고 해야지!”
아무리 상호 합의하에 전 국민을 상대로 치는 사기라고는 하지만 방금 전은 마치 진짜처럼…….
율리키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론 입술을 맞대는 건 자제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불필요한 접촉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때, 어딘가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율리키안을 잡아당겼다.
“윽!”
짧은 신음과 함께 창고로 끌려 들어간 율리키안은 곧바로 검을 꺼내려 했다.
그러다 저를 잡아당긴 이가 매디인 것을 알고는 금세 손을 거두었다.
매디는 바깥의 동태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내가 나가서 저 깜찍한 어린 친구 약을 좀 올릴게요. 이때다 싶을 때 전하가 나서서 내 편 들어 줘요. 왕자님처럼. 알았죠?”
가슴이 닿는 거리였다.
심장 박동이 들릴까 두려울 정도로 가까웠다.
매디의 머리카락이 턱을 간질였고, 그녀의 단단한 몸이 제 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응.”
또 바보처럼 매디의 말에 순순히 대답해 버렸다.
매디는 율리키안의 답을 듣자마자 곧장 다시 본관으로 돌아갔다.
창고에 혼자 남은 율리키안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 날 변심한 매디가 저를 죽이려 한다면 분명 손 하나 까딱 못 하고 그대로 죽고 말 것이라고.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녀임을 확인하자마자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 버렸으니.
매디는 괜찮아.
라고 생각해 버린 스스로를 뒤늦게 질타해 봤지만 별수 없었다.
율리키안은 얌전히 기다리다 매디의 말을 그대로 이행했다.
……이럴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해서인지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매디가 영애를 때리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기절한 바톨로즈 샬로메를 들어 옮기는 그쪽 가문 하인들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오늘 일은 분명 바톨로즈 백작 귀에도 들어갈 것이고, 황제도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율리키안은 매디를 방에 데리고 들어온 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톨로즈 영애를 때린 거야?”
“결투 신청을 했고 그 영애가 수락했어요. 문제될 건 없잖아요?”
“그들은 무슨 일이든 트집을 잡아! 평민인 네가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기사들은 위아래 없이 결투 신청하고 그러던데 나는 왜 안 돼?”
“네가 기사야? 그러다 너 죽으면?!”
“예?”
손톱 끄트머리를 매만지던 매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가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율리키안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곤 재빨리 문장의 뒷부분을 추가했다.
“네가 죽으면 이 작전이 모두 허사가 되잖아.”
“아, 아아. 그렇죠.”
“죽으려고 작정했어? 귀족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죽으면 어떻게 결혼을 하고, 어떻게 날 지킬 건데? 돈 안 받을 거야?”
“돈 받으려고 이 짓 하는 건데 죽으면 안 되죠.”
“그럼 왜 그랬냐고! 네가 지금 얼마나 일을 크게 키웠는지 모르겠어?”
“그럼 자기가 수습해 봐요.”
“뭐?”
“자기가 바톨로즈 영애한테 가서 같이 무도회 가자고 해 보라고요.”
“……무슨 뜻이야?”
“황궁 무도회에 오라는 건 폐하의 명이니 거절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율리키안은 저도 모르 제 입술을 매만지다 매디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는 내가 그 영애와 무도회에 가도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황제 폐하 명이라는데.”
“너는…… 내 약혼녀잖아. 일단 공식적으로 그렇게 밝혔으니까.”
“무도회에서 걔랑 결혼하고 올 건 아니잖아요. 자기가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기만 하면 되지. 아니다. 사지 안 멀쩡해도 결혼할 수는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매디는 멋진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깔깔 웃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매디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속이 좁아지다 못해 갑갑해 터질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자꾸만 옹졸해지는지.
율리키안은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톨로즈 영애한테 가요?”
아무런 의도도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율리키안은 차가운 눈동자로 매디를 보며 대답했다.
“……황제께 말할 거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라고.”
“오, 멋진데.”
“그러니 그 영애와 무도회에 갈 순 없다고.”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자기!”
손을 짤짤 흔들던 매디가 갑자기 잊었던 게 생각난 듯 박수를 짝 하고 쳤다.
“근데 나를 사랑하는 자기야. 혹시 비밀 있어요?”
“비밀이라니?”
“숨겨 둔 애인 없어요? 미리 알아 두면 좋을 텐데. 혹시 나중에 밝혀지면 수습하기 골 때리니까 준비를 좀 해 놓자고.”
율리키안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없어, 그딴 거.”
“흐음……. 알았어요! 살아서 돌아와요! 우리 잔금 남았잖아!”
매디는 다시 방긋거리며 손을 흔들었고, 율리키안은 무표정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마차에 올라서는 와중에도 매디의 미소가 자꾸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늘 똑같이 웃는 해맑은 그 얼굴이.
야속하리만치 무미건조한 미소가 미웠다.
* * *
“3번 말 빠삐용 1등! 그다음으로 렉스가 2등으로 들어오고, 간발의 차로 존라드가 3등을 차지합니다!”
“와아아악! 제기랄!”
“젠장, 내 돈! 으아악!”
돈을 잃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빠삐용이 1등이라고?! 그게 말이 돼?”
