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율리키안은 매디가 미리 적어 준 주소와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외우고, 태우세요. 정오가 지나면 바로 출발하시고요. 아스트리드가 혼자 있는 시간이 10분이 넘으면 안 돼요.]
[왜? 무슨 일 있어?]
[……애기 위험하잖아요.]
뭐 당연한 걸 새삼 묻느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매디는 의외로 그런 부분에서 상식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지 말자는 당연한 사회적 규범에는 당황했으면서.
[진짜 단 한 번도 남의 거 뺏은 적이 없다고요? 실수로라도?]
[실수로 남의 거 뺏을 일이 있어?]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어떤 불가피한 상황이 와야 남의 것을 뺏을 수 있지?]
[……나의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에, 남의 목숨을 뺏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매디.]
[오ㅒ?]
[왜야, 예야? 발음을 어떻게 한 거야?]
[잔소리할 것 같아서 띠껍게 대답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말 계속해.]
[결혼식 날짜 잡았으니까 가능한 한 다른 사람 다치게 하면 안 돼.]
[헐, 왜요? 설마 복 나갈까 봐? 축복을 받지 못할까 봐?]
[아니. 너 감옥 가면 결혼 못 하니까. 결혼식 창살 사이에 두고 결혼할 순 없잖아.]
[어머, 자기야. 그것도 너무 로맨틱하당.]
[좀.]
[넵.]
능청을 떠는 매디를 생각하니 또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쪽지를 벽난로에 던져 완전히 타는 걸 확인한 율리키안은 방을 나섰다.
집사장 필립이 다가와 율리키안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며 말을 걸었다.
“매디가 오고 나서 대공 전하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는군요.”
그리 말하는 필립의 얼굴도 웃음꽃이 만발했다.
율리키안은 2층 복도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몇 달 전과는 저택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용하고 조심스런 분위기의 저택에 활기가 넘쳤다.
하녀건 하인이건 할 것 없이 다들 즐거워 보였다.
“야, 매디 아침부터 왜 안 보이지? 나 웃긴 얘기 알아 와서 들려줘야 되는데.”
“저번에 매디가 네가 하는 얘기 하나도 안 웃기다고 했잖아. 너 이번엔 제대로 준비한 거 맞아?”
“나 다른 집에서 일할 때 다른 마님들은 다 웃었어.”
“그분들이 착한 거지.”
“너 그럼 매디는 나쁘다는 소리야? 매디한테 다 말한다.”
“말해라, 얘. 매디는 그러려니 할걸.”
“하긴.”
“얘들아. 매디 못 봤냐. 저번에 매디가 가르쳐 준 술 깨는 약 제조 비법이 뭐였지? 내가 잘못 외웠는지 술이 안 깨는데.”
“로디 아저씨, 매디는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는데 대체 누구 말을 믿는 거예요.”
“이런, 또 속았구먼. 하하하!”
“로디! 너 개다래 안 넣은 거 아니야?”
“개다래가 아니고 헛개수다, 인마! 누굴 고양이로 알아?!”
“크하하핫!”
율리키안은 시끌벅적해진 저택 현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용인들은 각자 일하러 가면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소란스러운데도 불쾌하지가 않았다.
느긋하게 뒷짐을 진 필립이 조곤조곤하게 말을 건넸다.
“대공 전하,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매디를 믿습니다. 그 아가씨가 돈을 노리고 대공님께 접근한 게 아니라고요. 다른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게 사실이라면?”
실제로는 돈을 들이대면서 제가 먼저 접근했지만.
필립은 율리키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돈 좀 주면 어떻습니까?”
“뭐?”
필립의 표정이 전에 없이 여유로웠다.
“그렇게 컸으니 돈을 좋아할 만하죠. 전하는 돈이 많고, 매디는 정이 많으니 물물 교환 하는 거지요. 돈 좀 주면 어떻고, 덜 주면 어떻습니까. 안 주지만 않으면 되지. 매디가 떠나지만 않으면 되지요.”
“하하, 그런가?”
“제가 이 나이까지 살아 보니, 돈 주고 살 수 있는 행복은 빨리 사는 게 좋더군요. 장담컨대, 매디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전하께 돈과 지위, 그 이상을 가져다줄 겁니다.”
율리키안은 아무런 말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필립이 덧붙였다.
“이미 그렇지 않습니까.”
율리키안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긴 해.”
“전하만이 줄 수 있는 행복도 있을 겁니다. 원래 사랑이 주고받고 그러는 거지요.”
필립의 말대로 매디가 가져다준 즐거움은 율리키안을 숨 쉬게 했다.
