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다른 부인들이 말리며 샬로메는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샬로메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진 않았다.
“자신 있으시면 얼마든지 해 보세요. 차라리 사람을 사서 절 죽이시는 게 더 싸게 치겠지만요.”
샬로메는 다른 귀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뒤로 물러났다.
겁은 먹은 것 같지만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억울한 듯 보였다.
다른 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이보게. 이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하고 가지. 원하는 건 충분히 얻은 것 같은데.”
“저는 방금 이 맛있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찻물로 세수한 것 빼고요.”
어깨를 으쓱한 뒤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샬로메가 부은 차 때문에 자리도 축축하고 얼굴 역시 젖어 있었지만 일단 차는 끝까지 마셔야지.
나는 오늘 독서 모임의 주제였던 책을 눈짓으로 한 번 가리킨 후 말했다.
“다들 잊으셨나 본데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 주인이 준비한 첫 번째 차는 무조건 마시라고 적혀 있지 않던가요? 아. 그걸 다들 모르셔서 이 독서 모임 주제로 저 책이 선정된 걸까요?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이네요.”
“이봐!”
“매디.”
“뭐……?!”
나를 몰아붙인 부인은 볼살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대체 뭐가 그리 억울하고 화나는지.
아마 이들은 감히 ‘천것’ 따위가 본인들의 위에 선다는 게 분한 것이다.
빈민 주제에 대공비를 꿈꾸는 게 이 정도로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린애 편을 들고 왕따를 시키면서까지 쫓아내고 싶을 정도로 원통한 것이다.
어리석게도.
죽으면 다 똑같이 생겼는데 말이야.
나는 귀부인을 향해 다정히 물었다.
“언제까지 이봐, 이보게, 빈민, 천한 것 따위로 저를 부르실 건가요? 제가 결혼한 후에도 면전에서 그리 부르시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실 텐데요. 연습이라도 미리 해 두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덧붙였다.
“매디예요. 앞으론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좋든 싫든 자주 뵙게 될 테니까.”
“이…… 요망한…….”
“물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저는 상처 받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그럼 다음 모임 때 뵙죠. 차를 다 마셔서 이만.”
빈 잔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 내린 차에 말린 꽃잎들이 있었나 보다.
향긋하기 그지없어 발걸음마다 꽃길을 걷는 듯하네.
산책이라도 하듯 기분 좋게 걸어 넓은 별장 정문을 나서자 문 앞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타고 온 마차뿐 아니라 대공저의 마차까지 한 대 더.
마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 달려왔다.
그는 아주 귀한 것을 쓰다듬듯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내게 화를 냈다.
“꼴이 이게 뭐야? 누가 무슨 짓이라도 했어? 뜨거운 차를 얼굴에 부은 거야? 매디. 괜찮아?”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
나를 걱정하며 화를 내는 사람.
율리키안은 손수건으로 내 젖은 머리카락과 얼굴을 톡톡 두드려 닦다가 문득 나와 눈을 마주했다.
“매디?”
나는 샐쭉 웃었다.
“잘생겼어요, 자기.”
“가, 갑자기?”
“모르고 있었던 거 아니잖아요?”
“뭐…… 아니, 그, 그래도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얼굴이 내 취향이라고.”
율리키안은 피식 웃고는 마차로 걸어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타, 데리러 왔으니까.”
“왜요? 나 걱정해서? 내가 너무 좋아서?”
그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쉰 후 내 손을 잡고 마차에 태웠다.
“그래. 무슨 일 냈을까 봐 걱정돼서 왔어. 네가 좋은가 보지.”
“어머. 나 이렇게 사랑받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할 텐데. 자기야, 다음엔 파티 같이 가요. 힝, 혼자 가니까 사람들이 매디랑 안 놀아 줭.”
“그러게 혼자 가지 말라고 했잖아.”
“수확은 있었어요.”
“무슨 수확?”
“가면서 얘기해요.”
나는 마차 안쪽에 자리 잡고 앉은 뒤 율리키안의 재킷 목 부분을 잡고 멱살을 잡아당기듯 그를 마차 안으로 태웠다.
휘청거리던 율리키안이 두 손으로 내 양옆 소파와 반대편 창문을 짚었다.
문을 닫아 주기 위해 다가오던 마부가 깜짝 놀라 제자리에 굳은 걸 확인하곤, 발을 뻗어 마차 문을 닫았다.
“방금은 마부를 속인 거야?”
“마부도 그렇고, 내 뒤에 따라오던 바톨로즈 영애도 그렇고.”
미소를 지은 율리키안은 마차에 똑바로 앉았다.
천천히 열까지 센 후 그는 입술을 옷소매로 거칠게 문지른 후 마차 창을 열고 말했다.
“이제 출발하지.”
살짝 붓고 붉어진 탐스러운 율리키안의 입술을 보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기 진짜 나랑 같이 일 하나 해야 돼.”
“사기꾼 되자는 말을 왜 자꾸 하는 거야. 필요 없다니까.”
