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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합의된 사기 결혼입니다 (57)화 (57/135)

57화

황후는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곱게 틀어 올린 잿빛 금발이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게 무슨 얘기지?”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황후 폐하시면 대공 전하의 작은어머니가 아니십니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황후가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네, 폐하. 율리키안 쿤 론데네스 대공 전하와 결혼을 약속한 매디라고 합니다.”

드레스 양쪽을 잡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분명 예법에 틀린 부분이 없는데 어린 영애와 귀부인들 사이에서 재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머나.”

“저게 무슨 염치없는 행동이래요.”

“정말 본인이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리따운 황후는 애써 침착하게 미소 지었다.

황후는 율리키안의 작은어머니인데도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카르딘 하임 황후는 에이슬란 공국의 공주였다.

열다섯 번째 공주로 에이슬란 공국 내에서의 입지는 거의 미미하다 못해 없다시피 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르딘 하임은 공주들 중 가장 유명했다.

가련한 빛을 띤 아름다운 사람이라.

유순해 보이면서도 인자한 인상을 주는 호박색 큰 눈은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어 어쩐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 가진 사람인데.

저게 황제가 홀라당 넘어간 계기일까.

에이슬란 공국에 여행을 갔던 현 황제는 카르딘 하임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꽃씨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

직접 만나 뵈니 그 소문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런 황후가 사돈 남 말을 한다.

“소문과는 달리 미인이군.”

“소문보다 더 미인이죠. 본래 진짜 미인은 말로는 설명이 힘들죠. 이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황후 폐하. 처음 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뵙겠습니다.”

느긋하게 대답하자 곳곳에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알 바임?

몬테네쟌도 백작을 끊어 내면 허락을 받아 낼 수 있는 친척은 얼마 없다.

황제와 황후도 부부 사이니 허락 못 받아 낼 거야 없지.

황후가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허락한다고 해도 황제 폐하가 그대를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라…….”

“그건 차차 얘기 나누시죠. 저희도 당장 내일 결혼할 게 아니라서 시간은 많습니다.”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상체를 살짝 더 꼿꼿하게 세운 카르딘 황후는 이내 빙긋 웃고 말았다.

꽃씨가 아니라 꽃 같은데.

황후는 그냥 꽃도 아니고 줄기 대가 얇은 코스모스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어떤 귀부인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이죽거렸다.

“건방도 정도껏 떨어야지. 황후 폐하가 어떤 분이신데 감히 결혼 허락을 부탁해?!”

나는 빠르게 귀부인을 훑어보고 판단을 내렸다.

이 여자가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는 몇 달 전 론데네스로 수입된 고급 루비를 특수 세공한 주문 제작 반지였다.

콤페네즈 베리아 자작이 부인을 위해 영지의 3년 치 생활비를 쏟아부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

굶어 죽는 영주민들의 원망이 아마 이 지구 반 바퀴는 돌았을 거다.

그런데도 잘도 끼고 다니네.

하긴, 귀족들께서 영주민들이 죽어 가는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겠지.

워낙 높은 담을 치고 사시니.

나는 빙그레 웃으며 베리아 자작 부인에게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베리아 자작 부인.”

베리아 3년 치 사치 자작 부인은 제 이름이 불리자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를 아는 거 보니 어지간히도 사교계에 발을 들이고 싶었나 보지?”

“글쎄요, 사교계는 별로 탐이 안 납니다. 바라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서요.”

“그걸 누가 믿어?!”

“왜 못 믿어?”

“뭐?”

“혼잣말이었습니다.”

베리아 자작 부인이 금방이라도 나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네가 어떤 꿍꿍이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황후 폐하는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니야.”

“그런 일이라니요. 황후 폐하께 결혼 허락을 부탁할 명분은 차고 넘치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라? 설마 베리아 자작 부인께선 황후 폐하는 결혼을 허락하고 말고 할 힘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베리아 자작 부인은 나와 황후 폐하를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 무슨 그런 무엄한! 아닙니다, 황후 폐하!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며 당황하던 베리아 자작 부인이 내게 따귀를 날렸다.

“감히 나를 모함해!”

짝 소리와 함께 시선이 돌아갔다.

돌아가는 시선 끝에 미소를 띠고 있는 샬로메와 눈이 마주쳤다.

샬로메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확실히 웃고 있었다.

내가 사고를 치길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저번의 맞장으로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나 보구나.

돌아간 머리를 천천히 제자리로 돌려놓고 베리아 자작 부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부인. 잠깐 따로 얘기 좀 하실까요?”

“이…… 하녀로도 못 쓸 천한 빈민이……!”

베리아 자작 부인이 한 번 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한 대만 더 때려라.

그러면 완전히 매장시켜 주지.

사전적 의미로.

“이게 무슨 짓인가.”

본격적으로 싸움이 붙으려는데 황후가 베리아 자작 부인을 막아섰다.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지도 않았다.

“이 아가씨가 내게 무례를 범했다면 내가 꾸짖을 일이야. 그만하지.”

“하, 하지만 황후 폐하. 이 미천한 계집이 감히 저를 욕보였습니다. 제가 폐하를 무시한다고 모함했지 않습니까.”

“자네의 진심이 그렇지 않다면 된 일이네. 그만하고 물러나지.”

