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42)화 (42/135)

42화

러비디아가 살아 있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율리키안의 환상이 아니었다.

율리키안은 얼빠진 얼굴로 마차를 가로막고 서 있는 여자의 행색을 살폈다.

궁핍하게 살았는지 옷도 해지고 신발도 낡아 있었다.

그래도 단정했다. 흐트러지지 않은 옷매무새에서 차분한 성품이 보였다.

율리키안은 마부에게 잠깐 자리를 비키라 명령했다.

마부는 제 주인과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여자와 아이를 잠깐 힐긋거리긴 했지만 얼른 물러났다.

한적한 거리에 남은 러비디아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율리키안 역시 홀린 듯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어렸을 때 누가 돌봐 줬는지, 언제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지.

말해 주고 싶은 것도 많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우리가 함께 살았던 저택은 크게 바뀐 것이 없다고, 네가 나간 후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고,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네가 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러비디아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율리키안에게 아이를 떠밀 뿐이었다.

아이의 등을 떠밀며 율리키안의 손에 편지를 쥐여 준 러비디아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러비디아? 잠깐만. 어디 가. 어디, 지금은 어디서 지내는데? 남편이 죽었다니. 무슨 소리야? 러비디아!”

율리키안은 제 손에 쥐인 편지와 러비디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러비디아는 도망치듯 뒤돌아 달려갔다.

고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지고, 어깨를 덮었던 숄이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정신없이.

어느새 거리엔 율리키안과 여태 있는지도 몰랐던 조카만 남았다.

<아스트리드를 지켜 줘.>

편지 마지막 줄에 적힌 말이 러비디아의 유언이었다.

율리키안은 누가 볼세라 아스트리드를 안아 들어 마차에 태웠다.

“아스트리드?”

아이의 작은 머리가 조금 움직였다.

그게 다였다.

아이는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집이 어디인지, 엄마는 왜 너를 내게 맡기고 도망갔는지.

아무리 물어도 아스트리드는 고갯짓도 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를 저택 안으로 조용히 들인 뒤 집사장을 불렀다.

러비디아가 이 집에서 살던 때부터 일했던 사람은 이제 그뿐이었다.

집사장은 갑자기 나타난 아스트리드를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단번에 알아봤다. 안경 너머 필립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러비디아 아가씨께서 무사하셨군요.]

[아이를 씻기고 돌봐 줘. 밖에 알려져선 안 돼. 러비디아가 지켜 달라고 했으니까.]

[3층 끝 방을 치우겠습니다.]

[필립, 하녀들에게도 알리면 안 돼. 적어도 러비디아를 찾아서 데려오기 전까진.]

[명심하겠습니다.]

필립은 며칠간 혼자 아스트리드를 보살폈다.

아스트리드는 울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밥은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율리키안은 수소문 끝에 러비디아의 집을 찾아냈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뒤였다.

강도가 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비디아가 살던 곳은 빈민가 중에서도 도시 외곽의, 작고 허름한 오두막에 불과했다.

누가 봐도 다 쓰러져 가는 집인데 돈을 노린 강도가 들 리가 없었다.

크록턴과 함께 찾아갔던 러비디아의 집에서 율리키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싸늘해진 동생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두 팔과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주고 있었지만 딱딱하게 굳어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러비……. 러비?”

피가 말라붙은 복부 위에 손을 올리고 동생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아, 참. 너 어렸을 때 크게 아픈 뒤로 말을 못 했지. 그럼, 그럼…… 손바닥 위에 써 볼래? 러비, 내 손 위에…….”

율리키안은 러비디아의 손을 잡은 채 웅얼거렸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말 인형이 무슨 색이었는지 적어 봐. 우리가, 매일 서로 안고 자겠다고 싸웠잖아. 그거……. 우리, 그, 저기, 아니면 네가 지내던 방 벽지 색이라도……. 이렇게 또 사라지면 나는 또 꿈인 줄 알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러비디아. 네가, 네가…… 몇 년 만에 나타나서, 다시…… 이렇게 가는 게. 말도 안 되잖아. 너무, 비현실적이라 믿을 수가 없어. 러비디아.”

러비디아는 제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율리키안을 찾아와 아스트리드만 맡긴 뒤 쫓기듯 사라진 것이다.

혼자 죽으려고.

애라도 살리려고.

율리키안은 차갑게 식은 러비디아의 손을 잡았다.

울음이 밖으로 터지지 않고 목구멍 안에서 뭉개졌다.

“흐, 윽, 으윽……. 윽.”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구별하기 힘든 소리였다.

몇 시간이 흘렀다.

율리키안은 감지도 못한 러비디아의 눈을 손수 감겨 준 뒤, 동생의 얼굴 위로 하얀 손수건을 덮어 주었다.

장례는 조용히 치렀다.

장례식에는 율리키안과 아스트리드, 크록턴, 집사장 필립만 참여했다.

러비디아는 율리키안의 동생으로 죽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 곁에 누이지도 못했다.

그렇게 고즈넉한 산속에서 동생을 보냈다.

아스트리드는 묘비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잃은 아이는 울지 않았다.

율리키안은 저를 똑 닮은 조카의 동그란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돌아오는 길에 마차는 둘로 나뉘었다.

율리키안은 크록턴과 함께, 아스트리드와 필립은 다른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보안의 문제도 있었지만 실은 아스트리드의 새파란 눈동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율리키안은 러비디아의 어린 시절을 똑 닮은 아스트리드를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율리키안에게 아스트리드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 자체였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내내 말이 없던 율리키안이 조용히 읊조렸다.