“하하하. 이잉! 사람이 살면서 한 번은 범죄에 연루돼 봐야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감기 걸리지 않게 담요 덮고 있어. 도착하면 목욕부터 하고.”
“어우, 자기는 다 좋은데 잔소리가 너무 많아.”
“거짓말하지 마. 다 좋지도 않잖아.”
“눈치도 너무 빨라. 별로야.”
율리키안이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가 건네준 담요를 덮으며 함께 웃었다.
마차는 대공저를 향해 달려갔다.
* * *
“흐아앙!”
울음이 터진 샬로메를 다른 귀부인들이 달래 주긴 했지만 분이 쉽게 풀리진 않았다.
서럽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저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하층민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샬로메는 씩씩거리며 저를 데리러 온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반가운 이가 그녀를 반겼다.
기쁘게도 샬로메에게도 데리러 온 남자가 있었다.
람다 바톨로즈.
입양된 오라비지만 항상 변함없이 다정한 사람.
람다는 샬로메의 어리광을 다 받아 주었고, 아버지 말로는 ‘쓸 만한’ 아들이었다.
물론 샬로메는 람다의 쓸모가 무언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에게 람다는 삭막하고 딱딱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의지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몰래 저를 달래 준 적도 많았다.
아마 친오빠가 있었대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샬로메는 그가 저를 데리러 온 것이 기꺼웠다.
“오빠!”
“샬로메, 파티는 재밌었니?”
“내 얼굴을 보고도 그래?! 나 기분 완전 별로야!”
“왜 그랬을까, 우리 샬로메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누구야. 가서 혼내 줘야겠다.”
람다는 마차 안에 딸린 작은 창을 똑똑 두드리곤 밖에 앉은 마부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출발해.”
하층민을 대하는 태도가 누가 봐도 귀족적이었다.
샬로메는 내심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품위 상하는 일이 없지.
“샬로메. 불편한 일이 있으면 말해 보렴. 편히 기댈래? 쿠션을 꺼내라 할까?”
게다가 저를 공주님처럼 떠받드는 모습까지.
“오빠는 누구와는 달리 자기 주제를 알아서 좋아.”
“그게 무슨 말이야?”
샬로메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퍽퍽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대공 전하가 데려온 그 여자 말이야. 건방지기가 짝이 없어.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왜 우리 샬로메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람다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일부러 마차가 달리는 역방향에 앉아 저를 달래는 오빠를 보니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샬로메는 그간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람다에게 털어놓았다.
하도 건방져서 버릇을 고치려 따귀를 때렸더니 그 여자가 나를 잡고 뒤흔들었다. 꼴에 결투 신청까지 해서 나를 때렸다, 등등.
“아버지께 말하면 또 나한테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애라고 뭐라 하실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오빠가 그 여자 좀 멀리 내쫓아 줘.”
“얼마나 멀리?”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두 번 다시는 땅을 밟을 수 없도록…….”
람다는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제 말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니 아마 지금쯤 그 미친 여자를 어디다 갖다 버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오늘도! 오늘도 벌써 대공비라도 된 것처럼 구는 거야! 황후 폐하께 아양이나 떨고. 입 놀리는 게 듣기 싫어서 찻주전자를 확 부어 버렸어. 어찌나 열이 받던지.”
“찻주전자를? 많이 화가 났나 보구나.”
새삼 떠올리니 또 분노가 치밀었다.
“난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나도 그래.”
“오빠도 그렇지?! 오빠라면 내 편을 들어 줄 줄 알았어.”
람다는 여전히 변함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을 기억하니?”
“내가 그런 거 하나하나 기억해야 돼?!”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이름을 알고 있나 해서.”
“……매디.”
“매디?”
람다의 노란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손을 뻗어 샬로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틀렸단다, 샬로메.”
“응?”
“얀.”
“……뭐라고?”
“얀이라고. 그 애 진짜 이름.”
람다는 마치 꿈을 꾸듯 바깥을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 세상에 얀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니. 너무 슬픈 일이야.”
마차는 나무로 만들어진 짙은 그늘 사이로 들어갔다.
람다의 샛노란 눈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 여자, 알아?”
“얀은 내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순진한 애였지. 얼마나 귀엽고 예뻤는지 몰라. 걔를 잃어버리고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되찾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고생했는지. ……샬로메, 너는 아직 사랑을 알기엔 너무 어리구나.”
“그, 그럼 오빠가 그 여자 데려가서 결혼하면 되잖아! 오빠가 결혼해!”
“내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람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미친 듯이 웃던 람다가 겨우 웃음을 거두고 샬로메에게 대답했다.
“샬로메, 기르던 개와 결혼하는 주인이 어디 있니? 징그럽게.”
제가 알던 오빠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샬로메가 마차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 나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내려야겠어.”
람다는 샬로메의 손목을 잡아 문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리고 샬로메의 작은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나도 그래, 샬로메.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지. 넌 오늘…… 그래, 도적떼를 만난 거야.”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