최근 몇 달간 경기 성적이 좋지 않았던 빠삐용이 1등을 할 거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대부분은 휴지 조각이 된 표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신사를 빼고는.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검은 머리칼을 한 번 매만진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의 1등 경주마 빠삐용에게 판돈을 거신 분은 무려 서른 배의 배당금을 가져갑니다!”
몬테네쟌도 백작은 1, 2, 3등 중 단 한 마리도 맞추지 못한 마권을 구겨 버렸다.
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신사는 금색 독수리가 조각된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갔다.
백작은 질투심과 은근한 호기심에 그를 뒤따라갔다.
입은 옷이나 당당히 걷는 걸음걸이로 봐선 타국의 장교 같았다.
당당하게 라운지로 가 마권을 보여 준 그는 언뜻 보기에도 두꺼운 지폐 다발을 챙겨 들었다.
“……축하하네. 말을 고르는 재주가 꽤 있나 보군.”
몬테네쟌도 백작이 먼저 말을 걸었다.
신사는 눈썹을 으쓱 올렸다 내리며 빙그레 웃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럼.”
잘생긴 신사가 빠져나간 뒤 몬테네쟌도 백작은 다음 경기에도 돈을 걸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오늘은 단 1보링도 따지 못했다.
오늘따라 재수가 없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다.
연이어 일주일을 내리 잃기 전까지만 해도.
비상금이 모두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쩌다 한 번 2등 말을 맞춰도 그다음 번엔 모조리 틀리고, 배당률을 낮춰 안전하게 돈을 걸면 아주 약간 땄다가, 자신감을 얻고 왕창 돈을 걸면 또 우르르 잃기를 반복했다.
이런 짜릿함이 도박의 재미라고는 하지만 손에 쥔 돈이 점점 줄어드는 걸 보고 있자니 마냥 즐길 수가 없었다.
몬테네쟌도 백작은 이를 갈며 다음 경기에 사활을 걸기로 했다.
이번 판에는 다음 달 생활비의 반절이 걸려 있었다.
매표소로 향하던 그때, 낯익은 젊은 신사와 마주쳤다.
며칠 내내 연이어 돈을 땄던 그 외국 장교였다.
둘은 짧게 눈인사를 나눴다.
백작은 집에서 챙겨 온 돈주머니를 꺼내 들고 매표소 직원에게 말했다.
“1, 2, 3등 세 마리를 맞추는 복연승으로…… 로테, 블랙, 크리스마스.”
“네.”
매표소 직원이 마권에 기록하려는 찰나, 사내가 몬테네쟌도 백작의 뒤에서 아주 작게 속삭였다.
“블랙과 크리스마스는 오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둘을 빼고 니켈과 벤자민으로 하시죠.”
“흥, 웃기는 소리! 말을 볼 줄도 모르면서!”
취미긴 하지만 경마장에 다닌 것만 대략 10여 년이다.
큰돈을 딴 적도 몇 번 있었다.
요즘은 정말, 단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몬테네쟌도 백작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젊은 신사는 몬테네쟌도 백작의 심술궂은 대답에도 개의치 않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백작이 물러나자 그가 이어 표를 샀다.
“1, 2, 3등을 순서대로 맞추는 삼쌍승으로 한 장 부탁드리죠. 니켈, 벤자민, 로테 순서로.”
두 사람은 나란히 경마장으로 올라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결과는 소름 돋게도 젊은 신사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블랙은 출발부터 늦었고, 내내 잘 달리던 크리스마스는 후반부터 뒤처지더니 6등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제기랄! 젠장! 젠장! 젠장!”
백작은 마권을 북북 찢어 버리고 홧김에 젊은 신사에게 물었다.
“승부 조작이라도 한 거 아니요?”
“무슨 말씀을. 전에도 말씀드렸듯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까 내게 말을 바꾸라고 조언하지 않았소?! 미리 알고 있던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 딱 맞출 수가 있어!”
신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몬테네쟌도 백작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저는 평소에 많은 경기를 즐겨 볼 뿐입니다. 승자를 골라내는 것에 익숙하지요.”
말을 마친 신사는 점잖은 미소로 백작의 어깨 위 먼지를 털어 주고 경마장을 빠져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백작은 그가 두고 간 자리에 남은 1등, 2등, 3등을 모두 맞춘 마권을 뒤늦게 발견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인파 틈으로 사라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마권을 잃어버린 줄 알면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기다렸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작은 손아귀에 묻어 나오는 땀을 바지에 문지르며 고민했다.
내 돈으로 산 게 아닌데. 이걸 교환해도 되나?
이건 도둑질이 아닌가.
하지만 고민하면서도 발걸음은 점점 라운지의 매표소로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돈으로 바꾸지 못할 게 뻔했다.
무용지물이 되느니 이 돈을 찾아 뒀다가 그를 내일 다시 만나면 돌려주는 게 합당한 일이었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다.
그저 돈을 잠시 맡아 두는 것뿐.
백작은 그리 생각하며 매표소에서 마권을 돈으로 교환했다.
엄청난 돈이 손안에 들어왔다.
심장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뛰고 있는 것처럼 덜덜 떨려 왔다.
몬테네쟌도 백작은 도망치듯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