“왜 내가 아니라 동생이지? 살아 있는지조차 몰랐던 동생을 왜?”

“이상하긴 해. 노릴 거라면 지금 대공 작위를 갖고 있는 널 노렸어야지.”

“아.”

율리키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그래서였군. 아아, 알겠다.”

“왜 그래.”

율리키안은 눈물까지 흘리며 소리 내 웃다가 조용히 웃음을 거뒀다.

“어머니에 대해 조사했어. 정확히는 어머니가 죽은 원인에 대해서.”

“……그래도, 왜 하필 네가 아니라 러비디아인지…….”

율리키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차기 군주를 잃었다는 기사가 온 신문을 도배했잖아. 이 나라 전체가 슬퍼했어.”

“그랬지.”

“……작은아버지는 황태자를 죽여야만 황좌에 오를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아버지를 죽인 거야. 하지만 지금은 굳이 스캔들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거지. ……내가 설치지 않는 이상은.”

크록턴은 한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 역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억울함을 느끼는 듯했다.

율리키안은 침음을 흘린 후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나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귀족들이 더욱더 날을 세우고 나를 추켜세우고 있는 이 상황에선 더더욱.”

“그럼 네 말은 네게 경고하기 위해 일부러 러비디아를 찾아 죽였다는 거야?”

율리키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크록턴, 내 동생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 그러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는 이가 없지. ……참 똑똑하시지. 내 가족을 모두 죽이면 내가 멈출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멈출 거라고.”

율리키안의 입에선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웃다가 맺힌 눈물이 차게 식어 말라 버릴 때까지 율리키안은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크록턴. 네가 아스트리드를 돌봐 줘.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숨겨. 저 아이는 살아남아야 해.”

“잠깐만. 율리키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조사는? 조금 더 하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내 동생이 남긴 애야. 쟤까지, 내게 날리는 경고장이 되도록……, 고작 그런 식으로 죽게 둘 순 없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 쓸 새 없이 떠나 버렸다.

숨어 살던 러비디아마저 이젠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아직 아스트리드라는 작은 빛이 남아 있었다.

율리키안은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며 결심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스트리드를 지켜 내겠다고.

제 어미가 살아 보지 못했던 날들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믿을 만한 보모를 구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아스트리드가 세상에 알려지면 안 돼.”

율리키안의 비장한 목소리에 크록턴 역시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진중하게 답했다.

“맡겨 둬. 율리키안. 반드시 아스트리드를 보호할 테니까.”

그날 이후로 아스트리드는 크록턴이 보낸 보모와 살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꽁꽁 숨겨 놓으면 안전할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황제 측 첩자에게 아이를 직접 맡겨 놓고 안심하다니.

안일하고, 멍청했다.

아스트리드는 외딴집으로 가끔 찾아오는 율리키안을 물끄러미 보긴 했지만 티 나게 반가운 척을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 아이인 것을 여태 모르고.

아스트리드는 자랐는데, 율리키안만 그대로였다.

“캬학학학학학! 악! 웩! 으웩! 아, 너무 웃어서 토할 것 같아!”

“아, 토하지 말라고! 나가!”

귀가 떨어져 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스트리드는 눈꺼풀을 질끈 감으면서도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웃고 또 웃었다.

율리키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무력한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년 전 그날과 같은 동작이었지만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매디, 얘기 좀 하지.”

“와학학학! 녹스 저 모자란 새끼! 또 넘어졌어! 아! 너 때문에 애기한테 또 뺨 맞았잖아!”

“지가 욕해서 맞아 놓고 누굴 탓해! 이 쓰레기야! 아! 아스트리드, 나는 할 말을 한 거야!”

“너 왜 우리 아스트랄, 아슽, 아스타, 아 쓰바. 너 이름이 왜 이렇게 어렵니. 아야. 그래. 이번은 때릴 만했어. 미안해.”

“아스트리드, 이리 와. 저 아줌마 인성 글러 먹었지? 이제부터 우리도 저 아줌마 매디 말고 망둥이라고 부르자.”

“매디. 얘기 좀 하자고. 어디 조용한 곳…….”

“누구더러 망둥이래. 주둥이만 한 바가지인 새끼가.”

“지는 뭐 입술 되게 작고 예쁜가 보다.”

“야. 나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 아냐.”

“인성으로 따지면 누님은 구렁텅이에 빠져야 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얼굴이 뭐가 중요해. 제대로 된 남자 친구도 한 번 없었던 게.”

“하! 연애라고는 사기 칠 때 말고는 안 해 본 게 누구더러 뭐라 그래.”

“와, 나는 그래도 좋은 감정으로 몇 번 만난 사람 있기는 했거든요? 내가 누님인 줄 알아요?”

“이봐. 조용히 좀. 그, 매디랑 얘기 좀 하게…….”

“녹스. 죽고 싶은 거지?”

“와. 진짜 사람 죽이는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까 간담이 서늘하네. 그리고 이보세요, 망둥이 누나. 사돈 남 말 하지 마세요. 누나도 키스라고는 전에 작업 들어갈 때 호구 땅 부자 형님…… 악!”

매디가 갑자기 주먹을 내질렀고 녹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녹스는 제 뺨을 부여잡고 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매디를 바라봤다.

“……누나, 나 진짜로 때리면 어떡해. 진짜 너무 아프잖아.”

“미안. 너 그러게 왜 옛날 얘기를 하고 그러냐.”

전혀 사그라지지 않는 싸움 탓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골머리를 앓고만 있던 율리키안의 눈빛이 변했다.

“호구 땅 부자가 누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