이명이 아닌 사람들의 웃음을 들을 수 있게 했고, 어머니가 쓰던 방을 치우고 나니 환영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율리키안은 제 집무실과 반대편에 위치한 어머니의 방을 바라봤다.
매디가 문 앞에서 하녀와 실랑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내애가! 안주인이 될 건데! 안주인이 쓰던 방을 왜 못 쓰냔 말이야!]
[매디……. 여기는 큰 마님이 쓰시던 곳이에요. 대공 전하의 어머님이요.]
[그래, 그러니까. 대공저에 대대로 안주인이 쓰던 방이 여기라며.]
[그래도……. 그, 저기, 큰 마님이 좋지 않게 돌아가셨기도 하고요.]
[록시. 세상에 좋게 돌아가시는 분이 어디 있니. 빈민촌 가 봐라. 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다 죽어요. 사람은 다 죽어. 당장 내가 오늘 쇼핑 가다가 마차에 치여 죽으면 내 방도 걸어 잠글 거니?]
[그건 아닌데…….]
[죽은 사람 끌어안고 살면 산 사람도 못 살게 되는 거란다.]
[매디 말대로 해.]
[헙! 대공 전하!]
[매디 말이 맞아. 그 방 치워. 결혼식 이후에 곧바로 매디가 쓸 수 있도록.]
[우웅, 자기만 좋으면 매디는 자기랑 같은 방 써도 좋은뎅.]
[아니야. 난 네가 꼭 저 방을 썼으면 좋겠어.]
[히잉! 자기 방이랑 너무 멀어용!]
[그러니까. 그래서 네가 저 방을 썼으면 좋겠다는 거야.]
누가 들어도 멋모르고 대공저에 들어와 패악을 부리는 악녀 같은 대사였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제 마지막 말을 들은 매디는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더니 율리키안에게 팔짱을 껴 왔다.
그리고 제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요새 왜 연기 안 하니? 일 잘 풀리니까 스릴이 부족하니, 자기?]
그래서 저도 매디에게 속삭였다.
[널 믿는 거지. 마차 사고로 내가 죽을 뻔했을 때 여기까지 날 업고 와서 살려 낸 너를.]
매디는 인중을 쭉 늘리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특유의 약 오르는 표정을 지고는 ‘어머’ 하는 감탄사와 함께 율리키안의 어깨를 툭 쳤다.
[어쩜, 자기 조만간 장가가겠어요. 마음만 먹으면 돈 많은 과부도 금방 꼬시겠어.]
[글쎄.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레이디 알마라면 가능할 것 같네.]
[레이디 알마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것 같아?]
[아니. 레이디 알마한테 내가 마음을 먹는 게 가능할 것 같다고. 나도 마음이 있어야 들이대 보지.]
[어머, 자기야.]
그때의 매디 표정이 생각나 율리키안은 또 ‘풉’ 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은 매디가 두 눈을 치켜뜨고 긴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렸었다.
일부러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람 약 올리는 걸 어찌나 잘하는지.
“전하. 다 좋지만 너무 헤벌쭉 웃으시면 아랫사람들 보기가 안 좋습니다.”
“내가? 헤벌쭉 웃었나?”
“예. 약간 바보처럼.”
필립이 과장하며 율리키안을 따라 했다.
눈동자를 아래로 굴린 채 멍하니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있으니 정말 바보가 따로 없어 보였다.
“……주의하지.”
율리키안은 도망치듯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3년이 지나도 헤어지지 않으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필립의 말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라면 얼마든지 사고 싶었다.
거래를 했으니 이미 구매했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이건 대여료에 불과했다.
이 행복이 3년 대여에 10억이면…….
조금 비싸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려던 그때였다.
낯익은 사람이 대공저의 정원을 지나 정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을 잡아먹은 것처럼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뱀처럼 긴 눈매.
피가 떨어져 번진 것처럼 새빨간 눈동자.
전에 매디를 ‘얀’이라고 불렀던 남자였다.
람다 바톨로즈.
매디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남자.
“대공님, 마침 계셨군요.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실까요?”
“별로 안 괜찮은데? 다음에 미리 약속을 잡고 방문하지.”
“……전하의 약혼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요.”
“매디에 대한 소문은 질리도록 들었으니 됐어.”
그대로 그를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람다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소문은 소문에 불과하죠. 저는 소문보다는 진실 쪽에 가깝습니다. 다른 말로 과거……라고 하죠.”
율리키안의 시선이 람다를 향했다.
“드디어 절 봐 주시다니. 영광스럽네요.”
남자의 얇고 긴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물어보고 싶은 거야 많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아스트리드가 혼자서 율리키안을 기다리고 있었다.