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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56)화 (56/135)

56화

기억들은 모두 조각났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늘 무언가에 쫓겼다는 것, 또 무언가를 쫓았다는 것.

어떤 이를 원망하고,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했고, 끝내는 포기했다는 감각들뿐.

가장 선명한 최초의 기억 속의 나는 피범벅이 된 상태로 넓은 평원에서 깨어났다.

그때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무심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고 모질지는 않았을 거라 여겼다.

혹은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쩌면 나는 그에게 벌을 받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왜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확신했다.

묵묵히 살았다.

주어진 삶이 벌이라면 마땅히 살아 내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살아 보고자 농장에서 일을 하며 서서히 느꼈다.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이었다.

온몸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들과 독초를 씹어도 살아남는 징글징글한 생명력.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내 의지를 배반하는 몸뚱이는 분명 ‘나’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만들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조각해 냈다. 불필요한 것은 쳐 내고, 깎아 내고, 첨예하게 날을 세워 날카롭게 빚었다.

그럼 내 기억을 없앤 사람도 그 사람일까? 날 ‘매디’라고 불렀던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답을 얻지 못했다.

끊어진 기억 바로 다음 순간 농장에서 만났던 할멈에게 ‘매디’라는 이름을 뱉는 순간 문득 느꼈다.

나를 매디라고 부르던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다고.

[매디. 매디는 어떠니?]

나를 ‘매디’라고 부르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대체 누가 내게 이름을 주었을까.

왜 내게 살라고 말하며 피로 얼룩진 손으로 내 등을 떠밀었을까?

커다란 손과 발, 낮고 단단한 목소리,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

기억들은 여전히 조각나 있다.

“매디. 도착했습니다.”

“……아. 네. 잠깐만요!”

마부의 목소리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얼빠져 있을 때가 아닌데.

화려한 깃털을 머리에 꽂고, 보석이 줄줄이 박혀 있는 구두를 신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한 올 없이 틀어 올린 머리에 나비 모양의 핀을 꽂았다.

아이고, 모가지 아파라.

율리키안의 약혼자 매디로 참석하는 파티니 그에 맞는 옷차림이 필요했다.

마차에서 내려 편지지에 적힌 약속 장소로 들어가려는 순간, 경비들이 가로막았다.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초대장이 있어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나 초대받았는데?”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초대를 안 받았으면 내가 왜 이 화려한 옷을 입고 이 더럽게 먼 데까지 마차를 타고 왔겠어? 약속이 있으니까 왔겠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야겠지?”

아무래도 내가 귀족으로 보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 이렇게 대놓고 건방을 떨면 귀족일까, 아닐까 의심이라도 하는데.

이놈들은 대놓고 나를 흘겨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초대장을 보여 주셔야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애인이 찢었어. 자기만 두고 이런 데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없어.”

거짓말인 줄 아는 모양이다.

경비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명단 확인이 안 되면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명단 확인은 그쪽들이 들어가서 주최자한테 물어보면 될 텐데? ‘매디라는 존나 예쁜 여자가 왔는데 들여보낼까요?’라고 해 봐.”

“……매디?”

“오. 나 아나 봐?”

경비들은 코웃음을 치며 내 어깨를 툭 밀쳤다.

“어디 급 떨어지게,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찾아오길.”

“여긴 너 같은 게 낄 데가 아니야. 꺼져.”

어머나. 나쁜 놈들이네.

“나 같은 거 부른 사람한테 물어나 보고 오라고.”

“됐다고. 꺼지라고. 시종 하나 없이, 샤프롱도 없이 혼자 온다고? 수준 알 만하네.”

경비들은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하여튼 이 기사 같지도 않은 새끼들은 손에 검만 쥐여 주면 본인이 뭐라도 되는 듯이 깝을 친다니까.

“초대받고 온 손님을 이렇게 독단적으로 돌려보내도 돼? 너희 둘 다 책임질 수 있어?”

“야.”

“왜?”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야. 네가 비싼 옷 입고 다니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아냐? 우리가 던지는 동전 주워 먹고 사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지금 내 옷을 봐라. 눈이 없니? 내가 네 동전 주워 먹게 생겼어?”

“이 썅, 건방진 년이! 당장 꺼지란 소리 안 들려?!”

“뭐 하는 짓이야.”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딱 봐도 귀족이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어도 귀티가 몸에서 줄줄 흘러나오고,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걸이에도 기품이 서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파티 주최자이신가요?”

“어딜 감히 먼저 말을 올려?!”

경비가 다시 내 몸에 손을 댔다.

어깨를 퍽 치는 움직임을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은 뒤 휘청거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아야야…….”