베리아 자작 부인은 분한 듯 주먹을 꾹 쥐었다가 뒤로 물러났다.

황후는 내게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른 이들을 향해 몸을 틀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뱉을 뿐이었다.

“오늘 파티는 이만하도록 하지. 소란해진 탓에 두통이 오는구나.”

그리 말하는 것치곤 낯빛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처연하고 서글픈 관상이라서 그런가.

황후는 특유의 은은한 미소로 정원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말했다.

“영애와 부인들이 먼 곳까지 와 주었는데 이리 급작스럽게 마무리하게 되어 아쉽소.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은 까트린 백작 부인이 정할 차례인가?”

“예, 황후 폐하.”

“그럼 그대가 다음 모임 전까지 기별을 돌려 주게.”

“예. 제가 알맞은 책을 정해 늦지 않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책?

여기 독서 모임이었나.

그런 것치곤 과하게 비밀스러운데.

아니면 황후가 측근을 직접 관리하는 작고 위대한 사교계인가.

이 독서 모임은 샬로메처럼 어린 영애도 있지만 대부분은 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귀족들이 참석하는 것 같았다.

중앙 귀족의 부인들이라면 여기 들어오고 싶어서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손수건만 물어뜯고 있겠는데.

근데 뭔가 이상했다.

……독서 모임이라는데 사람들 손에 들린 책 한 권이 없다.

다들 와인이나 레모네이드를 들고 있을 뿐.

독서가 목적이 아니신 것 같은데.

테이블 위에 몇 권의 책들이 있긴 했지만 누가 봐도 인테리어용이었다.

게다가 저 책은 내가 알기로 사교계에서 주로 쓰이는 예법들에 대해 적혀 있는 책이다.

파티의 목적에 따른 춤 종류, 부채를 통한 대화 방법, 예의 바른 거절, 손님을 맞을 때 주인이 준비해야 할 음식과 술 등.

저건 사교계에 입문해서 결혼하기 전까지 익혀야 할 내용인데.

대충만 훑어봐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3분의 2는 이미 결혼한 이들이고.

그런데 저런 책을 읽는다고?

말도 안 되지.

“오늘 책은 누가 정하신 건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후는 또 당황한 듯 난처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라더니 어지간히 이 파티가 그냥 끝나길 바라나 보다.

“이제 그만 끝냈으면 하는데.”

“저 책이 마치 절 위해 준비된 것 같아서요. 어느 분의 추천인지 궁금합니다. 저런 기본 교양서를 잘 아신다면 사교계 집중 예법이나 하인들을 부리는 방법에 관한 책도 아실 것 같아 추천을 받으려고요.”

“……샬로메 바톨로즈 영애의 추천이네.”

“아하.”

나는 생글거리며 샬로메를 바라봤다.

내가 올 걸 알고 미리 이 책을 선정해 놨구나?

나와 눈이 마주친 샬로메가 움찔 떨더니 코웃음을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추천이라니. 하하! 하긴 예법에 관해선 하나도 모를 테니 필요하긴 하겠군요. 여기 있는 책들 직접 들고 가져가지?”

다른 부인들도 비아냥거렸다.

황제의 측근인 바톨로즈 가문의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알 만하네.

다들 저 어린애 말을 거들기 바빴다.

“백번 읽은들 알겠어요?”

“책은 장작으로만 썼을 텐데요.”

“한 권으로 부족할 테니 제 것도 줘야겠네요.”

“제 것도요.”

“수레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머. 마차에 넣어 가면 되지, 아! 천출은 마차를 탈 줄 모르나?”

샬로메가 까르르 웃으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몇 권으로 되겠어요? 평생을 빌어먹은 머리에 기본 상식을 넣으려면 짐마차 한 대 정도는 필요하겠죠!”

사람들이 숨이 넘어가도록 까르르 웃었다.

“그만들 하지.”

황후는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대는 다음에 초대하겠다.”

글쎄.

어쩌면 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본디 조용한 성품인 황후가 존재만으로 시끄러워지는 나를 여기에 초대할 리가 없었다.

이럴 땐 남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네, 다음엔 착오가 없도록 황후 폐하께서 직접 제게 초대장을 보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건방지게 말을 끝내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황후의 충실한 시녀가 욕 없는 욕을 퍼부었다.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지! 폐하! 저자가 뭘 알겠습니까! 저런 천한 아이를 초대하면 폐하의 명성에 누가 됩니다!”

샬로메도 말을 얹었다.

“맞습니다! 황후 폐하 앞인데도 저렇게 천지도 모르고 까부는데 어떻게 저희 모임에 초대를……!”

그래, 너 입 안 털면 서운할 뻔했다.

황후는 모두를 타이르듯 조곤조곤 설명했다.

“이 아가씨의 계급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공과 결혼하면 대공비가 되는 사람이지 않나. 다들 너무 모질게 굴지 마시오.”

그때 세상에 단둘만 남아도 절대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깐깐한 관상의 부인이 입을 열었다.

“간단한 테스트를 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공평하게요.”

“좋은 생각이군. 통과만 한다면야 더 이상의 반대도 없을 테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은 황후는 처음 봤을 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본래 이 계절엔 꼭 아침마다 피렝쉬 구이를 먹는단다. 그런데 올해는 그러지 않았어. 왜일까?”

어쩌면 이 모임에서 나를 가장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황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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