“뭐 하는 짓인가!”

귀부인의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초대받든, 초대받지 않았든 어쨌든 내 별장에 찾아온 귀중한 손님을 이리 대해서는 안 되지. 이보게, 들어오지.”

“감사합니다.”

경비병들을 지나치며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지나고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넓은 정원을 지나야 했다.

“소란스러워서 나가 봤는데 경비병들이 그렇게 사람을 홀대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유,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지키는 게 일인걸요. 초대장도 없이 왔다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죠. 비록 어깨는 아프지만요.”

“……초대장이 없다고?”

귀부인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지간히 숨기고 싶은 모임인가 보네.

초대장 없다는 소리에 눈깔이 도는 거 보면.

나는 주머니 속에서 초대장 끄트머리 조각을 꺼냈다.

율리키안이 찢어 버린 조각들 중 하나였다.

“종이를 보면 알아보실까요? 초대장을 받긴 받았어요. 약혼자가 가지 말라고 찢어서 그렇지.”

“……세상에. 어쩜 그리 폭력적일 수가.”

귀부인은 내가 내민 종잇조각을 들고 손끝으로 몇 번 매만지더니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우리 모임의 초대장이 맞군요.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려 눈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그야말로 품위의 인격화 그 자체였다.

다음에 어디서 귀부인 흉내 낼 일 있으면 이 사람 벤치마킹해야지.

머릿속으로 귀부인의 웃음과 걸음걸이, 말투와 행동을 모두 쓱싹 복사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정원 한가운데에서 티 파티를 즐기고 있는 여러 영애와 귀부인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여자들만 모이는 모임이었나 보다.

그래서 혼자서 참석하라고 한 건가?

함정인 줄 알고 걱정한 율리키안만 우습게 됐네.

아니지, 걔는 내가 눈앞에서 싸우는 걸 몇 번이나 봐 놓고 아직도 걱정을 하나?

여자든 남자든,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다 멀쩡히 이겨서 돌아갔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야.

걔는 다 좋은데 큰일을 하기엔 간이 작아.

나를 발견한 영애와 귀부인들이 저들끼리 소곤대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쟤네 다 합쳐도 내 옆에 있는 부인이 제일 고급스러워 보인다.

내 옆의 최고급 대빵 귀부인과 내가 함께 걸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다들 시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들 뵙네요.”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때 대빵 귀부인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도 말하려 했는데 보통은 윗사람이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입을 떼서는 안 되오.”

“그럼 지금 누가 봐도 여기서 제일 잘나가는 부인께서 제게 말을 거셨으니까 이제는 말해도 되겠죠?”

귀부인의 호박색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여러분∼ 반가워요! 율리키안 대공 전하의 약혼자 매디예요!”

‘매디’라는 내 이름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호기심에서 경계로 바뀌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누가 부른 거야……?”

이럴 줄 알았다. 요것들아.

이 중 누가 초대장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엿 먹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미리 예상을 했기 때문인지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아, 근데 아는 얼굴이 있네.

눈인사를 건네자 저쪽에서 티 나도록 몸을 움찔 떨며 뒤로 숨어 버렸다.

“바톨로즈 영애? 괜찮아요?”

샬로메 바톨로즈.

황제가 율리키안과 짝지어 주려고 한, 싹바가지 없는 애.

너도 참 너다.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바톨로즈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근처에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제게 아무 짓도 못 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 파티가 다 끝날 무렵이나 돼서야 등장하다니. 정말 염치없고, 무례하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건지…….”

파티가 끝날 무렵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테이블 위의 케이크는 거의 동나 있었다.

샬로메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우아한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저 사람을 초대하신 분이 있나요?”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가 불러 놓고 물어보니까 아무도 대답을 안 하지.

샬로메는 작정하고 내게 망신을 줄 모양인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잘못 전달됐나 봐요, 어쩌지. 나가 주셔야겠어요. 여기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모임이 아니라서.”

샬로메가 가증스럽게 웃으며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귀부인이 차분하고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순 없지. 빈자리에 앉도록 하게.”

“……하지만!”

당황한 샬로메가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귀부인이 손을 들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지간히 지체 높은 분인가 보지.

가운데의 커다란 테이블에 빼곡하게 쌓인 레모네이드를 마시려 손을 뻗었다.

“이 모임의 장이자 황후인 내가 허락한 일이니 더는 소란이 없었으면 하네.”

레모네이드를 마시다 말고 깜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이 사람이 황후라니.

어쩐지 너무 고급져 보이더라.

“황후 폐하.”

“말하세요.”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결혼 허락 좀 부탁드립니다.”

황후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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